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28화 (128/365)

128화. 옛것 (3)

인챈트라는 것은 곧 재해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상성의 우위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상성의 우위라는 것도 인챈트를 다루는 사람에 따라 발휘되는 힘이 다르기에,

기본적인 개념상 우위에 해당하는 재해도 언제든지 열세로 뒤바뀔 수 있다.

하지만 상성 상 우위에 해당하는 인챈트를 가진 이가 심지어 상대보다 실력자라고 한다면,

그건 마치 자연의 법칙과도 같아서 감히 뒤집을 수 없다.

이슨은 그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은 수월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구현된 기록적인 폭우는 능히 한 점을 잡고 쏟아져 목표한 대상을 익사시킬 만큼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그뿐인가?

장악형 인챈트의 진정한 힘은 바로 진형이 구축되었을 때 발휘된다.

아군 진형의 강화, 혹은 상대 진형의 붕괴.

일대에 쏟아진 이슨의 폭우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상대가 밟고 있는 지반을 무르게 만들고, 폭우에 감긴 풍향은 아군 궁병들에게 활로를 제공한다.

“쏴라!”

이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십에 달하는 궁병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휙!

반대편, 일방적인 강우량을 뒤집어쓴 외로운 기사를 향해 날아간 화살들은 곧.

카각! 캉!

은빛 갑주에 부딪혀 갖은 불똥을 튀겼다.

화살 따위로 기사의 갑주를 뚫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갑주를 두른 이슨이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티히트라는 기사를 저격할 인원을 훈련 시킬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을뿐더러, 강력한 화살촉을 만들어낼 시설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그저 저지력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쏜 것이니.

폭우로 진창이 된 지반 위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저지력을 뚫고 나와보아라.

그렇지 않으면 폭우와 지형이 동시에 너를 집어삼킬 것이다.

이슨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그 미소 속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다.

진형과 인챈트를 전개하면서 내뱉은 자신의 말에 심드렁히 대답한 저 기사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곳을 장악한 건 내가 아니라고?”

작게 중얼거리던 이슨이 재차 검을 들어 휘두르자, 기다렸다는 듯 후열에서 일거에 발사된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어디 보여봐라, 네놈이 가진 것을!”

직후 일갈하듯 소리친 이슨의 말에,

폭우 속에 잠자코 화살을 받아내던 기사는 천천히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직하게 앞을 향해 걷던 기사는 들고 있던 세이버의 끝을 이슨에게 조준하며 말한다.

“가랑비에 제 옷 젖는 줄도 모른다더니.”

그 순간,

이슨은 느꼈다.

칼끝으로 자신을 겨눈 기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파동을.

* * *

내가 가진 인챈트는 그릇과 같다.

그러니 쏟아라,

네가 쏟는 모든 것이 내 그릇에 담길 것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폭우가 잘근잘근 씹어 묽은 진흙이 된 땅은 내 그리브를 옥죄어 왔고,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화살은 내 전신을 두들겼지만.

그럼에도 내 발걸음에 물러섬은 없었다.

저들의 화살이 내 갑주를 뚫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슨 블로사는 인챈트를 어떻게 다루는지조차 모르는 듯 보였으니까.

하긴, 이 근방의 땅에선 그저 인챈트를 쏟는 것만으로도 감히 적들이 대적하지 못했겠지.

그러나 지금부터는 얘기가 아주 달라질 것이다.

21년, 이다치오라는 그릇이 만족할 만한 폭우는 아니지만.

저들을 휩쓸기엔 충분한 양이 모였다.

이슨을 향해 겨누었던 세이버를 내지르듯 찌른다.

이 검술은 오롯이 이다치오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자, 내 동료이자 친우였던 맥레인이 완성 시켜준 것.

[파동, 1형]

범람해라.

세이버의 자루 속 새겨진 인챈트로부터 막강한 진동이 뿜어져 나온다.

이윽고 내지른 검을 뒤따르듯, 땅 위에 고인 빗물이 하나의 파도가 되어 앞으로 몰아쳤다.

이슨의 병사들이 구축한 진형은 몰아친 한 번의 파도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비명이 빗발치고, 그들의 놓친 병기들이 휘몰아친 물살 위에 둥둥 떠 있다.

평탄한 대지 위,

한 부분이 내 의지에 따라 물에 잠겼다.

* * *

양단된 말의 몸과 머리가 허공에 흩날리고.

허리째로 깔끔히 절단된 육신이 바닥에 떨어진다.

이 모든 건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만들어진 결과였다.

병사들은 그 경악스러운 광경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 누구도 섣불리 앞으로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으리라.

그들 가운데 열이 넘는 이가 중무장한 기마병이었음에도!

이러한 병력 앞에는,

한 잿빛의 기사가 서 있다.

그의 이름은 베르융 오르테.

그는 방금 두 손으로도 들기 버거워 보이는 먹색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둘러 기마병 하나를 단칼에 양단 내버렸다.

더군다나 들고 있던 대검을 어찌나 빠르게 휘두르던지 그 풍압에 일선에 있던 기마병 하나의 투구가 벗겨질 지경이었다.

도저히 두 발 걷는 자로는 보기 힘든 괴력.

병사들 사이에 있던 기사 몰룬은 그런 그의 괴력을 단박에 간파해냈다.

인챈트, 그것도 신체에 재해 그 자체를 덧씌우는 재림의 인챈트다.

“기마병은 고삐를 틀어 중앙으로 간다! 놈들의 머리를 쳐라!”

짧은 시간 내에 머리를 굴린 몰룬이 기마병을 추려 고삐를 돌리게 했다.

일개 병사들로 저 기사를 상대하다간 일방적인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하니, 어떻게든 승산이 있어 보이는 쪽으로 걸어보겠단 그의 승부수였다.

하지만 기마병들이 채 고삐를 돌리기 전에,

검은 무언가가 그린 반달이 기마병 셋을 스쳤다.

직후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으…으아아악!”

“뭐…야?!”

쏟아진 혼돈에 어지럽혀진 현장.

말째로 양단된 기마병의 시체가 바닥에 나뒹군다.

몰룬은 창백해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퇴각하라, 모두 퇴각하라!!”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본인은 고삐를 잡아 베르융에게 돌진했다.

베르융은 달려오는 말의 다리를 대검으로 가차 없이 갈라버렸고,

그렇게 안장으로부터 튕겨 바닥에 나뒹군 몰룬은.

“크윽…!”

겨우 자세를 추슬러 아밍소드와 라운드 실드를 고쳐 잡고 묵묵히 달려들었다.

[68년, 다티오]

[높은 산에서 굴러떨어진 바위 바람]

자신에게 높바람이란 칭호를 부여해준 인챈트를 발동해 전신을 충만하게 채운 몰룬이 인간의 탈을 벗어난 움직임으로 베르융에게 치달아,

곧 두 기사의 검이 맞부딪쳤다.

쾅!

부딪친 두 검을 기점으로 퍼져 나가는 원형의 풍압에 땅은 갈색 흙을 토해내며 뒤집힌다.

“퇴각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다니, 실로 기사의 본보기로군.”

“닥…쳐라!”

그레이트 헬름 안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몰룬은 순간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사력을 다해 대검을 밀어냈다.

이어 라운드 실드 위로 검 끝을 걸친 채 자세를 다잡는 몰룬을 향해,

베르융은 자신의 몸에 휘감긴 폭력적인 기류를 사방에 방출하며 대검을 높이 치켜세웠다.

[19년, 바렌투스]

[대륙을 난타한 바람]

에르엥이 이끌었던 기사단 내,

최강이라 일컬어지던 맥레인을 잇는 기사 베르융.

그가 곧 양손으로 가득 쥔 대검을 횡으로 휘둘러 몰룬을 베었다.

대검은 그대로 몰룬의 방패와 방패를 들고 있던 팔을 자르고 흉갑까지 베어 옆구리까지 파고들었지만,

몰룬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통을 삼키며 베르융에게 물어야만 했다.

“왜 직전에 힘을 줄였지?”

그러자 베르융이 대검을 거두며 답한다.

“가서 패배를 알려라.”

그 말에 몰룬은 힘없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그렇게 기사 몰룬의 마지막 퇴각을 끝으로 전투는 매듭지어졌다.

* * *

전투를 마친 두 기사가 천천히 내게로 걸어온다.

이 전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없었다.

과거를 묻고 현재라는 장막 밑에 숨어 지내야만 했던 기사들이 베나즈의 이름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그저 그들이 가져온 승전을 듣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끝났습니다, 디안님.”

흠뻑 젖은 조이가 투구를 벗고서 내게 말했다.

축 처진 콧수염과는 달리 평온해 보이는 그의 표정은 방금 있었던 전투와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어 베르융도 묵묵히 투구를 벗어 내게 고개 숙여왔다.

“곧 패전했다는 것을 알게 된 티히트라 측에서 사신을 보내올 겁니다.”

마음을 다잡으며 준비한 것과는 달리,

첫 전투는 참으로 허무하게 끝이 났구나.

동시에,

두 기사가 가진 역량 일부를 보고 나니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그렇게 멀게 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서두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차근차근, 아주 확고하게 길을 다지며 걸을 생각이야.

그래야만…,

맥레인을 중립지역으로 도망치게 만든, 저 두 기사가 오랜 시간 동안 숨어 살게 만든 그 깃발을 철저하게 무너트릴 수 있을 테니까.

* * *

말을 타고 갔던 길을 되돌아간 우리는 그 짧은 시간에 금방 그리워졌던 리케니엔에 도착했다.

아네즈는 무사히 귀환한 베르융을 보자마자 얼른 달려가 그 품에 안겼고, 바돈과 세라는 나와 조이를 반기며 말에서 내리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이어 소문을 들은 리케니엔의 주민들이 베나즈 저택 가에 모여 박수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저택에 들어서자, 이제는 이곳이 내 집처럼 느껴져 금방 안도감에 젖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도감도 잠시, 두꺼운 갬비슨을 벗기 무섭게 바돈이 나를 찾아왔다.

“영주님, 포개어진 손 조합에서 나온 난쟁이들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일로 말입니까…?”

“이번 전투의 승전을 축하드리기 위해서랍니다.”

“그럼 얼른 그들의 축하부터 처리해야겠군요.”

“알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바돈이 떠난 직후,

정갈하게 개어져 있는 검은색 린넨 셔츠를 입고, 손가락에 인장을 끼운 나는 접견실로 향했다.

그곳엔 가죽 튜닉을 입은 세 난쟁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디안 베나즈님의 첫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이리 축하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난쟁이라 그런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음에도 티가 나질 않는 그들의 모습이 조금은 신기하다.

“조합의 대표인 스페라님도 영주님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계십니다.”

“소식이 벌써 그쪽까지 전해진 겁니까?”

내 말에 난쟁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아마 훨씬 전부터 승전을 확신하고 소식을 전한 것 같은데.

“어찌 되었든, 축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들을 대신해 얼버무리듯 대답해주자 난쟁이들의 표정이 화사하게 피었다.

“저희 포개어진 손에서 이번 승전을 축하할 선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베나즈 가문을 위한 선물이지요.”

“아주 흡족하실 겁니다.”

곧이어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던 그들이 품에서 줄자를 꺼내 내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잠시 영주님의 신체에 손을 대어도 괜찮겠습니까?”

“몸의 대략적인 수치가 필요합니다.”

“그럼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중얼중얼 말을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세 난쟁이에게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깐, 수치는 따로 세라를 통해 그쪽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중립지역에서 봤던 난쟁이와는 다른 느낌이야,

그들이 투박하고 단단했다면 지금 이곳에 온 난쟁이들은 굉장히 정신 사납고 어지럽다.

무엇보다 부담스러워.

“알겠습니다.”

“이런! 무례를 또! 용서해 주십시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내게 인사를 하고는 곧장 접견실 밖으로 아장아장 길을 나섰다.

그 와중에도 그들의 중얼거림은 끝나지 않았다.

* * *

복귀한 첫날은 바돈과 세라의 뜻을 따라 조용히 보내기로 했다.

베르융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조이 역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이 보였으니까.

나도 잠시 전투 직전에 느꼈던 긴장감과 그 긴장감을 무너트린 허무함을 정돈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이른 새벽,

별안간 밖에서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번쩍 눈이 떠져 얼른 복도로 나가니 마찬가지로 막 잠에서 깬 바돈과 마주쳤다.

“바돈, 이 종소리는 뭡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영주님.”

짧게 대화를 마치고 빠르게 저택 밖으로 나서자, 이미 주민 여럿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곧 등장한 나와 바돈을 보고 주민들은 서둘러 길을 터주었고, 이내 그 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붕에 작은 종이 매달린 거대한 짐 마차였다.

“영주님.”

잠시 후 바돈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마차를 끄는 말 목에 뭔가가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풀어 펼치자 나타난 건,

티히트라의 깃발과 그 위에 적힌 글귀였다.

[티히트라의 깃발을 넘기오, 우리의 패배를 인정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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