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29화 (129/365)

129화. 다음 계단을 위하여

새롭게 정돈된 1층 접견실,

책상을 끼고 앉은 내 왼편으론 회색 더블릿을 입은 조이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다.

그 앞, 기다란 두루마리를 펼치고 서 있는 바돈이 목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안에 적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우선 영토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티히트라의 영지 중 8할에 해당하는 300헥타르의 권리가 베나즈 가문에 이전되었습니다. 평수로 따지면 90만 평에 해당하지요.”

바돈의 보고에 조이가 물었다.

“그중 개간이 완료된 땅은 어느 정도 됩니까?”

“작은 분지가 여럿 껴있는 형태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그다지 실속이 있는 땅은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티히트라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 땅도 형식상 지도 위에 선 긋기로 가진 땅에 불과한 것일 겁니다.”

“동쪽 열강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무작정 두 팔로 끌어안은 꼴이로군. 하긴, 그들이 이끌고 온 병력의 양만 봐도 실질적으로 가용 가능한 땅이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나는 펜을 끄적거리며 내용을 정돈했다.

그리고 정돈된 내용을 머릿속으로 굴린 뒤 그들에게 내 입장을 전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이전한 땅 중 3할을 다시 반환시킵시다. 티히트라에 인접한 땅들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본인의 비용으로 개척 및 개간하도록 공문을 보내겠습니다.”

바돈과 조이는 내 말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동의했다.

“비록 곡식을 심기에 부적합한 땅일지라도 그 안에 어떤 자원이 숨어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티히트라에서 보내온 배상금이 총 얼마지요, 바돈?”

곧바로 이어진 내 질문에 바돈은 두루마리에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곧바로 답했다.

“이번 전투의 패전으로 티히트라에서 지급한 배상금이 금화 15만 개, 기사 몰룬의 생환으로 그의 가문 아모랑에서 지급한 배상금이 15만 개로 총 30만 개입니다.”

“겨울이 완전히 끝나고 봄볕에 씨앗을 심을 시기까지 리케니엔의 주 사업을 개척 및 개간으로 변경하겠습니다. 사업에 운용될 자금 계산은 조이에게 일임하죠. 가장 중요한 건 리케니엔 자체 내수의 활성화입니다.”

조이는 팔을 가슴에 대며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이제 바돈이 두루마리의 적힌 다음 내용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음은 세금입니다. 티히트라의 주 생산품인 ‘코스탠 석재’의 한 해 총생산량 중 2할이 리케니엔에 세금으로 들어올 겁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직접 적으로 관여해야 할 내용이 바돈의 입에 담겼다.

“다음은 이번 전투의 공로에 관한 건입니다, 영주님.”

“기사 조이, 베르융에게 토지 점유 우선권을 부여하겠습니다. 각 20헥타르의 땅을 그들의 가문 직영지로 봉함과 동시에 금화 1만 5천 개를 상금으로 지급할 것이며, 이하 내용은 바돈을 통해 공문 형식으로 전달하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하늘이 석양에 물들 때쯤,

길고 길었던 업무도 슬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끝에 바돈이 내 발언을 옮겨 담은 여러 장의 공문을 들고 오면, 내가 그 공문에 인장을 찍는 것으로 모든 일은 매듭지어졌다.

저녁.

세라가 접견실을 찾아왔다.

그녀의 손엔 고급스러운 외투가 들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포개어진 손 조합에서 구매한 것으로 보였다.

“세라, 어쩐 일이십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손에 든 재킷을 펼쳐 보이며 신이 난 듯 대답했다.

“이번에 영주님께서 저희 가문에 상여금으로 금화 2천 개를 내려주셔서 한 번 사치를 부려보았습니다.”

“굉장히 멋진 옷이로군요.”

남성용 옷인 걸 보니 바돈의 옷을 산 건 줄 알았는데.

“그렇지요? 맘에 드시지요? 영주님께 잘 어울리겠지요?”

세라는 싱긋 웃으며 옷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인다.

그런 그녀의 따듯한 모습에,

문득 안나 아주머니가 겹쳐 보이는 느낌이 드는구나.

하여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얼른 일어나서 입어보세요, 이제 공식적인 행사들이 만연해질 텐데 언제까지 검은 린넨 셔츠를…, 뭐 물론 영주님이라면 그만해도 충분하겠지만 형식이라는 게 중요하니까요!”

잔뜩 흥분한 세라의 등쌀에 쫓기듯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는 내게 정성껏 외투를 입혀주었다.

자락이 긴 재킷, 중립지역에서나 봤던 멋진 옷이다.

아이베리아에선 제법 딱딱하고 상투적인 복장만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조합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좋긴 좋네요.”

세라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세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내 감사에 감사로 대답한 세라는 그렇게 물러나는 와중에도 간식을 만들어주겠다며 채 못 가신 흥분을 휘발시키느라 분주해 보였다.

탁해진 정신을 환기할 겸, 복도로 나선 나는 마주친 어린 시종을 불렀다.

“영주님! 저는 베엔나의 막내아들인 빌루지라고 합니다!”

내 부름에 아이는 주눅 들기는커녕 씩씩한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접견실에 들어가 있다가 세라가 간식을 들고 오면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알겠지?”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 표정에 감화된 아이는 대번에 결사를 다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영주님.”

본의 아니게 내 명령을 받든 아이는 비장한 걸음을 옮기며 접견실로 향했다.

내가 원하던 반응은 아니었지만…, 뭐 어쨌든 잘 된 것이겠지.

저택 밖으로 나서자 이번에 베르긴이 차출한 경비병 둘이 내게 사열하려는 기세로 창대를 고쳐 잡았다.

비록 무장은 조악했지만, 그들이 존재함으로써 리케니엔의 많은 부분이 건실한 작용으로 세워져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늘 나와 함께 했던 어스름을 후드처럼 뒤집어쓴 채 리케니엔의 거리를 걸으니, 제법 잘 닦인 길 사이로 증축에 바쁜 리케니엔의 모습이 양옆으로 펼쳐졌다.

곳곳의 팻말엔 오르테 가문의 공문이 박혀 있었는데,

치안 유지를 위해 임시로 통금을 한다는 내용이 적힌 것으로 보아 베르긴도 참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네.

간간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곧 찾아올 통금에 쫓기듯 움직였다.

그렇게 광장을 지나쳐 조합이 들어선 거리로 향하자,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노숙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풀어야 할 다음 과제처럼 보였다.

더 앞으로 나아가자 펼친 매대 안에서 난쟁이들이 여러 색의 연기를 내뿜으며 연초를 피우고 있었고, 앞에는 대부분 나무를 매입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리케니엔에 이렇다 할 경쟁력 있는 생산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으니 거래할 것이 마땅치 않은 거겠지.

좀 더 깊숙한 곳으로 가니 이번엔 제법 넓은 공터가 나왔다.

포개어진 손 조합이 임시로 만든 장소 같은데, 그곳엔 제법 큰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작게 마련된 무대 근처에 모여 뭔가에 열중하듯 크게 떠들기 바빠 보였다.

그곳에 다가가 보니, 무대 위 남루한 복장의 남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한창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다.

그 모양새가 마치 중립지역에서 얼핏 보았던 발언가처럼 보였다.

“보시오, 이곳은 배반자의 땅이 아니오?! 그런데 어찌 아이베리아의 땅 위에 사는 그대들은 이런 곳에 터를 잡기로 한 거요?!”

비아냥거리는 듯한 그의 발언에 무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대번에 들고 일어서 반발했다.

그중 노인의 목소리가 대중의 소릴 꿰뚫고 나왔다.

“신체에 찍히는 낙인조차 사회의 용인으로 지워지는 세상인데 어찌 깃발에 명칭으로만 붙은 낙인을 잣대로 들이미는가!”

그러나 무대 위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노인을 향해 쏘아붙였다.

“그거야 다른 땅에서나 참작 가능한 이야기지, 이곳은 아이베리아 아니오? 명예 하나에 죽고 사는 갑옷쟁이들의 땅 말이오!”

“보시오! 그 배반자의 깃발이 세워지고 난 후의 변화를!”

“어허, 명분을 가지고 세워지려는 깃발들의 첫 모습은 다 똑같은 것이거늘!”

“틀리오!”

“이런 병신 같은 놈을 봤나!”

“발언가인 줄 알았는데 항문이 입 구멍에 달린 괴물새끼였구만!”

험악해지는 대중의 모습에도 무대 위 남자는 당당함을 잃지 않고 당당히 가슴을 폈다.

“그럼 말해 보시오, 그대들이 그렇게 핥고 빠는 영주나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예이 쓰레기 같은 놈!”

“입 다물어라!”

“놈을 무대에서 끌어내!”

“이곳의 깃발쟁이를 완성 시키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오! 그것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깃발을 바라보며 밥풀이 떨어지길 기다린다면 그건 두 발 걷는 자가 아닌 가축일 뿐이야!”

무대 위 남자의 말에,

일순간 좌중이 압도되어 침묵에 젖어 들었지만.

이내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 한층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깃발이 가축처럼 살고 있던 우리를 두 발 걷게 만들어 이곳에 모이도록 만들었소. 펄럭이는 자들의 명분이 말이오. 우리는 늘 가축처럼 살았지. 무너지고 일어서는 깃발의 소모품으로 살았지. 그럼에도 우리는 일어서려는 깃발로 향할 뿐이오. 그리고 그 깃발이 이전과는 다른 깃발이길 꿈꿀 뿐이오.”

“해서, 이번 깃발은 다른 것 같소?”

“믿어야지, 그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 이번엔 그 믿을만한 구석을 찾아보란 말이오!”

“배반자의 낙인이 찍힌 깃발을 일으켜 세우려는 그들의 그 원대함이라면 충분히 믿을만하지 않겠소? 오늘 그들이 이룩한 첫 승리에 이곳 모두가 기뻐 춤추며 노래 불렀지. 그리고 이러한 날이 나는 적어도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거요.”

“어허허, 이런 고집쟁이 노인네 같으니. 내가 졌소, 졌어! 아이베리아의 사람들은 죄다 이런 식이지! 떼이잉!”

“이제 그만 내려와 그지새끼야!”

“하하, 이놈 그래도 꼬리 내릴 땐 확실하구먼!”

무대 위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한껏 우스꽝스러운 시늉을 하다가 이내 절뚝거리며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품고서 발걸음을 돌렸다.

* * *

빌비온 동쪽,

남북으로 이분된 땅 가운데 북쪽의 깃발 ‘발기지르’

속칭 빌비온의 사자라 불리는 그곳을 향해 소식을 가득 품은 파발 하나가 쏜살처럼 달려가고 있다.

발기지르의 주성으로 향하는 다리.

그 위로 파발이 모습을 드러내자,

저 멀리 장엄한 성곽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상층 자유민의 거주지역을 둥글게 껴안은 형태로 세워진 외 성벽, 그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민 석탑과 성관 지붕.

곧이어 외 성벽을 통과한 파발이 굽이진 벽돌길을 따라 고삐를 요리조리 비틀었다.

곳곳에선 태양의 빛을 섬기는 종교, 빌렌의 찬송가가 은은하게 퍼졌지만.

거주지역 광장엔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꼬챙이형을 당한 세 사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제 성관에 진입한 파발은 중무장한 경비병이 열어준 문을 통해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 위를 거닐었다.

그러나 거침이 없었던 파발의 발걸음은 대회랑 끝에 있는 문 앞에서 처음으로 멈춰 서야만 했다.

펑퍼짐한 비단옷, 곧추세운 허리.

딱 보아도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듯한 시종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그를 제지한 것이다.

“기다리시오.”

시종이 곧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경직된 표정으로 불쑥 튀어나와 말했다.

“들어가도 좋소.”

그렇게 파발이 문 너머로 향하자,

알록달록한 차창으로 점철된 거대한 접견실이 드러났다.

그곳엔 발기지르의 영주와,

휘하 다섯 가문의 가주가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니, 등받이에 흐르는 꽃잎이 새겨진 의자는 공석이었다.

지금 자리엔 발기지르의 영주와 휘하 네 가문의 가주가 전부였다.

그러나 파발은 그 특이점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매 부대로군, 별다른 소식은 없나?”

발기지르의 영주는 파발이 건네는 두루마리를 받아들며 물었지만,

파발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는 터라 그의 얼굴을 감히 볼 수 없었다.

“서쪽 지역이 근래 들어 시끄럽습니다.”

“거기야 하루가 멀게 깃발이 지고 세워지는 무덤이잖나. 그보다 켄타나는? 그쪽의 동향은 이상이 없나?”

“그들의 움직임은 포착된 바가 없습니다.”

“좋다, 그럼 나가보아라.”

영주의 말에 파발은 이내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가 막 문을 나설 때,

어렴풋이 두 귀에 영주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슬슬 단단하게 고착된 경계선을 무르게 만들 때가 온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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