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다음 계단을 위하여 (2)
배상금의 분배가 시작된 지 7일이 지났다.
이렇다 할 행정체계가 없어 모든 일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내겐 의미 있는 일이었다.
배상금 중 일부는 베나즈 가문의 가풍을 되살리기 위해서도 쓰였는데,
세라가 말하기를 베나즈 가문의 가풍은 곧 메리안 베나즈님이 그 짧은 생전동안 쌓으셨던 버릇과도 같은 것이라 하여.
어쩌면 지금 내게 있어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해서 나는 7일간 모든 행정 처리 과정에 개입하면서도 베나즈 가문의 가풍을 익히기 위해 애썼다.
베나즈라는 이름은 내게 근본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세라가 일러준 것들을 익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모든 것을 익히는 데까지 불과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다섯째 날이 되었을 때.
베나즈 가문의 가언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 가언은,
‘휘몰아치리라.’
그것은 맥레인과 참으로 어울리는 말임과 동시에,
아직 대략적인 갈피도 잡지 못하고 방황하듯 나아가기만 하던 내게 한 줄기 길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배상금의 분배가 시작된 지 여덟째 날, 이른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곧바로 침대 왼편에 마련된 작은 종을 울리면,
미리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돈이 방안으로 들어온다.
그는 나로 인해 베나즈 가문의 가풍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면서 행정 일선에서 물러나 시종의 일에 집중했다.
이제 방으로 들어온 바돈이 물에 적신 부드러운 헝겊으로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정성껏 닦으면,
뒤따라 방으로 들어온 세라가 가지고 온 유리병 안에 담긴 바람을 방안에 가득 풀었다.
“오늘은 구월의 낙엽 묻은 바람입니다.”
세라의 말에 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바람이 쏟아낸 낙엽만큼 오늘도 문서가 쏟아져 내리겠지요.”
그러자 바돈이 실실 웃으며 말을 잇는다.
“오늘 일정을 잊으셨습니까? 베르긴 공과 조찬 후 영토 시찰을 떠나시는 날입니다.”
그랬던가.
사실 배상금 문제를 떠안은 지 이틀 정도 되던 때에 일정과 관련한 모든 것이 백지장이 되어버렸었는데.
바돈의 말을 들으니 정해 놓았던 일정들이 속속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이번 영토 순찰 및 정찰원의 인재로 사냥꾼 할리를 추천했었지.
“사냥꾼 할리에겐 통보했습니까?”
“예, 조찬을 마친 후에 그가 이곳에 올 겁니다.”
“그러지 말고 그도 합석할 수 있도록 합시다.”
“베르긴 공의 직무 보고가 포함된 자리라 그가 합석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직무 보고를 먼저 한 뒤에 조찬을 하면 될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세라?”
세라를 바라보며 재차 묻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지요, 영주님.”
바돈은 그런 세라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멋쩍게 웃는다.
“명 받들겠습니다, 영주님.”
잠시 후 세라가 자리에서 떠나고,
바돈과 단둘이 되자 그는 내게 잘 다려진 잿빛 더블릿을 건네며 투정을 부렸다.
“영주님, 벌써 타인의 약점을 그렇게 들쑤시다니요!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약점이라니요, 바돈에게 있어 세라는 약점이 아니라 강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바돈은 제법 유동적이지 못한 사람이지만, 세라를 통해서라면 한없이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잖아요.”
내 말에 바돈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아주 작게 중얼거린다.
“치사하십니다.”
“그나저나, 바돈.”
잠시 장난스러운 담화는 그쳐두고, 바돈에게 진지한 말투로 묻자.
그 역시 대번에 사무적인 표정으로 내게 답했다.
“예, 영주님.”
“이번 영토 순찰과 더불어 정찰원의 재목으로 할리를 추천하셨었지요.”
“그렇습니다.”
“테쉬킨의 처형 건을 통해 그의 승마 솜씨가 뛰어나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것 외에는 아직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할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 질문에 그는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할리는 멜르아 가문의 마지막 남은 핏줄입니다. 리케니엔의 마지막 사냥꾼이지요. 성격이 한없이 소심하지만 그건 두 발 걷는 자를 대할 때나 그렇지, 짐승이나 괴물 따위의 사냥감을 대할 때는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됩니다.”
* * *
리케니엔의 사냥꾼, 할리 멜르아.
그는 아껴두었던 튜닉을 걸치고 아침 일찍 집 밖을 나섰다.
몸에 배긴 가죽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조합에서 큰돈을 들여 산 사월의 푸름을 뿌리기까지 한 그의 손엔,
베나즈 가문의 봉인이 달린 편지가 들려있었다.
그런 그가 내는 부산스러운 인기척에, 좁은 집 안쪽에서 기어 나온 늙은 어머니가 부랴부랴 쫓아 나온다.
“할리, 벌써 가는 거니? 밥은? 거기서 준데? 혹시 모르니 간식이라도 챙겨줄까?”
“어머니, 더 주무시지 왜 나왔어요?”
“어제 나라님께서 온 편지를 받고 한숨을 못 잤잖니.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나서는 거야?”
“시간이 좀 앞당겨졌어요.”
“그랬구나, 혹시 모르니 간식이라도 챙겨줄까?”
“괜찮다니까요?!”
“신발은 그게 뭐니, 진흙이 잔뜩 묻었네.”
“아아 좀! 저 늦었어요!”
“우리 할리가 나라님께 눈도장을 톡톡히 찍히긴 했나보구나, 이렇게 재차 부르시고 말이야.”
늙은 어머니는 허리를 숙여 자신의 소매를 끌어다 할리의 신발에 묻은 진흙을 닦아냈다.
“비록 우리 집안이 보잘것없는 사냥꾼 가문이지만, 네 아버지는 늘 베나즈 가문을 위해 시위를 당기던 분이셨다.”
그런 어머니의 말에 할리는 방금 보인 자신의 행동에 부끄럼을 느꼈는지 두 귀를 붉히며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때 묻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며 말한다.
“다녀올게요, 어머니.”
“가서 시키는 일 똑바로 하고, 몸조심하고.”
할리는 꾸벅 인사를 올린 뒤 밖으로 바삐 나섰다.
이른 아침이었건만 리케니엔은 더없이 분주한 사람들로 득시글거렸다.
조합에서 나온 난쟁이들과 어울려 공사를 하는 사람, 조를 나누어 땅을 개간하려는 농부들.
그리고 저 멀리 오르테 가문 밑으로 들어간 병사들의 훈련 소리까지.
엊그제까지만 해도 할리에겐 저 모든 것들이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이젠 아니다.
그는 지금 영주의 부름을 받아 당당히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으니까.
한참을 가로질러 잘 닦인 길을 따라 걷길 몇 분.
베나즈의 저택에 도착하고 나니 할리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처음, 산적 테쉬킨의 처형을 주변 마을에 알리라는 임무를 수행하였을 때 느꼈던 그 성취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티히트라의 땅에 몰래 숨어들어 사슴을 사냥했을 때도 심장이 이렇게 뛰진 않았는데…,”
긴장 때문인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할리는 이제 저택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 문을 지키고 있는 건장한 사내 둘에게 편지에 찍힌 봉인을 보여주자 그들이 군말 없이 문을 열어준다.
“할리,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자 곧장 마중 나온 바돈이 할리에게 다가왔다.
“바… 바돈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 너무 늦었지요.”
“괜찮아, 아직 조찬이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바돈은 특유의 유순한 눈으로 할리를 살펴보다가, 이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들겨주었다.
“오늘 영주님을 모시고 종일 돌아다녀야 할 텐데 벌써 그렇게 긴장을 하면 어떻게 해?”
“에… 예에에?!”
할리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바돈은 그런 할리를 보며 장난스럽게 덧붙였지만,
“맹수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리케니엔 최고의 사냥꾼이 사람 앞에선 이렇게나 바들바들 떠는 모양새라니. 영주님께서 자넬 보고 실망하시겠어.”
바돈은 곧바로 그에게 장난친 것을 후회해야만 했다.
할리는 이제 얇은 가지 위에 위태롭게 쌓인 눈처럼, 약간의 자극에도 흩날릴 기세로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현재 오르테 가문이 훈련 시키고 있는 인원은 총 40명으로 이 중 전투에 바로 가용 될 수 있는 인원은 20명 정도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베르긴.”
“이 추린 인원들은 우선적으로 조이 공의 휘하로 재편할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조이 공이 갖고 계신 인챈트의 힘이 진형 전에 특화되어 있으니까요.”
“좋은 생각입니다만, 지금 당장 진형을 갖춘 훈련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군요. 아시다시피 리케니엔에는 전반적으로 행정력이 부족합니다.”
내 말에 베르긴이 우직한 표정으로 즉답했다.
“그렇다면 시기가 맞물릴 때까지 제가 그들의 훈련을 끝까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믿고 맡기겠습니다.”
오르테 가문은 내가 전적으로 믿고 기댈 수 있는 굳건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나.
진정으로 베나즈 가문에게 있어서 축복과도 같은 존재다.
반대로 말하면, 맥레인이 그만큼 그들의 기둥이 되어주었기 때문이겠지.
“보고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베르긴의 말에 나는 대기하고 있던 바돈을 불렀다.
“바돈, 조찬을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곧, 바돈이 사냥꾼 할리를 데리고 식탁 앞으로 다가왔다.
할리는 뻣뻣한 몸으로 간신히 내게 인사를 하고는,
“이… 이렇게 다시 찾아뵙게 되어 여… 영광입니다. 영주님.”
흠뻑 젖은 각목처럼 둔중하고 딱딱한 움직임으로 의자에 앉았다.
직후 식사는 참으로 단조로운 침묵 속에서 진행되었다.
베르긴은 애초에 공적인 자리에서 가벼운 사담을 입에 담을 사람이 아니었고,
할리는 바돈이 말한 대로 말 걸기가 무서울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으니까.
갑자기 조이가 너무나 그립다.
조이 어딨어요.
“오늘 조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베르긴은 마치 맞물린 태엽 장치처럼 딱딱한 자세로 일어나 내게 인사하고는 그대로 저택을 나섰다.
이제 거대한 식탁에는 발발 떠는 할리만이 남아있다.
“할리, 바돈이 미리 얘기했을지 모르겠지만…,”
“최… 에…! 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법 우렁찬 목소리로 첫 운을 뗐지만, 다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할리.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격려하듯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하겠습니다. 출발하죠.”
자리에서 일어서자 할리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돈의 안내를 받아 오랜만에 벤투스와 재회한 나는 녀석의 칭얼거림을 한참 동안 받아주고 나서야 그 안장 위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동안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구나, 벤투스.”
오늘 한 번 마음껏 달려보자.
고삐를 살짝 잡아당기니 기다렸다는 듯 벤투스의 코에서 한껏 달아오른 숨이 뿜어져 나왔다.
“갑시다, 할리.”
직후 고삐를 내리치기 무섭게 벤투스가 땅을 박차 마치 발사되듯 앞으로 튀어 나갔고,
그 뒤를 할리가 제법 빠른 속도로 따라붙었다.
벤투스의 질주는 그렇게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리케니엔의 서쪽 부지를 벗어나 숲 사이 난 길에 접어들고 나서야 멈췄다.
혹 할리가 나를 놓치진 않았을까 뒤돌아보면,
그는 방금 막 내 뒤에 따라붙고 있었다.
“세상에…, 혹시나 했는데, 그 유명한 명마 종 중 하나인 프레쳅스였군요!”
할리는 놀란 표정으로 벤투스를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물음에 똑같이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
“할리, 이제 제법 시원스럽게 말하는군요.”
그러자 그의 목덜미와 귀 끝이 벌게지기 시작한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뒤이어진 내 질문에 할리는 능숙한 솜씨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저 언덕길 너머부터가 티히트라의 땅… 아니 새로운 리케니엔의 땅입니다.”
“저쪽 지리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할리는,
고개를 돌려 이제는 슬쩍 웃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전부… 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