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31화 (131/365)

131화. 다음 계단을 위하여 (3)

“서쪽 숲은 위험해서 쉬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갈리키 무리의 흔적을 발견한 적도 있고 반드라를 직접 두 눈으로 본 적도 있었으니까요.”

깊은 숲에 들어서기 무섭게 할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는 나무들 사이에서 가장 당당했고, 짐승들 사이에선 최상위 포식자 그 자체였다.

“갈리키는 뭡니까?”

“죽은 짐승입니다, 실상은 사체에 기생하는 균류에 의해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이지요.”

“균류? 버섯 같은 걸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베빌리를 통해 숲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파면 팔수록 미궁에 빠져버리는 것 같다.

“이런 갈리키 무리도 무리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서쪽 숲 일대를 장악한 반드라입니다.”

숲 사이 강줄기를 따라 능숙하게 말을 몰며 앞으로 나아가던 할리가 슬쩍 고삐를 당겨 멈춰 섰다.

그가 하는 말만 들어보면,

짐승이 아니라 괴물에 해당하는 존재인 것 같은데.

“녀석은 맹수이면서 괴물에 버금가는 무지막지한 놈이죠.”

할리는 그런 내 예상을 철저하게 깨트렸다.

“맹수? 짐승이란 말입니까?”

“네, 사냥을 업으로 삼는 자들에겐 신처럼 여겨지는 영물이기도 합니다.”

할리는 진심이 담긴 경외의 눈빛으로 숲 일대를 둘러 보며 말했다.

“그렇기에 서쪽 숲을 통과하긴 매우 힘들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할리는 서쪽 숲에 대한 내 질문의 답을 끝마쳤다.

“잘 알았습니다, 할리.”

서쪽 숲 너머, 작은 왕관을 쓴 귀 큰 자를 만나기 위해선 적어도 풀어야 할 숙제가 두 개 정돈된다 이건가.

“그나저나 할리, 당신은 참으로 대범하군요. 티히트라의 땅이었던 이곳을 드나들며 사냥을 하고 다니다니.”

내 말에 할리는 귓불을 긁적이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들의 땅이라고 해도 영주님처럼 신경 쓰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그럼 이제 동쪽 일대로 가봅시다, 할리.”

“네, 알겠습니다!”

이제는 자신감이 붙었는지 할리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힘차게 말을 몰아 강 하류 쪽으로 달려나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었기에.

이번엔 숲에 대한 질문이 아닌 할리에 관한 것을 물었다.

“할리,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셨습니까?”

그러자 할리는 찬 공기에 상기된 두 광대를 번쩍 올리며 신이 난 아이처럼 대답했다.

“멜르아 가문 역대 최고의 사냥꾼이었지요. 맥레인님이 원정길에 오르실 때마다 저희 아버지도 꼭 동행하셨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셨답니다!”

그의 말속에서 느껴지는 자부심은 듣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맥레인의 과거를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 머금은 미소를 차마 끝까지 유지할 순 없었다.

그러나 할리는 달랐다.

“맥레인님의 실종 때도 저희 아버지는 베나즈의 깃발이 꼭 다시 세워질 것이라 믿으셨습니다. 남들이 멸시하며 리케니엔을 버릴 때도 바돈님과 함께 쭉 그곳을 지키셨어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그는 흘러내린 금발 앞머리를 고갯짓으로 넘긴 뒤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말씀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영주님이 그것을 증명해주셨으니까요. 영주님은 멜르아 가문의 고집에 이유를 만들어주신 겁니다.”

나는,

그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할리 멜르아, 당신도 가족의 이름으로 이어가려는 자로구나.

이제 우리는 강줄기를 벗어나 마주친 넓은 평야를 거쳐 동쪽 숲길로 접어들었다.

서쪽 숲과는 달리 동쪽 숲은 그리 깊지 않아 땅에 비수처럼 꽂힌 햇살 줄기가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방향으로 쭉 가게 되면 발기지르와 켄타나가 나오겠지요.”

숲 근처에 멈춰 선 채 나지막이 내뱉은 내 물음에,

“네, 맞습니다. 이 숲을 넘어서면 그때부턴 저들의 파수꾼을 마주치게 되겠죠.”

할리는 긴장한 표정으로 숲이 그리는 울퉁불퉁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말에서 내려,

할리 앞에 섰다.

그러자 깜짝 놀란 할리는 부랴부랴 안장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내 앞에 고개 숙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할리, 내가 당신과 이 일대를 시찰하고자 한 목적은 비단 새로 얻은 영토의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내 진지하고 낮은 목소리에 할리는 굳은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럼 또 무엇을 위해…?”

“나는 베나즈의 깃발에 드리운 동쪽 그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내 은유적인 표현에 할리는 제법 번뜩이는 눈빛으로 즉답했다.

“발기지르와 켄타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맞습니다.”

그 말을 하며 나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서쪽이 베나즈의 깃발에 주어진 숙제라면,

동쪽은 베나즈가 나아가야 하는 숙명.

“나는 그 그늘의 크기를 가늠하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나즈의 깃발은 힘을 키울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주어진 0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뿐더러, 베나즈의 이름으로 휘하에 집결시킬 깃발도 많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동쪽 열강들이 만든 그늘을 적절히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 모르지, 그들이 이미 그늘을 들춰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설령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크다.

“그렇기에 난 지금 할리 당신에게 베나즈의 이름을 걸고 선언을 하려 합니다.”

나는 낡은 검집에 물린 아밍소드를 뽑아 들었다.

이에 맞춰 할리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할리 멜르아, 당신을 베나즈 가문의 정찰대 제1기수 장으로 임명합니다.”

* * *

늦은 아침.

길바닥에서 노숙하던 사내가 엉금엉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어제 꿈을 꿨다.

꿈이라고 해봤자 본인이 본인에게 ‘지금이다!’라고 소리치는 별 볼 일 없는 꿈이었지만.

그렇게 절뚝절뚝 걸어가 한창 공사에 여념이 없는 난쟁이와 사람들을 구경하던 그는.

슬쩍, 난쟁이가 벗어든 외투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유리병 안에는 작게 휘몰아치고 있는 쨍한 바람 조각이 들어 있다.

“칠월의 미지근한 바람이라.”

남자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유리병 뚜껑을 열어 그 안에 있는 바람을 자신의 몸 곳곳에 흘렸다.

아직 덜 가신 추위에 뻣뻣했던 몸이 순식간에 누그러들고, 쨍한 기운이 눅눅한 옷자락에 스며들기 시작하자.

“으으으….”

남자는 달아오르는 기운에 저도 모르게 한껏 개운한 기지개를 켰다.

한껏 뿌리고 나니 유리병 안에 담긴 바람은 전과는 달리 얇고 형편없는 모습이 되어버렸으나,

남자는 태연하게 유리병 뚜껑을 닫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고는 휘파람을 불며 거리를 거닐었다.

절름발이에 볼품없는 옷,

덥수룩한 수염과 산발이 된 주황 머리.

‘기지어 도’는 그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리케니엔의 가장 거대한 저택으로 향했다.

그렇게 저택 인근에 멈춰 선 기지어는 대번에 울상인 표정을 짓고는 절뚝절뚝 입구 쪽으로 뛰어가며 소리친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지금 공사장에서 난리가 났소! 누군가 난쟁이 물건에 손을 댄 것 같은데, 글쎄 그 사실을 안 난쟁이 놈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 아니겠소?!”

별안간 절정에 달한 그의 연기에 당황한 경비병들은 서둘러 기지어가 가리킨 쪽으로 달려나갔다.

이후 태연한 모습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선 기지어는 흥얼거리며 거대한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막 태동하는 것들의 허술함만큼 사랑스러운 것도 없지.”

곧 그런 그의 작태를 발견한 누군가가 다가와 따져 물었다.

“당신, 누군데 이곳에 있는 거요?!”

그런 그를 빠르게 훑은 기지어는 이 저택에 고용된 관리인이라는 걸 눈치채곤 더욱 당당히 대답했다.

“경비가 나를 통과시킨 데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영주님의 귀한 손님이라네.”

이에 관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에게 고개를 넙죽 숙였다.

“이런,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괜찮네, 괜찮네. 내 오랜 여정을 거친 터라 이리 남루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의심을 살만했네.”

넉살을 부리며 대답하던 기지어는 이어 그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런데, 내 이런 행색으로 영주님을 마주칠 순 없으니 몸을 좀 씻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따라오시지요.”

그의 안내에 기지어는 태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직후 훌러덩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이 담긴 탕에 몸을 맡긴 그는 머리맡에 놓인 물건을 보곤 쾌재를 불렀다.

“키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조합의 물건인가!?”

그 물건은 다육식물의 점액에 꽃씨를 넣어 굳힌 비누였다.

심지어 비누에 한줄기 파도의 거품까지 첨가되어 있어,

탕 속은 순식간에 풍성한 거품으로 차올라 기지어를 파묻어버렸다.

열심히 때를 벗기고, 면도날로 조심스레 수염을 다듬고.

물을 먹고 윤기를 되찾은 머리를 뒤로 질끈 묶자,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얼굴이 드러난다.

굵직한 눈썹, 굵직한 코, 굵직한 입술.

면면이 드러난 그의 용모는 아이베리아 대륙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이제 기지어는 또다시 기민한 움직임으로 탕에서 나와 알몸으로 살금살금 복도를 통과했다.

그리곤 근처에 널려 있던 하얀 리넨 셔츠와 검은 통바지를 빼입고는 2층으로 향했다.

“이렇듯 저택 내 기본적인 체계도 아직 채 확립되지 못한 것을 보면, 눈앞에 닥친 큰일에 얼마 없는 행정력을 쏟아붓고 있는 거겠지.”

중얼중얼,

느낀 감상을 늘어놓던 기지어는 대범하게도 영주의 방으로 불쑥 들어갔다.

역시나, 기지어는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문서 더미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럼 어디, 대면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보여야겠지.”

* * *

하늘에 태양이 반쯤 걸쳐 샛노랗게 질렸을 때쯤.

우리는 리케니엔으로 복귀했다.

할리는 돌아오기 무섭게 다시 특유의 소심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지만, 이제 그는 적어도 내 앞에선 말을 더듬진 않았다.

“할리, 자세한 내용은 추후 바돈을 통해 전하겠습니다.”

“네, 영주님.”

조이와 베르융이 그러했듯, 이젠 할리도 내 말에 가슴에 손을 얹어 보인다.

그렇게 그와 헤어진 뒤 저택으로 복귀하자 늘 그랬듯 바돈이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다.

마치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영주님…! 오셨습니까!”

“바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제가 잠시 조합에 가 있는 동안 약간의 소란이 생긴 것 같습니다.”

말에서 내려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바돈에게 그 소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의문의 남자 하나가 경비병과 관리인을 속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세라 역시 내가 돌아온 걸 보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영주님.”

그런 그녀 옆에 바돈도 나란히 서서 내게 고개 숙인다.

“모든 것이 제 불찰로 빚어진 일입니다.”

“그가 이곳에서 뭔가를 얻어갔다면 그 얻어간 것들에서 나타날 약점을 보완하면 될 일입니다. 그보다 두 분이 무사하셔서 다행이군요. 내일 베르긴을 불러 리케니엔의 전체적인 치안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바돈과 세라는 내 말에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럼, 일단은 일이 벌어졌으니 저택 내에 뭐가 사라졌는지 확인해 봅시다.”

“지금 막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저택 곳곳을 살피던 중이었습니다.”

“그럼 저도 돕겠습니다.”

설령,

이곳에 침입했다는 남자가 동쪽 열강들이 보낸 첩자라 해도 꿀릴 것은 없다.

그저 리케니엔의 행정력이 형편없다는 정보만 가지고 갔을 테니까.

현시점에선 리케니엔의 구심점인 베나즈,

그러니까 내 존재가 그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중요해.

곧장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방금까지 했던 모든 생각을 날려버려야만 했다.

책상에,

낯선 한 남자가 코를 박고 잠을 자고 있다.

어질러져 있던 문서는 칼로 자른 듯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런 그의 머리맡엔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이윽고 내가 낸 인기척에 한 박자 늦게 움찔거리며 일어난 남자는,

콧물을 늘어트린 얼굴로 당당히 외쳤다.

“반갑소, 나 기지어 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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