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다음 계단을 위하여 (4)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데?
그러니까, 그는 아직 청년이잖아?
더군다나 생긴 것만 보면 이성이고 동성이고 다 후리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방탕한 공자처럼 생겼어!
“당신, 정체가 뭐야?”
난 적어도 창녀 두 명 정도 끼고 다니면서 동쪽의 지독한 술배를 가진 우람한 사내일 줄 알았단 말이야.
반대로 여성이라면 서쪽의 여제처럼 까다롭고 까탈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했다고.
“이곳이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땅이라고 해도 지금 당신이 벌인 행위에 대한 책임 정도는 물을 수 있어.”
베나즈의 이름을 일으켜 세우려는 자라면 최소한 앞서 설명했던 인상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말하는 법을 잊었나?”
사내의 쏘아붙임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일단 고개부터 숙여 보였다.
상대의 감정을 일시적으로 누그러트리는 데엔 이보다 더 효과적인 행동은 없으니 말이다.
이윽고 그를 단번에 이해시킬 수 있도록 심중에 정돈한 말을 담담히 꺼냈다.
“두서없이 들이받아 미안하오, 나 토르킨님의 제자인 기지어라고 하오.”
내 말을 들은 잘생긴 사내는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침착함을 유지한 채 날 바라볼 뿐이다.
순간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로 깊고 완숙한 성정이로군.
베나즈의 이름을 담기엔 제법 적절한 그릇처럼 보인다.
“스승님의 편지를 받은 이가 하나가 아니었나 보군요.”
“혹, 나 말고 선생님의 또 다른 제자를 만나셨소?”
“스페라, 조합의 대표로 있는 여인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딱 보아도 나와 같은 목적으로 달라붙은 건 아니겠군.
장사치라는 건 결국엔 이윤을 남기기 위해 목숨을 거는 부류니까.
상인의 자금으로 기반을 다지는 것만큼 부담이 큰일도 없지만…, 이곳은 리케니엔이다.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야기가 더욱 수월하게 진행되겠구려.”
조용히 책상 위에 작성해놓은 종이를 들어 그에게 보였다.
“그게 뭡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리케니엔에 산재 된 문제들을 몇 가지 표로 요약해놓은 것이오. 보아하니 사업을 고안해낸 머리는 비상했지만, 처리는 한없이 어설프더군.”
이어서 나는 그 종이를 구겨 입에 욱여넣었다.
이런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내의 짙고 검은 눈썹이 일순간 움찔거렸다.
“이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능력 중 극히 단편에 속한 것이오, 동시에 이번 협상에 제시할 패이기도 하지.”
“협상?”
“그렇소. 베나즈의 깃발은 지금 인재가 필요하고, 나는 그러한 인재상에 부합한 인물이니까.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내가 삼킨 표를 다시 작성해 넘겨주는 것은 물론 배우고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당신의 대업에 보탬이 되어줄 것이오.”
오만하고 불손하기 짝이 없는 이 제의엔,
두 가지의 의도가 있다.
첫째는 저자가 가진 야망의 크기를 가늠해보는 것이고.
둘째는 그 야망의 크기를 감당할 수 있는 자인지 떠보는 것.
고결과 야망을 사이에 두고 그 무게를 저울질하는 것보다 괴롭고 힘든 일은 없지만,
산꼭대기에 서 있는 자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
그러니 말해 보시오, 베나즈의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돌아온 자여.
“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남자는 내게 말했다.
“스페라의 조합으로부터 나오는 돈은 리케니엔을 배 불렸지만, 동시에 리케니엔의 정신을 굶주리게 만들겠지요.”
그래서?
“때문에 스페라는 무슨 수를 써도 제가 정해 놓은 선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선의 이름은 동업자겠군요.”
그는 찬찬히 걸음을 옮겨 걸치고 있던 어두운 후드와 허리춤에 매단 낡은 검집을 벗어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지금 당신이 넘으려는 선은 그 동업자라는 선보다 훨씬 안쪽에 있는 것입니다. 하여 선배니 뭐니 하는 별 시답지 않은 호칭은 쓰지 않겠습니다.”
뭐야.
갑자기 그의 눈동자가 깊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저 하늘에 뜬 별 하나에 집중하면 될 줄 알았는데, 저자는 무수한 별을 품은 하늘과 같구나.
“기지어, 내 땅에서 그런 건방진 협상은 통하지 않습니다.”
고결 쪽으로 무게를 두는 건가.
야망보다는 베나즈라는 이름에 더 집착하는 거로군.
아아, 그릇이 좁다.
“없습니까?”
아니,
그는 두 눈에 번뜩이는 빛을 머금고 내게 물었다.
“더 보여줄 게 없냐는 겁니다. 나는 당신이 가진 능력을 더 많이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용의 가치를 늘리고 싶습니다.”
허나, 이야기의 흐름은 아직 내 것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패를 드러내는 법도는 그 어디에도 없소, 더군다나 기사의 땅인 아이베리아에서는 말이오.”
“그렇다고 그런 꽝에 가까운 패에 내가 가진 패를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내가 보여준 것이 꽝에 가까운 패다?”
“그렇지 않고서야 판돈이 없을 리가 없잖습니까?”
허, 이것 봐라.
“판돈도 없이 제시한 패가 꽝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하물며 그런 패를 가지고도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 판에 어울릴 이유가 없습니다.”
교묘하게 파고드는 것이,
스승님의 계산법으로 따져도 고점의 통찰을 가진 것 같군.
괜히 떠보려다,
그에게 내가 가진 것 하나를 더 드러내게 생겼다.
하지만 꿀릴 것은 없다.
애초에 감출 생각은 없었으니까.
“나는 내가 펼쳐지길 바라오.”
“펼쳐지기를 바란다?”
“그래, 이 아이베리아에!”
절뚝절뚝, 발을 절며 당당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얼굴이 작은 탓이었을까, 멀리서 봤을 땐 몰랐었는데.
다가가니 그의 키가 내 머리 하나만큼 더 커서 눈을 마주치기 위해선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토르킨 선생께서 내게 주신 철학이 바로 그것이지! 인생사 태어났으면 어디서든 가진 모든 것을 펼쳐봐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단지 그것 때문에?”
“단지 그것이 내 전부이기 때문에!”
사내는 일말의 물러섬 없는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베나즈의 가주여! 당신은 나를 이 땅 위에 펼칠 수 있는가!”
“펼쳐지다 못해 찢어질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차갑게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실린다.
자 이제,
나는 당신의 패를 봐야겠어.
그리고 스승이 왜 당신을 돌아온 태풍이라 표현했는지 알아야겠어.
아직은,
당신에게 태풍이란 명칭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증명해보시오, 베나즈의 깃발을 일으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사내는 낡은 검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 안에서 볼품없는 아밍소드를 뽑아,
자신의 몸 앞에 정렬시키듯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세워 보였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내가 근원적으로 바라고 있는 목표를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것을 내비치지 않고 달려왔다는 건가?”
사내는 은은한 미소와 함께 세워 든 아밍소드를 거두며 말을 이었다.
“소박하기에 대의까지 번지게 되는 것이다.”
“…,좋은 말이오.”
“이 땅이 내게 처음으로 알려준 말입니다.”
사내는 내 얼굴을 흘깃 보더니, 마치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보라는 듯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그의 시선을 따라 재차 눈길을 돌린 나는,
볼품없는 그 검을 영문도 모른 채 멀뚱멀뚱 바라봐야만 했다.
결국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검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러자 그는 내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대의’입니다.”
“고작 이 검…,”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릿한 심장으로부터 전신이 딱딱히 굳어가는 감각만을 느낄 뿐이다.
그저 베나즈라는 이름을 일으켜 세우려는 목적이 아니었어.
베나즈라는 이름이 남긴 의지를 이어가려는 것이었던 거야.
말 그대로,
실종의 원인인 줄 알았던 베나즈의 의지로 0이 이 땅에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니…!
“나는 이 대의를 가지고 모든 걸 되돌릴 것입니다.”
어느새 나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힘겹게 접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로 인해 번지고 싶은 욕망이 일었기 때문에.
보아라,
뜻 가진 이들아.
태풍이 돌아왔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나는 디안 베나즈입니다.”
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본인의 이름을 말하며 내게 손 내밀었다.
그렇게 그의 손을 잡으니,
참으로 뒤늦게 깨달았다.
한참 전부터 그의 그릇 안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 * *
나흘이 지났다.
할리는 동쪽 일대 동향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왔으며,
베르융은 시범적으로 자유민 20명을 궁병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기지어는 여러 갈래로 어지럽혀진 행정 분야를 다섯 개로 함축시켰고, 모든 업무를 태엽 장치인 마냥 홀로 처리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면서 티히트라에서 인재를 차출해야 한다는 의견을 건의하여서,
조이가 티히트라를 직접 방문해 그 안의 세력을 가늠하고 적절한 인재를 뽑아 리케니엔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새롭게 합류한 행정 부관의 이름은 폴란 지빈.
20대 중반의 청년에다가 쌓은 지식의 양도 출중하여 기지어는 조이의 선택에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폴란은 기지어의 지혜에 순식간에 감화되어 리케니엔에 어렵지 않게 섞여들었다.
하루가 더 지나 다섯째 날.
따듯한 봄볕이 내리쬐기 시작한 정오를 조금 지나고 시작된 오찬 자리.
나와 합석한 기지어는 대뜸,
시조를 읊듯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시간이 지나게 되면 아마도 저와 영주님은 서로 적이 될 겁니다.”
“어째서죠?”
“각자가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영주님을 견제해야 하고, 그런 내 견제를 영주님은 억눌러야 할 것이니까요.”
“절충할 순 없는 겁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역사가 벌어진 적은 없습니다, 심지어 철인 통치 체제에서도 그런 철인을 견제하던 신하들이 존재했음을 생각하면 말이지요.”
기지어는 메추라기의 다리를 우악스럽게 뜯으며 말을 이었다.
“본래 봉오리에서 꽃잎 색이 슬슬 드러날 때가 가장 어여쁘고 평화로운 법입니다.”
“씁쓸하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싶습니다, 그 꽃이 만개한 모습을.”
불과 서로 통성명을 한 지 닷새밖에 되진 않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기지어는 정말 괴짜 같은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싫지만은 않은 괴짜라는 것.
“참, 영주님. 오늘 주재 회의가 있는 날입니다.”
“주재 회의? 듣지 못한 일정인데요.”
“방금 제가 세운 일정입니다. 기사를 비롯한 모두를 이곳에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 * *
“영주님, 주재 회의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문 너머,
조용하고 은근하게 들려오는 바돈의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1층 홀로 내려가자.
탁상에 둘러앉아 있던 장정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예를 갖췄다.
그 광경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조이 크레비디.
베르융 오르테.
폴란 지빈.
할리 멜르아.
이 넷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내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따라 착석했다.
이제 기지어 도가 우리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채 말을 잇는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주재 회의를 마련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갑작스러운 회의에 흔쾌히 승낙해주신 영주님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경쾌한 목소리로 절뚝절뚝 걸음을 옮겨 다니던 그는,
이제 대번에 진지하게 변모한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했다.
“시기가 참으로 적절합니다.”
기지어는 할리가 전해준 정보만으로 작성한, 실사에 가깝게 그려낸 지도를 펼쳐놓고는 동쪽을 가리켰다.
“발기지르와 켄타나는 지금 서쪽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조차 없는 형국이고, 이런 그들의 동향 때문에 더 나아가 동쪽에 있는 여러 제국의 이목도 이곳에 쏠린 상태입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등잔 밑에 있는 형국이군.”
조이가 절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융은 고개를 들어 기지어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티히트라에서 병사들을 끌어와 합동 훈련을 해도 되겠군. 일단은 조이가 가진 인챈트를 진형으로 소화 시킬 만큼 숙련된 병사가 가장 시급하니까.”
기지어는 바로 수긍했다.
“좋습니다, 인챈트로 구축된 진형은 단기로도 일반적인 수십 진형을 어지럽힐 만큼 위력적이니까요. 다만 티히트라의 블로사 가문은 훈련에서 배제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아직 우리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어서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 흐르듯 좀 더 근원적인 주제로 다가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선택한 것은 바로 서쪽이지요. 저들의 시선이 옮겨지기 전까지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직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목표를 설정하고 나서야 회의는 끝이 났다.
아니,
기지어는 나와 단둘이 남았을 때를 기다렸다는 듯.
진정한 회의를 시작했다.
“영주님.”
그는 야수의 것과 같은 대범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가진 0의 힘을 키우실 때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로 서쪽 일을 해결하시옵소서.”
그래,
슬슬 기지개를 켤 때도 됐지.
아주,
아주 오랜만에.
서쪽 숲의 여정을 함께해줄.
오랜 친구를 찾을 때가 온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