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그물과 작살
“굳이 배웅해주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도리를 다하려는 것뿐입니다.”
이른 새벽,
기지어는 떠날 준비를 마친 나를 찾아왔다.
“제가 아니면 또 누가 영주님께 신경을 쓰겠습니까?”
이어지는 그의 능글맞음에, 뒤늦게 따라 나오던 바돈이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영주님께 예의를 갖추시오, 그리고 영주님은 제가 끝까지 책임질 것이니 본인 일이나 똑바로 하시지요.”
그러자 기지어가 껄껄 웃는다.
“내 시종장을 깜빡 잊고 주제를 넘었구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바돈은 시종장이란 칭호가 좋았는지 순간 입술을 꿈틀거렸다.
뒤이어 바돈은 품에서 끈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영주님, 이건 각인 줄이라는 겁니다. 여정 내내 꼭 이것을 왼 팔뚝에 묶고 다니십시오. 그래야만 리케니엔과 연락을 주고받으실 수 있습니다.”
“새가 이것을 보고 찾아온단 말입니까?”
“영주님을 위해 안사람이 틈틈이 새를 조련시켜왔거든요.”
바돈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콧김을 내뿜으며 기지어를 흘겨보았다.
마치 과시하듯이.
“고맙습니다, 바돈. 참으로 든든하군요.”
그런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자,
바돈은 두 눈을 반짝이며 벤투스의 안장 가방을 꼼꼼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래. 방금 내 말 덕에 그의 위신이 치켜세워졌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겠지.
이러한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기지어는 은은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은밀히 다가와 속삭이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목적지는 정하신 겁니까.”
“제가 머물렀던 자리가 남아있다면요.”
“베르융 공이 제게 이야기해주더군요, 영주님이 어디서 날붙이 따위에 질 사람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베르긴이 나와의 대련을 통해 느낀 감상을 가족에게 전했나 보군.
“하지만 중립지역은 아직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심지어 영주님은 날붙이 외의 것을 막아줄 갑주도 없지요, 또 가진 깃발도 감춰야만 하는 신세입니다.”
“기지어, 격려하는 것 맞지요?”
살짝 그를 떠보듯 말하자,
기지어는 어깨를 털며 호탕하게 웃는다.
“다녀오십시오, 나의 젊은 군주시여. 이 절름발이가 봉오리를 거뜬히 받칠 줄기를 마련하고 있을 테니.”
꼭 거창해야만 충성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충성이라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기지어라는 괴짜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저 자신의 가치관을 믿고 따르는, 다가오는 모든 시련을 깨부수려 하는 사납고 열정적인 성정만으로 이뤄진 충의.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를 모시는 두 신하에게 살짝 인사하며 안장 위에 올라타, 부드럽게 박차를 가하자 벤투스가 야수처럼 달려나간다.
마치 발굽에 바람 기름을 바른 것처럼.
* * *
해가 임박했는데,
아직도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별들이 하나둘…,
셀 수가 없다.
그 가운데 열렬히 불타는 듯 번쩍이는 별이 있다.
아마도 이 순간 어디선가 난쟁이들이 저 별빛을 빌려 쇠를 녹이고 있는 거겠지.
그러한 생각을 하니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선명한 추억이 나를 스쳤다.
그 추억은 무르익은 곡식 냄새가 났다.
그래, 저 별은 맥레인과 함께 하늘을 보며 서로 알고 있는 것들을 교류했을 때 알게 되었지.
그러한 순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내 마음은 벌써 찾아온 봄으로 만연해있네.
아침이 밝았다.
일어난 새들의 지저귐이 나부끼는 바람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귀를 간질였다.
그러면서,
밝혀진 주위의 풍경이 속속들이 내 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멀리 절벽 하나를 통째로 깎아 세운 동상이 보이고,
어떤 산 중턱엔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거대한 기둥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인다.
모두 다 이 땅이 가진 과거의 흔적이겠지.
혹시 모르겠다, 저런 흔적들을 찾아보다 보면 맥레인과 관련된 것들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기사왕이라 불렸다던 에르엥의 흔적을 쫓다 보면, 필연적으로 맥레인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처음 아이베리아에 발을 디뎠을 땐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있어 몰랐는데,
이렇게 생겼었구나.
아이베리아의 단편은.
그렇게 길을 따라 달리기를 몇 시간.
새삼 벤투스의 체력에 경이로움을 느낄 때쯤.
드디어 우리 앞에 강줄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녹으면서 불어난 강줄기는 꽤 물살이 거칠어 보였지만, 벤투스가 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벤투스,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
중립지역은 말이야.
녀석의 잿빛 갈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듯 내뱉은 내 말에, 벤투스는 앞발을 치대며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기세로 숨을 내뿜었다.
“베빌리, 무사하겠지. 당신은 영리한 자였으니까.”
이내 고삐를 치대자 벤투스가 강줄기를 향해 단번에 달려들었다.
첨벙첨벙.
출렁이는 물살을 가르며 내딛는 벤투스의 발길질에,
허리에 매고 있던 워 해머, 유스티아와 낡은 아밍소드도 같이 출렁인다.
순식간에 중립지역 땅으로 넘어간 벤투스는 그렇게 내 구호에 맞춰 다시 한번 바람을 기만하는 발길질로 땅을 두들겼다.
* * *
매캐한 재 섞인 바람 속에 진동하는 쇠와 피비린내.
언덕 너머로 간간이 들려오는, 포식에 겨워 울부짖는 까마귀 떼들의 울음소리.
목 잘린 이름 모를 병사의 시체와,
반쯤 박살이 나버린 채 바닥에 나뒹구는 카이트 실드 하나.
처참하게 무너진 방책 틈새로 보이는 유린당한 남녀노소.
한데 모여 불에 타다 만 신체 덩어리들.
꺾인 깃발과,
진흙에 반쯤 묻혀 더럽혀진 깃발.
이 모든 것들이,
불과 한 시간 동안 중립지역을 통과하며 목격한 것들이다.
그렇게 길에서 약간 벗어나 이동하던 나는,
길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에 홀로 기댄 채 죽어있는 시체를 발견하곤 그곳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그 시체는 사후 살아있는 자들에게 강탈당한 듯 발가벗겨진 모습이었지만,
차마 벗길 여유가 더 없었는지 한쪽 손엔 건틀릿이 씌워진 채였다.
건틀릿의 외형이 제법 화려한 것을 보니, 틀림없이…,
기사였겠구나.
비로소 내가 알던 중립지역은 이제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해서 슬슬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벤투스.”
녀석의 목을 쓰다듬으며 부르자 그 뾰족한 귀가 쫑긋거린다.
그런 귀에 대고 나지막이 호소하듯 말하자.
“서둘러 내 친구가 있었던 곳으로 달려줘.”
오롯이 나를 위한 나침반은 자석에 이끌리듯, 어느 한 방향으로 머리를 고정한 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 땅에서 기꺼이 내 가족이 되어주었던,
그 사람들은 모두 무사할까.
무사하겠지.
언제가 되었든 좋으니, 서로가 인지하지 못해도 좋으니.
같은 공간에서 스치듯 지나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주위 풍경을 뭉개며 달리다 보면, 어느샌가 내 뒤로 추격자들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벤투스의 가공할 속력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어느 길로 가든 매 순간 새로운 추격자들이 따라붙어 왔기에,
결국엔 벤투스가 숨을 고르는 그 순간에 한 번은 저들과 충돌할 것임을 직감해야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벅찬 숨을 몰아쉬며 속도를 줄이는 벤투스의 뒤로, 기다렸다는 듯 거친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랴!”
“멈춰라!”
녹색에 백마가 그려진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오던 그들의 수는 총 세 명.
곧 이들 중 하나가 나를 지나쳐 앞을 가로막고, 뒤로는 두 명이 꺼내든 사냥추를 흔들며 포위했다.
“깃발을 보여라.”
“그런 건 가지고 있지 않다.”
“깃발도 없이 이곳을 지나가는 이유는?”
“만나야 할 자가 있다.”
내 말에 뒤에 있던 두 사내가 피식거렸다.
“그래봤자 마주하는 건 시체겠지.”
“놈은 티바르에서 보낸 파발일 게 분명합니다.”
그들의 비아냥에 앞을 가로막은 사내는 묵묵히 나를 훑어보다가, 이내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품에서 시미터를 뽑아 들었다.
“벨트에 뭘 매고 있는지 보여라.”
“응하지 않는다면?”
“전쟁터에서 파수병의 지시에 불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그의 요구에 군말 없이 어스름을 거둬 워 해머와 검 한 자루를 보이자,
사내는 위 해머 쪽을 한참 동안 살펴보다가 고개를 틀어 다시 내 눈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네 목적지까지 동행해주겠다.”
“거절한다.”
“그럼 통행료를 내라, 네가 걸치고 있는 어스름과 그 워 해머 한 자루면 되겠군.”
“깃발도 훔친 거였나?”
“뭐라?”
“훔친 깃발로 파수병 행세를 하는 도적 새끼들인가 싶어서 말이야.”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뒤에 있던 사내들에게 말했다.
“죽여.”
동시에 뒤에서 날아든 사냥추.
그러나 내가 어떤 움직임을 보이기도 전에 위기감을 느낀 벤투스가 가볍게 게걸음을 하듯 왼편으로 이동해 그것을 손쉽게 피해버렸다.
이러한 모습에 이젠 확신을 한 듯,
“티바르의 파발이다! 쳐라!”
세 사내가 무기를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이에 즉시 고삐를 놀려 마주 오는 사내를 향해 맹렬히 나아간 나는 허리춤의 워 해머를 뽑아,
서로의 말 머리가 교차하는 순간에 그 말의 머리를 향해 워 해머를 내리쳤다.
뻑!
둔중한 소리와 함께 고꾸라지는 말, 동시에 안장에서 튕겨 나간 사내가 바닥을 구른다.
그렇게 낙마한 사내 덕에 뒤따라 오던 두 병사는 얼른 고삐를 잡아 말을 멈춰야만 했다.
아군의 머리통을 발굽으로 터트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도망치지 않고 슬쩍 말머리를 돌려 멈춰 선 두 사내를 노려보았다.
“쫓지 마라, 죽는다.”
그러자,
낙마해 신체 어딘가 부러진 듯 보이는 사내가 신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소리친다.
“쪼… 쫓지 마! 우리 선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한 두 사내를 뒤로한 채, 나는 다시 벤투스를 재촉해 길을 떠났다.
* * *
참으로 따듯하고 아늑했던,
뿌리 밑의 집은 빗장이 부서져 있었고 약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대에 귀 큰 자의 시체는 다행히 보지 못했지만,
이러한 흔적들 때문에 내 가슴은 순간 철렁 주저앉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베빌리!”
큰 목소리로 외쳐 불러보지만, 들려오는 것은 나무의 모진 메아리뿐이다.
얼른 그의 집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집기들은 모두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바닥에 어질러져 있었다.
식후주를 담았던 컵도, 맛있는 식사를 담았던 그릇도.
예전 이곳에서 묵었을 때 겪고 기억한 물건들만이 처참한 모습으로 내 눈앞에 널브러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줄기 희망을 붙잡은 채 집 밖으로 나왔다.
베빌리는 영리한 친구다.
그런 그가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리가 없어.
애초에,
그는 일찍이 이곳을 뜰 생각을 했을 거다. 적어도 내가 그렇게 조언해 주었으니까.
그래, 오히려 내가 방향을 잘못 짚은 거다.
거대한 원정대 길드가 있을 법한 도시로 향했으면 아마도 더욱 빨리 그와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
아니야…,
이미 그 사실쯤은 리케니엔을 떠나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중립지역으로 향한 이유는,
어쩌면 그리움에 이끌려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가만,
순간 내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지나간다.
마치 본능에 이끌리듯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인근에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곧이어 도달한 언덕.
바로 이 언덕 위에서 베빌리가 노래를 불렀었지.
혹 이곳에 단서를 남기지 않았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던 와중에,
턱 하고.
발에 뭔가가 걸려서 보니 의도적으로 이곳에 가져다 놓은 듯 보이는 커다란 돌멩이가 보였다.
그 겉에는,
꽃 모양이 새겨져 있다.
바로 돌멩이를 걷고 그 아래 흙더미를 파자 이내 두루마리 하나가 들어있는 유리병 하나가 나왔다.
“허, 베빌리.”
유리병 안에 있는 두루마리를 꺼내 펼치자, 그 안엔 말라비틀어진 꽃잎과 차분한 필체로 쓴 글귀가 나타난다.
[혹시 몰라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이건 제가 남긴 열 한 개의 흔적 가운데 하납니다. 혹시 보물찾기 좋아하시면 한번 다 찾아보시는 게 어떨지요? 하하!
…
장난입니다.
디안님, 저는 아직 부족한 자이기에 제가 먼저 디안님께 도달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디안님이 저를 찾고자 하신다면, 능히 저에게 도달하실 수 있겠지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절 찾으실지도 모르는 디안님을 돕는 것뿐입니다.
저는 케룸이라는 원정 길드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아주 밝은 별자리에 속하는 대형 길드지요.
이 이름을 쫓아 추적하신다면 분명 절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 한 송이 꽃과 노래로 사랑을 쟁취한 베빌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