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그물과 작살 (3)
재림의 인챈트 가운데 ‘속도’에 한해서 가장 발군인 기상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인챈트를 품은 자들 열의 아홉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벼락’
그마저도 인챈트 외적 능력, 가령 비전과 같은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재차 질문하면,
열의 열 모두가 벼락이라고 답할 거다.
벼락은 속도다.
당연하게도 년 수가 낮은 벼락일수록 그 속도의 한계치는 아득히 높아진다.
다만 이 벼락은 모든 재림형 인챈트 가운데서도 시전자의 부담이 가장 크게 때문에,
상기한 한계치에 달하는 능력을 발산한다는 건 곧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일과 같았다.
때문에,
43년, 베체네스를 몸에 담았던 리키 매젠은 급격하게 차오르는 숨을 억누르며 발걸음을 뒤로 물려야만 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갖은 경험을 토대로 요령을 체화시켰음에도,
방금 괴물에게 휘두른 그 일격조차 그의 철저한 계산 속에 속한 것이었음에도.
신체에 벼락을 싣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부담이 큰일인지를 반증하는 셈이었다.
“흡…, 흡…,”
상체를 뻐근하게 만드는 무거운 숨을 가까스로 죽이며,
다시 워 해머를 고쳐잡은 그가 두 눈을 번뜩이자.
이내 번뜩이는 전류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와라, 괴물 새끼야.”
뒷발을 주축 삼아 다시 앞으로 달려나가는 리키.
그가 안면에 허옇게 질린 바람이 내려앉을 만큼 엄청난 속도로 괴물에게 쇄도한다.
쾅!
그가 움직일 때마다.
콰릉!
벼락이 친다.
이윽고 양손에 들린 워 해머가 잿빛 선풍을 그리며 괴물, 라게니드의 반대편 앞다리를 향했지만.
녀석은 야수의 본능과 같은 그것으로 순식간에 상체를 일으켜 피해버렸다.
이어 들어 올린 다리를 리키의 정수리로 조준한 라게니드는.
기이익───!
고목을 꿰뚫을 정도의 위력으로 내리찍었다.
하지만 녀석의 발톱은 리키의 오른편에 박혀 있었다.
발톱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잡아!”
“끌어라!!”
무너진 동쪽 벽 속에서 간신히 몸을 추스른 원정대원들이 놈의 오른발에 꿰어 있는 쇠줄을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강철 건틀릿으로 무장한 그들은 악착같이 쇠줄을 잡아당겨 놈의 균형을 무너트리고,
때맞춰 서쪽에선 화살이 빗발치며 라게니드의 몸통에 박히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우회해서 뒤쪽으로 진입한 별동대가 교역소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와 뒷다리를 공략하자.
꼼짝없이 포위당해 공격당한 괴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악한다.
“오늘 너는 포식자가 아니라 피식자다.”
리키는 표독을 씹으며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흰 거미줄로 켜켜이 쌓인 교역소 내부엔,
아이를 살려보겠다고 온몸으로 감싼 채 죽어 있는 어른들의 모습도,
아직 썩지도 못하고 식량처럼 저장되어있는 자들이 수두룩하게 보인다.
초록 별빛의 영향으로 비대해진 몸을 가진 라게니드는 본디 생긴 것처럼 거미에 불과하지만.
비대해진 몸으로 자행하는 행위들은 괴물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별빛으로 몸집이 커진 짐승들이 비교적 온순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산란기와 같은 시기적 특성 앞에선 모든 것이 무의미했으니까.
이렇듯 두 발 걷는 자들이 만든 벽은 산란기인 라게니드에겐 둥지로서 최적의 조건이었고,
동시에 그 둥지 안엔 식량까지 넘쳐났으니…,
놈들이 이런 곳을 노리고 들어오는 건 어쩌면 자연이라는 이름 속에선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여 두 발 걷는 이들 역시 지금 당연한 일을 하려는 것뿐이리라.
리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오늘의 마지막 벼락을 내리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그 준비를 끝마칠 때쯤.
막 뒤쪽의 별동대에서 유의미한 성과가 드러났다.
* * *
베빌리의 지시에 따라 별동대는 허리춤에서 해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전방으로 투척했다.
그러자 깨진 유리병 속에서 폭발적인 기세로 뿜어진 안개가 교역소 전체에 자욱이 깔린다.
이는 라게니드의 시야를 차단하기 위함이다.
안개 위로 드러난 놈의 몸은 원정대 모두에게 보이지만, 반대로 놈은 발아래 놓인 원정대를 볼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안개가 깔리는 와중에,
갈색 가죽이 덧대어진 특이한 보안경을 낀 소여가 묵묵히 시위를 당겼다.
그 보안경은 난쟁이들의 합금으로,
햇살을 담은 그릇 철과 유리를 섞어 만들어 안개 속에서도 쨍한 시야를 확보받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제 그는 화살이 걸린 시위를 꼬집듯 돌려 목표물을 향해 저격했다.
정확히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은 그렇게,
라게니드 발 곳곳에 걸려 있는 뜬 거미줄을 정확히 관통해 끊어냈다.
시야를 제거한 다음엔,
목표물이 이용할 수 있는 감각들을 하나둘 거세한다.
베빌리는 아톰에게 배운 것들을 아주 치밀하고 오밀조밀한 작전으로 차근차근 시행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제 주의해야 하는 건 단 하나, 놈의 무차별적인 몸부림에 휩쓸리지 않는 것.
기이익 기이익─────!
광분한 라게니드가 다리를 재차 땅에 치대며 지축을 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온몸으로 발아래 깔린 안개 속을 헤집어보지만, 안개 속에선 재차 공격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와중에 오른편 쇠줄은 점점 팽팽해져 몇몇 다리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황.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베빌리는 두 귀를 움찔거리며 예민한 감각을 발휘했다.
곧,
놈이 최후의 발악을 할 거다.
위장액을 바른 거미줄을 사방에 난사하겠지.
원정대와 함께 공멸할 생각으로…!
그렇다면 한 박자 물러서서 놈이 죽기까지만 기다리면 모든 일이 끝이 나겠군.
“모두 뒤로…!”
자욱한 해무 속에서 베빌리가 큰 목소리로 모두에게 소리치자, 하나둘 그의 뒤편으로 집결했다.
그러나 그런 베빌리의 말에 오히려 앞으로 나서는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이런…, 세멜레아…!!”
연한 적색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해무를 뚫고 나아가는 그녀는,
자신의 몸만 한 투핸디드 소드를 어깨에 들쳐 맨 채 그대로 라게니드의 몸통 아래까지 침투했다.
“소여, 세멜레아가 보여?!”
“네, 벌써 놈의 배 부분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별동대 전체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구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전체의 안위를 위해 그녀의 구출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베빌리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고질적인 딜레마 속에서 몇 분처럼 느껴지는 몇 초간 고민으로 머릿속을 끓여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기다릴 줄 모르는 법.
라게니드의 배가 기하급수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고, 동시에 공기마저 태우는 하얀 위장액이 방울져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렇게 일대에 강산성을 두른 거미줄이 펼쳐질 순간.
쿵!
갑자기 들려오는 충격적인 소리에 라게니드의 몸통이 크게 휘청였다.
“소여, 무슨 일이야!”
“그…, 그녀가 방금 라게니드의 한쪽 다리를 거의 양단해버렸습니다!”
이러한 굉음에 맞춰 얼마 안 가,
몸통이 크게 휘청인 라게니드의 머리 부분에서.
꽝!
고막을 때리는 강렬한 벼락 한 줄기가 내리쳤다.
라게니드는 그대로 경련을 일으키듯 움찔거리다가, 이내 그 움직임이 멎어버렸다.
* * *
사냥의 끝을 알리는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면,
비로소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조합과 연계된 연금술사, 기업의 후원을 받는 해체가.
그리고 원정대 자체에서 운용하는 운반대.
그들이 쓰러진 라게니드에게서 얻어낼 것들을 산정하고 정리하는 동안, 선발대는 인근에 자리를 펴고 휴식을 취했다.
천만 다행히도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동쪽 벽이 무너지면서 수십의 대원이 크게 다쳤다.
만약 라게니드가 마지막 발악에 성공했다면 사상자는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왔겠지.
해서 베빌리는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할 일을 하기 위해 곧장 세멜레아에게 갔다.
“세멜레아.”
베빌리의 날 선 부름에도 그녀는 자신이 해낸 일에 한껏 들뜬 표정으로 답했다.
“예, 베빌리.”
“도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따져 묻는 베빌리의 말에 세멜레아는 고개를 살짝 틀며 되물었다.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당신 때문에 별동대 모두가 죽을 뻔했습니다.”
“반대로 제 덕에 사냥이 성공적으로 끝났잖아요?”
“그건 원정대 전체가 만들어낸 결과였을 뿐, 당신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봐요 베빌리,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지시만 내리는 당신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이 행동으로 움직이는 사냥꾼들은 달라요.”
그녀의 말에 멀찌감치 서 있던 소여가 분개했다.
“야, 말조심해.”
“야? 내가 잘 못 들은 건 아니겠지?”
세멜레아가 표독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나 소여를 노려보았지만, 그 앞을 베빌리가 가로막고 섰다.
“됐습니다, 오늘은 운이 좋아 망정이군요.”
베빌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막 피어오르려 하는 분쟁을 꺼트렸다.
“운이라니 웃기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혼자 했다고 말하진 않아 줄 테니까.”
그러나 분쟁을 다시 일으키려는 뉘앙스로 비아냥거리는 그녀의 말에.
베빌리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쨌든 다행입니다, 이렇게 무사히 사냥이 끝나서.”
그는 그녀의 비아냥을 부드럽게 흘리곤 다시 제 갈 길을 향할 뿐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세멜레아는 눈썹을 잔뜩 구긴 채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묵묵히 검을 손질했다.
* * *
난쟁이 라자딜르는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쓰고 있던 단 안경을 벗어 닦았다.
이내 그것을 다시 끼고 창밖을 보니, 그 너머로 끝없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다.
“하필이면 원하는 물건만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그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푸념했다.
무려 아이베리아 중원에 있는 발굽 도시 리디굴람에까지 갔었음에도, 그곳에서 원하는 물건을 구해내지 못했다.
하여 지금 그는 전쟁 중인 중립지역을 가로질러 남쪽 땅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 상황이었다.
“물건을 구해가지 못하면 스페라님이 내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포개어진 손 조합,
그 대표인 스페라를 옆에서 모시는 그에겐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중립지역을 거쳐 원정대들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남쪽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나마 중립지역과는 달리 이동하는 과정에서 신경 쓸 게 없다 보니 라자딜르는 금세 잠에 빠져 한바탕 코를 골 수 있었다.
이윽고 한참이 지나서야,
배에서 울려 퍼지는 고동 소리에 라자딜르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배는 막 만에 마련된 포구에 정박한 상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서자,
제일 먼저 그를 반기는 것은 포구 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표지였다.
[숨 쉬는 땅, 다이트]
이어서 눈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본 라자딜르의 눈엔,
저 멀리 산 정상에 설치된 하늘 포구에 정박하는 구름이 보였다.
“탈 수 있는 작은 구름이라도 마련해 주셨으면 이런 고생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버릇처럼 입에 달린 푸념을 내뱉으며 찬찬히 걸음을 옮기던 그는 왼편,
아주 허름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부분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어부의 배라고 하기엔 그물도 없는 그 배들은 마치 밀항이나 비공식적인 항로를 타고 들어온 것들처럼 보였다.
“딱 봐도 이곳의 치안이 어떤지 알 것 같군.”
서둘러 다이트의 수도인 론다이트로 가야겠단 마음을 먹은 라자딜르가 산을 관통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어….”
순간 시야에 뭔가가 흘깃 스친 것을 느낀 그가 걸음을 멈췄다.
“어어?”
뭐라도 홀린 듯 고개를 돌리자,
“어어어?”
눈에 들어온 것은.
“저분이 왜 이곳에서 나와…?”
틀림없다.
리케니엔의 영주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