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물과 작살 (4)
“잠… 깐!”
틀림없다.
리케니엔의 영주!
라자딜르는 서둘러 그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사이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어 헤쳐나가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마치 물방울 하나로 모래더미를 관통하려는 짓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속으로 풍덩 빠졌다.
그의 키는 성인 인간이나 귀 큰 자의 무릎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들 사이를 헤집고 나아간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본디 상체로 다른 상체를 밀어내 길을 마련하는 건 쉬운 일이겠지만,
그의 시점에서 헤쳐나가야 할 것은 다리였으니까.
그리고 다리는,
두 개잖나.
“으아악!”
여러 다리가 교차하는 그 사이로 요리조리 들어가던 라자딜르는 결국 옆구리를 차였다.
그는 전사로 길러진 난쟁이도 아니고, 기술자로 길러진 난쟁이도 아니었기에 몸 쓰는 일은 젬병이어서.
“억!”
방금 또 옆으로 스치는 다리에 얼굴을 맞아 주춤거려야만 했다.
“야… 이…! 난쟁이는 두 발 걷는 자 아니냐!”
인파 속에서 답답함에 소리도 질러 보지만,
방금 막 그 옆으로 다리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난쟁이와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그런 라자딜르를 바라보는 난쟁이의 눈빛은…,
측은함에 젖어 있다.
“뭘 봐!”
뒤늦게 신경질을 내보지만, 난쟁이는 그대로 무시하고 벌써 저 멀리 나아간 뒤였다.
이제 작심했는지 라자딜르는 우악스럽게 마주한 다리를 양팔로 쳐내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니 제법 가는 과정이 수월하다.
“어어?”
하지만,
라자딜르는 곧 저 앞에 마주 오는 무리를 발견하곤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 무리는,
얼굴에 검댕을 묻힌 채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한바탕 라자딜르를 스치고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겨우 인파 밖으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성공했는데…,
이미 리케니엔의 영주는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짐승이고 나발이고 모두 다 그놈의 호기심을 조심해야 해.”
라자딜르는 벌겋게 상기된 한쪽 뺨을 어루만지며 혼잣말로 투정을 부리며,
능숙하게 안주머니에 있는 지갑에 손을 댔다.
“…어?”
텅 비어있는 주머니를 느낀 순간 라자딜르의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스친다.
마주 오던 그 아이들.
“설마…!”
헐레벌떡 자신의 목걸이를 살피던 그는 그나마 목걸이 끝에 달린 조합의 인장이 멀쩡한 것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상황이 엿 된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 * *
노골적인 기척이 느껴져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했는데,
그때 스페라와 동행하던 그 난쟁이였구나.
아마 이름이 라자딜르였지?
바돈이 이야기해주어서 알고 있어.
그런데 이런 곳에 왜 저자가 있는 거지?
그보다,
갑자기 넝마가 되어 나타나서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멀뚱멀뚱 서 있잖아.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베나즈의 깃발은 포개어진 손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니 도와주는 게 맞는 일이겠지.
후드를 푹 눌러쓴 채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대번에 나를 알아보곤 반색했다.
땋은 수염을 실룩거리며 울상을 짓는 그는,
“리… 리케니엔…!”
“쉿.”
내 제지에 저도 모르게 투박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때리는 난쟁이, 라자딜르.
“제 실수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어 고개를 푹 숙여 사과하는 그에게 나는 재차 손사래 쳐야만 했다.
“이곳에서 위치 같은 건 따지지 맙시다. 그저 서로 면식이 있는 그 관계로만, 이해가 되셨습니까?”
차분하게 설명을 하자 그는 정신을 차리곤 감정을 금방 누그렸다.
“라자딜르, 맞지요?”
“어찌 제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동업자의 이름을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요.”
“저… 저는 그저 스페라님의 비서일 뿐입니다.”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 더더욱 긴밀한 동업자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내 대답에,
라자딜르는 순간 붉게 달아오른 눈두덩이를 얼른 감추듯 등을 돌려버렸다.
뭔가 그에게 실수라도 한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한껏 기침하곤 다시 고개를 돌린 라자딜르는 태연한 모습으로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이곳엔 어찌…?”
“볼 일이 있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라자딜르님은…?”
“니… 님이요?”
“아까 제가 했던 말, 벌써 잊으셨습니까?”
라자딜르는 다시 본인의 입을 찰싹 때리며.
“아이코! 죄송합니다, 아니! 나도 볼 일이 있어서 왔네!”
식물도 알아차릴 만큼 작위적인 연기력을 뽐내었다.
“그나저나 괜찮으십니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는데.”
내 말에 라자딜르는 땋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갑이 털려버렸네…, 주변에 은행 조합이라도 있다면 내 인장으로 돈을 출금할 수 있겠지만…, 알다시피 그런 곳을 찾으려면 적어도 론다이트까진 가야 하는데…,”
그리곤 쓱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그 모습이,
측은한 갈색 장모종 개 같다.
“잘 됐군요, 저도 그곳으로 향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뱃사공이 말하기를, 원정대를 비롯해 그들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땅으로 향하기 위해선 론다이트로 가야만 한다고 했었다.
“저… 정말인가?”
“상황이 상황이니 저와 같이 갑시다.”
“그… 그래! 그럼 날 따라오게! 산을 관통하는 열차를 타야 론다이트로 바로 직행할 수 있거든!”
신이 난 라자딜르가 짧은 다리를 연신 놀려대며 내 앞장을 자처했다.
“그거 아는가? 열차는 난쟁이와 귀 큰 자들로 이루어진 조합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그리고 그 열차는 지금 대부분 인간 기업에 의해 운용되고 있지.”
마치 인챈트 같네.
“다른 곳에 이런 열차가 수십 대는 더 있다고는 들었는데,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이베리아의 북쪽 땅인 리시론의 것뿐이네.”
슬슬 마음이 놓였는지, 라자딜르의 언행은 점점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라자딜르님은 무슨 일로 이런 먼 곳까지 오신 겁니까.”
“나? 나야 자네 갑옷을 위한 재료를… 읍!”
“갑옷 말입니까?”
“그… 그게 뭐 어차피 곧 알게 될 사실이니 미리 알아도 상관없겠지! 스페라님은 자네를 위한 갑옷을 만들길 원하네.”
“부담되는군요, 갑옷이라는 건 굉장히 값비싼 물건이라고 들었는데.”
내 말에 라자딜르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네, 어차피 서로 간에 계약은 체결된 것이고 갑옷에 대한 건은 그 계약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니까.”
라자딜르 본인도 자신이 지금 꺼내는 말에 모순이 섞여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어쨌든 상호 간에 거래를 튼 이상, 대가 없는 지불이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스페라에게 그 갑옷은 나와의 거래에서 언젠가 하나의 유력한 패로 작용하게 될 거다.
그렇다면 그 패를 무력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군.
일단 명분상으로라도 갑옷은 필요한 것이니 준다면 기꺼이 받을 것이다.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에서 갑옷은 곧 명예와도 같으니.
마찬가지로 그 땅에서 불명예의 상징인 화약조차 막지 못한다면 그걸 기사라고 부를 순 없지 않겠는가?
절묘하다면 절묘할 시점에서 라자딜르를 만나게 된 건 내게 아주 큰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의중을 미리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니까.
곧 열차를 타기 위한 매표소 앞에 도착한 나는 쭈뼛쭈뼛 눈치를 보고 있는 라자딜르를 지나쳐 그의 것까지 두 장의 표를 구매했다.
[론 다이트로 날아가는 화살 – 쾌속 1등 석]
혹 둘 사이에 긴밀한 대화가 오갈지도 모르니 좌석도 1등 석으로 골랐다.
이어서 열차에 벤투스를 싣기 위해서 가장 좋은 전용 화물칸까지 대여하니 순식간에 금화 세 개를 써버렸다.
새삼 지금에 와서 금화 세 개는 그리 큰 금액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중립지역 시절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 금액으로 며칠을 숨이 찰 정도로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슬쩍, 추억에 바짓자락을 적셔본다.
그나저나,
이럴 줄 알았다면 바돈의 말을 듣고 금화를 좀 더 챙겨 나오는 건데.
이제 수중에 남은 금화는 열여섯 개뿐이다.
* * *
객실로 이루어진 1등 석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선반 위에 놓인 유리병들이었다.
어떤 것 안에는 쨍한 햇볕이 들어있고, 또 어떤 것 안에는 서리가 껴있는 것을 보니 알아서 방 안의 환경을 맞추란 얘기겠지.
라자딜르는 얌전히 앉아 바닥 위로 한참이나 뜬 두 발을 휘휘 저으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와 마주 앉은 나는 팔에 감았던 끈을 다시 고쳐 맨 채 편한 자세로 앉아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았다.
세공소에 있었을 적, 책으로만 접했었던 열차를 이렇게 직접 타 볼 줄이야.
문득 노래 가사 중에 이 문장이 하나 떠오르네.
인생은 같은 것을 삼키면 써지지만, 새로운 것을 삼키면 내내 달콤하다고.
이런 내 생각을 읽었을까,
객실 천장에 달린 나팔관에선 마침 고지식한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이제 그 고지식한 음악 사이를 꿰뚫는, 낮고 점잖은 남자의 목소리가 객차 전체를 가득 채운다.
[시위에 걸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저희는 곧 쏜 살이 되어 두 개의 산을 관통하게 될 겁니다. 그 과정이 여지없이 빠른 것들로 점철되어 있겠으나, 여러분의 여정 속엔 늘 여유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운행하겠습니다. 이상 활촉을 담당하는 기장, 맥달라스였습니다.]
이윽고,
덜컹─
객차가 일순간 진동하더니,
피이익!
거대한 증기 소리와 함께 슬슬 열차가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결국엔 나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라자딜르와 같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열차는 금세 속도가 붙어, 철길을 따라 주위 풍경을 가르며 매섭게 나아간다.
그렇게 열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똑똑.
하고 밖에서 누군가 객실 문을 두들겨왔다.
내 눈치를 살피던 라자딜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는 능숙하게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흰 수염이 인상적인 노신사가 정중히 들어와 우리 앞에 놓인 탁상에 종이 하나를 올려놓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생각이 없었지만…,
라자딜르의 눈빛은 여지없이 간절하구나.
“라자딜르, 골라 보십시오.”
“그럼…, 저…,”
라자딜르는 슬쩍 종이 위에 적힌 것들 가운데 하나를 짚으며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얼음과자 하나만 사주십시오.”
“…, 같은 걸로 두 개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노신사는 웃으며 종이를 거들고 밖으로 나섰다.
라자딜르는,
두 다리를 방방 흔들며 다시 풍경 구경에 여념이 없다.
* * *
“제가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제 수염을 밀어버리려고 하셨습니다.”
“자식이 학문에 열의를 보이는 데 그런 반응을 보이셨단 말입니까?”
“난쟁이들의 사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거든요.”
어느새 나는 라자딜르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제법 그 이야기들이 재밌긴 했다.
어쨌든 생소한 난쟁이 사회의 단면을 엿보는 기분이었으니까.
난쟁이들은 기술적인 학문에 신봉 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곧 부와 명예, 그리고 이 세상 사회의 주 구성원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다하는 거라 믿는 것 같이.
확실히 그들의 기술력은 이 세상에 깊이 침투하여 이제는 없어선 안 될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술과는 거리가 먼 학문에 눈을 돌린 라자딜르가 그들의 사회에서 별종 취급을 당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갔다.
“저는 악착같이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저명한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까지 했지요.”
“대단하군요.”
“저도 그때까진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답니다, 포개어진 손 조합의 고문으로도 들어왔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라자딜르는 곧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다시 하소연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스페라님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녀는 어떤 사람입니까?”
스페라,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 같네.
내 물음에 라자딜르의 입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찰나, 열차는 방금 막 거대한 산속으로 꽂히듯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