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37화 (137/365)

137화. 그물과 작살 (5)

“안녕, 오렐린.”

“언니, 어디 가?”

앳된 여자아이의 물음에 소녀는 답했다.

“아주 멀리, 빨래도 잘하고 밥도 잘해서 상으로 여행을 보내준다고 했거든.”

“우와아…, 부럽다아…”

풍성한 두 뺨을 붉히며 동경의 눈빛을 보내는 여자아이에게.

소녀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본인이 금화 한 개에 팔려간다는 것을.

이 순간이 마지막임을 직감한 소녀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잘 지내, 오렐린.”

“나도 꼭 여행 가고 싶다. 그럼 언니도 만날 수 있고 머어얼리도 갈 수 있잖아.”

“그래, 그럼 꼭 여행 가서 나 만나러 와주어야 해?”

“응! 언니, 벌써 보고 싶다아!”

“지금 이렇게 보고 있잖아.”

“그래도 보고 싶다아!”

천진한 아이의 말에 소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두 뺨이 살살 떨리고 목이 턱 막히는 것이 잘못하면 껴안은 아이의 어깨에 눈물을 쏟을 것 같아서.

이어 소녀는 슬쩍 아이를 밀고는 휙 고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정말 잘 지내야 해, 오렐린. 안녕.”

그리곤 머리에 매고 있던 볼품없는 잿빛 리본을 아이에게 건네며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그런 소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채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 작은 짐가방 하나를 들고, 기다란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온 소녀는.

저 앞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쪽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머리 위로는,

[뤼겐 보육원]

메마른 가지에 엉켜 있는 낡은 간판이 우뚝 세워져 있다.

간판 너머엔 중년 여인 하나와 두 남자가 마치 긴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중 중년 여인은 소녀에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뤼겐의 보육원장인 그 여인은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막 걸어 나온 소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저 풍만한 몸 어딘가엔,

두 남자에게 받은 금화 한 개가 들어있겠지.

소녀는 묵묵히 두 남자의 손짓에 따라 마차 위에 올랐다.

이러한 모든 과정 가운데,

소녀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 * *

8년이 지나, 소녀는 10대 중반이 되었다.

그녀는 밝은 아침으로 추정되는 시간대에 일어나,

지하 어딘가에 마련된 암실 안에서 받아둔 빗물로 얼굴을 닦았다.

때맞춰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철문 바깥에선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마치 잘 조련된 짐승처럼 기민하게 반응한 그녀는 얼른 문 앞에 엎드렸다.

그러자 곧 철문 밑에 달린 작은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적지 않은 양의 두루마리가 쏟아졌고,

동시에 암실에 불이 켜졌다.

이제 그녀는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하나하나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한다.

마치 목숨이라도 걸린 것처럼 필사적인 모습으로.

두루마리에 적힌 것들은 모두 암호문.

그것도 여러 나라에서 쓰이는 암호로 뒤섞여 있어 이중 삼중으로 해독해야 하는 난해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머릿속으로 그 암호들을 차분히 풀어나갔다.

그렇게 첫 두루마리를 해독해 얻은 단어는 총 세 개.

[36호실, 15호실, 58호실]

바로 다음 두루마리를 펼쳐 해독을 이어나가던 그녀는 이내 수 분 만에 또 다른 단어들을 손에 넣었다.

[아침, 점심, 저녁, 모레]

그러나 두 번째 얻은 문장에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야만 했다.

이어서 세 번째 두루마리를 살피려는데, 밖에서 끝이 임박했다는 종소리가 울린다.

“설마…, 내게 필요한 단어를 일부러 빼놓은 거야?!”

절망적인 상황일까,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아직 흐트러지지 않은 집중력으로 마지막에 놓인 두루마리 속에서.

[방어]

원하는 단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에 맞춰,

밖에선 여러 발소리가 들리며 거친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모두 멈춰!”

“해독한 문서를 가지고 문 앞에 대기해라.”

그녀는 이제 본인이 해석한 두루마리를 들고서 문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곧이어 열린 문,

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남자는.

조합에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오늘은 어땠어, 15호실?”

능글맞은 중년 남성이 후덕한 턱을 자랑하듯 드러내며 묻자,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품에 안고 있던 두루마리를 건넸다.

“15호실, 아침, 방어.”

“꼼꼼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용케 발견했네.”

남자는 건네받은 두루마리를 흘겨보며 아쉽다는 듯 기름진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말한 건 생각해 봤어?”

이어 남자는 다시 불쑥,

손을 내밀어 그녀의 허벅지를 쓸었다.

“너의 이 사이에 있는 걸 내게 주면, 난 너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어. 예를 들면 오늘 아주 힘들게 발견한 그런 단어 같은 거 말이야.”

노골적인 그의 추행.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틀어 땅바닥을 노려볼 뿐이다.

“루이스! 안 나오고 뭐 하나!”

그녀에게 있어 지옥 같았던 시간은 문밖, 감독관의 목소리로 끝이 났다.

“끝까지 잘 생각해 보라고, 알겠지?”

아니, 끝난 줄 알았는데 남자는 그 두꺼운 검지로 여인의 귓불을 튕겼다.

그렇게 남자가 밖으로 나가 철문을 잠그기 무섭게,

여인은 냉소적인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씨발 새끼.”

잠시 후, 사방에서 끌려 나오는 이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들은 아마도 오늘 주어진 암호문에서 원하는 단어를 가지고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른 호실에서 해독한 문장에 공격당했을 거다.

이 공격에 당한 호실은 다음 날 공실이 되었다가, 어느샌가 새로운 인원으로 충원되길 반복됐다.

끌려나간 인원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벨카지드의 민감한 부분 속에 발을 담근 자들이 무사할 리는 결코 없을 거다.

그래,

이곳은 벨카지드의 암호 부대를 양성하는 곳.

그리고 이 과정은 모두, 그러한 부대원을 양성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 * *

요즘 복도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4호실의 인물이 엄청난 실력을 자랑한다는 것이었다.

벨카지드에서 만든 그 난잡하고 복잡한 수많은 암호문 사이에서 본인의 방어는 물론 다른 호실에 공격을 퍼붓는 그녀의 실력은 곧 일대 인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건 15호실의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내일이라도 15호실이란 단어가 숨겨진 두루마리가 4호실로 들어갈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나자,

감독관들은 불시에 호실로 찾아와 매정한 말투로 통보했다.

곧 이번 기수에서 부대를 차출해낼 것이라고.

그렇게 차출할 인원은 총 한 명뿐이라고.

이러한 통보가 이루어진 다음 날.

15호실의 여인은 아침이 되자마자 쏟아져 들어온 두루마리를 보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첫 번째 두루마리에 아주 노골적으로 4호실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4호실에 공격을 퍼부으라는 듯이,

반대로 4호실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보겠다는 듯이.

아주 노골적으로 말이야.

15호실의 소녀는 그런 그들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지만,

역으로 4호실의 공격보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본인의 역량으론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면 다른 호실은 벨카지드의 의도대로 일단 눈앞에 보이는 위험 요소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4호실은 마치 난공불락의 성처럼 절대로 함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4호실은 다른 호실을 차근차근 제거해나가기 시작했다.

하루에 주어진 두루마리를 전부 다 해석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 4호실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오롯이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만 주력한 15호실의 소녀만이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밝았다.

그날은 뭔가가 달랐다.

아침이 밝기 무섭게 15호실의 소녀는 감독관의 지시를 따라 8년간 갇혀있던 암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끌려 나와 작은 책상 앞에 앉은 그녀의 맞은편엔,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소녀는,

15호실의 소녀가 아주 잘 알고 있던 아이였어.

“… 너….”

덜덜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운을 뗐지만,

맞은편 소녀는 15호실의 소녀를 보곤 냉정한 모습으로 이죽거렸다.

“빨리 끝내줄게.”

“오… 오렐….”

차마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감독관은 두 소녀를 제지하곤 비어있는 두루마리를 각각 건넸다.

“최종 시험이다, 지금까지 익힌 암호들을 배치 배열해 적은 뒤 서로의 것을 바꿔 해독할 수 있도록. 먼저 해독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이어지는 감독관의 말에,

15호실의 소녀 맞은편에 앉은.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앳된 소녀는 표독한 얼굴로 두루마리에 뭔가를 휘갈기며 적기 시작했다.

“오… 렐… 린….”

15호실의 소녀가 나지막이 말해보지만.

맞은편 소녀, 오렐린은 매정한 표정으로 15호실의 소녀를 비웃었다.

“보육원장이 너까지 팔 줄은…,”

“그러게, 너를 보고 나도 여행이라는 걸 가보고 싶어 열심히 빨래하고 밥도 지었는데…, 이런 여행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야.”

“오렐린…,”

“그만 울어, 멍청아. 계속 질질 짜다가 허무하게 죽을 거야?”

“나… 나는… 나는…,”

오렐린은 히죽 웃으며 금세 적는 것을 끝마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의 15호실의 소녀는,

처연히 두루마리 맨 위에 암호 하나를 적어 넣었다.

매우 복잡하고 해석하기 힘든 암호 두 개로 이루어진 그 안에 숨겨진 문장은.

[미안해]

오렐린의 실력이라면 1분도 채 걸리지 않고 풀릴 암호.

그렇게,

오렐린의 두루마리를 받은 15호실의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암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천천히, 꼬박꼬박 써 내려간 글씨.

[드디어 만났네, 안녕! 스페라 언니. 보고 싶었어.]

* * *

집무실에서 끊임없는 업무를 처리하던 스페라는 잠시 피곤에 겨워 고개를 젖혀야만 했다.

그러면서 조용히,

손목에 묶여있는 볼품없는 리본 끈을 바라보던 그녀는.

갑작스레 떠오른 과거의 단편들을 머릿속으로 흘려보내며 작게 투덜거렸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 * *

열차는 막 첫 번째 산을 통과했다.

그 길었던 어둠 속에서 벗어난 열차는 금세 화한 빛으로 가득 차올라,

쭉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내 두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스페라 그녀가 벨카지드라는 곳이 보유한 채권 전부를 빼돌려 자산을 불렸다 이 말입니까?”

“그렇지요, 천애 고아에 이렇다 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을 텐데도 그런 일을 해낸 것을 보면 역시 예사 사람은 아니었던 거지요.”

긴 어둠 속에서 나눈 이야기는 제법 놀라운 것이었다.

참으로 화사하고 화려하게 핀 꽃처럼 보였는데, 그 아래가 아주 척박한 땅이었어.

그럼에도 그곳에 뿌리를 내려 장성하게 핀 것을 보니.

확실히 대단한 사람인 것 같네.

역시 결코 쉽게 볼 사람이 아니야.

그런 불우한 환경을 가지고서도 딛고 일어선 사람이니까.

“아무튼, 스페라님의 자본력 앞에 제가 배운 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알았죠! 시장은 자본으로 시작해서 자본으로 끝난다는 것을!”

“그래도 당신을 계속 옆에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당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라자딜르는 눈 내리는 병 속, 잘게 갈린 얼음과자를 흠뻑 빨아들이며 새침한 표정을 짓는다.

“으음… 그… 건 그렇지요.”

“그녀에 대해 더 아는 게 있습니까? 그러니까 불우한 시절을 딛고 거대한 자본을 쌓아 난쟁이 조합 계에 모습을 드러낸…, 그런 이야기 말고요.”

이어지는 내 질문에,

라자딜르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외엔 포개어진 손 정상에 우뚝 서서 여러 깃발과 사업을 하시는 모습밖엔 본 적이 없어서요…, 그런데 말입니다.”

갑작스레 진지한 얼굴로 바뀐 그의 모습에,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집중했다.

그렇게 라자딜르는 진지한 얼굴로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얼음과자 하나만 더 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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