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그물과 작살 (6)
목적지에 다다른 열차가 마지막 증기를 내뿜는다.
이내 바깥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객실을 나서자 아까 보았던 노신사가 다가와 작은 종이를 건넸다.
“맡겨주신 말은 17번 승강장으로 가시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건 1등석 전용 통로 이용권이니 따로 마련된 복도에서 제출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평온한 여정 되시기를.”
특유의 고풍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건네는 노신사를 보니 내가 아주 먼 외지에 나와 있음을 실감했다.
이제 객차 밖으로 나와 곧바로 이어진 복도로 향하던 나와 라자딜르는 마주친 갈림길 앞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본의 아니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덕분에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또 덕분에 열차라는 것도 타봤고요.
열차 안에서 봤던 그 풀어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시 냉철한 모습으로 돌아온 라자딜르는,
내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이 은혜를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납시다.”
그렇게 나와 라자딜르는 서로 갈 길을 향해 몸을 돌려 나아갔다.
곧이어 조용한 복도를 지나 17번이 적혀있는 굽이진 길을 따라 내리막길을 걸으면,
그곳엔 벤투스가 마치 날 마중 나온 것처럼 멀뚱멀뚱 서 있다.
“벤투스, 열차는 어땠어?”
푸릉.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흔드는 걸 보니 녀석도 열차가 그리 나쁘진 않았나 보다.
“가자.”
곧이어 나는 벤투스의 고삐를 잡아끌며 유유히 승강장 바깥으로 향했다.
* * *
론다이트는 말 그대로 세상의 또 다른 한 페이지였다.
지금은 철저하게 사라져가는 중인 중립 지역과도, 그리고 기사의 땅 이아베리아와도 그 성격이 아주 다른 곳이었으리라.
내가 이렇게 확신하며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시가지 중심지에 ‘탑’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도심을 대표하는 마천루처럼, 구름을 관통한 모습으로 끝없이 솟아있는 검은 탑은 다른 건축물과는 궤를 달리하는 자태를 자랑했다.
본능적으로 나는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들었던 마법사의 탑이란 걸 직감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이 하나 생긴다.
글쎄, 중립 지역에서 지냈을 때는 탑이란 건 보이지 않는 최대의 위협이었거든.
대표적으로 인챈트 사냥꾼인 순례자가 그러하다.
탑을 배후 삼아 움직이는 무시무시한 광신도들.
그래서 나는 극도로 예민한 감각을 펼쳐 주위를 경계해야만 했다.
하지만 펼친 감각 안에 걸쳐 들어오는 것은,
이곳 두 발 걷는 자들의 평화로운 일상뿐이었다.
홀로 지붕 위에 눈이 쏟아지고 있는 집, 원정대와 연계된 듯 각종 괴물의 소재를 진열대에 널어놓고 파는 상점.
거리에는 처음 보는 거대한 짐승이 본인 덩치에 걸맞은 짐을 끌며 걷고 있고, 사방의 바다에서 건너온 듯 보이는 각양각색의 두 발 걷는 자들이 원정대에서 내놓은 의뢰를 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내가 탑에 대해 알고 있던 부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나 싶기도 하네.
그나저나 베빌리를 찾기 위한 서두를 어떻게 끊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제일 먼저 찾아가야 할 곳은…,
역시 주점이겠지.
처음, 촙과 안드레가 내게 알려준 세상도 그곳이었으니까.
중립 지역과는 달리 삭막함이 덜한 골목을 건너 제법 규모가 큰 주점으로 들어서자,
일순간 안에 있던 자들의 몇몇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러나 그들은 곧 관심을 끊고 본인의 테이블에 집중했다.
덕분에 부담 없이 주조사가 서 있는 바 근처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어서 눌러 쓰고 있던 어스름을 벗으면, 열심히 본연의 일에 집중하고 있던 주조사가 내 얼굴을 보고 대번에 다가온다.
“휘청이는 술잔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허옇게 질린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 세월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주름.
굵직하고 거친 손 마디를 보면 과거에 무기를 잡고 살아가던 자임이 틀림없다.
비록 매튜 아저씨와는 그 결이 달라 보이지만, 같은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비슷한 삶을 산 것처럼 느껴져.
이렇게 떠오르니까,
그립네요, 매튜 아저씨.
“반딜라 산 에일과 와인이 있습니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에일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중립 지역에서 맛본 적 있는 술이 낫겠지.
하지만 주조사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은근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 내밀어 속삭였다.
“손님, 혹시 이곳에 처음 오신 겁니까.”
“예.”
“역시 그랬군요, 저희 휘청이는 술잔은 평범한 주점이 아닙니다. 일종의 정보상이죠.”
“정보상 말입니까?”
“반다이트의 주점은 대부분 유료 정보를 판매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정보를 구매하기 위해선 에일보다 비싼 와인을 시키셔야 하지요.”
“그럼 에일은 못 마시는 겁니까?”
“당연히 드실 수 있지요, 어쨌든 이곳은 엄연한 주점이니까요. 하지만 손님께서는 그런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처럼은 안 보이는군요. 에일로 하시겠습니까?”
“…,와인으로 하죠.”
내 대답에 주조사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알겠습니다, 손님.”
이어서 그가 내게 내민 차림표엔 생각보다 다양한 값을 가진 와인이 적혀 있었다.
[불드럼의 과실 – 은화 54개]
[와일들링 7년의 결실 – 금화 1개]
[에밀레야의 정원 – 금화 1개]
[선악과, 폴링앤션 – 금화 2개]
….
“가격이 비쌀수록 정보의 질도 올라간다 이거군요.”
“맞습니다, 손님. 반다이트는 정보가 곧 생명이거든요. 많은 걸 알고 있어야 많은 걸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한 곳에서 가능한 많은 정보를 끌어안는 게 좋겠어.
나는 주조사가 보는 앞에서 차림표 가장 밑, 필기체로 휘갈기듯 써진 항목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용의 심장, 라론 후르츠 – 금화 6개]
그러자 주조사는 유리컵을 닦던 것을 멈추고,
“아미라, 잠깐 바를 맡아 줘.”
근처에 있던 귀 큰 종업원을 불러 바에 세웠다.
“따라오시죠, 손님.”
이어서 정중히 인사하는 그를 따라, 나는 새로운 장으로 점철된 페이지 속 한 문단으로 빨려가듯 걸음을 옮겼다.
* * *
바 뒤편, 알록달록한 술병이 진열된 수납장에 감추어진 장치를 조작하면.
이내 그 무거운 수납장이 덜컹거리며 양옆으로 열린다.
그 안엔 또 다른 비밀스러운 복도가 있었고, 주조사는 그 복도에 딸린 방 가운데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앉아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주조사의 말을 따라 신체를 잡아먹을 기세로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
이제 주조사가 이쑤시개만큼 잘록한 허리를 가진 유리잔을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놓는다.
“라론 후르츠, 1년 산입니다. 서쪽 땅, 고지식한 와인 사업가들의 뒤통수를 후려친 교배종의 반란이자 결정체지요.”
“고지식하다는 건?”
“가격 말입니다, 과실 액을 그저 오랫동안 잠재웠을 뿐인데 그것을 깨우는 대가로 수천 개의 금화를 요구하는 건 말 그대로 고지식함의 극치 아니겠습니까.”
주조사는 조심스레 검붉은 유리병 안에 담긴 와인을 내 앞에 놓인 유리잔에 따랐다.
그것은 마치 곱게 빻은 루비를 물에 탄 것처럼, 진득한 빛깔을 뽐내며 쏟아져 잔 바닥에 부딪혔다.
마치 각기 다른 것을 쫓는 깃발들처럼,
주조사들의 세계에서도 각자 추구하는 것이 다른 것 같다.
“리시론 4년의 눈보라와 방랑 빙산 올체르의 각얼음이 있습니다만?”
“아뇨, 이대로 하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시군요, 차게 먹는 것도 별미이긴 하지만 역시 본연의 맛을 느끼는 게 최고지요.”
이제 주조사는 유리병을 잔 옆에 내려놓고 정중한 자세로 꼿꼿이 서서 고개를 까딱 숙였다.
“그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본론으로 가볼까요?”
“좋습니다.”
“손님께선 라론 후르츠를 고르셨기 때문에 세 가지 주제와 관련해 가장 고등급의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정대, 탑, 그리고 남은 하나는 얻은 정보를 토대로 결정하겠습니다.”
내 말에 주조사는 중년 특유의 중후한 미소로 다시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먼저 원정대 부분부터 시작하지요,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은 캐룸 원정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혹,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입니까? 아니면 그저 행방을 알고 싶어 하시는 겁니까?”
목적마다 다른 정보가 있다는 소린데.
이거 참 살벌하구나.
“그저 행방을 알고 싶습니다.”
“며칠 전, 캐룸 길드가 반다이트 중계소를 통해 대형 원정 임무를 수주받고 어스키만으로 출발했습니다. 시간상으로 볼 때 그들은 이미 수주받은 임무를 완수하고 끝맺음 단계에 도달했을 겁니다.”
“그렇다는 말은…,”
“아마도 갈무리를 마치고 반다이트로 복귀하겠지요.”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보면 베빌리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겠어.
“첫 정보에 만족하셨습니까?”
“만약 만족하지 못했다면요…?”
주조사는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차림표를 내게 내밀었다.
“추가적인 정보를 보완하고 싶으시다면 아무 와인 하나만 추가로 더 주문하시면 됩니다.”
“원정대와 관련한 건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탑의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관건은 이 부분이다.
“론다이트엔 아주 거대한 탑이 있더군요, 혹시 이 근방에 활동하는 탑의 순례자가 있습니까?”
내 질문에 주조사는 은근한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례자는 세력이 적은 탑이 그것을 확장하기 위해 운용하는 집단일 뿐, 애초에 가진 영향력이 거대한 탑은 그런 광신도를 두지 않습니다. 예, 론다이트의 탑은 그 영향력이 일대를 주름잡고 있어 순례자가 필요 없습니다.”
새로운 사실이로군.
“결국엔 일대 기후를 조절하는 탑도 주위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는 거로군요.”
“정확한 평론이십니다, 손님. 이곳의 탑은 론다이트의 주민들에겐 축복과 같은 존재입니다.”
세력이 고프면 언제든지 다른 이의 살을 물어뜯는 짐승이 될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넉넉한 환경을 바탕으로 신처럼 군림할 수도 있다는 건가.
탑의 세상도 참 넓구나.
“자 그럼 손님, 마지막 주제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이거 생각보다,
정보에 한없이 취해버릴 수도 있겠어.
괜히 정보상이 주점의 형태를 띤 게 아니었군.
많은 정보를 들이킨다는 건, 그만큼 많은 술을 시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니 문자 그대로 취해버리는 건 매한가지 아니겠어?
“역시 탑으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론다이트의 주민들은 어째서 이곳의 탑에 호의적인 입장을 내비치는 겁니까?”
이어진 내 질문에 주조사는 올 것이 왔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내게 대답한다.
“탑의 주인이 내건 과제로 인해 이 일대에 론다이트가 생겨날 수 있었으니까요.”
“과제?”
“탑의 주인은 세상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다고 알려졌지만, 반대로 외부인이 탑에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물론 탑 주인의 허락 하에나 가능한 이야기지만요.”
탑으로 들어갈 수 있다?
“두 발 걷는 자들은 그것을 흔히 ‘등반’이라고 부릅니다.”
“그 등반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재차 이어진 내 질문에,
주조사는 싱긋 웃으며 내 앞에 놓인 차림표를 내려다보았다.
결국엔,
궁금증을 해갈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취해야 할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