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그물과 작살 (7)
탑의 마법사가 내건 ‘상품’은 주기마다 달라진다.
그것은 마법이 깃든 물건일 수도 있고,
부유하는 구름일 수도, 혹은 날씨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일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원하는 꿈을 계속 이어나가며 꾸게 해준다거나, 특정한 감정을 담은 연고가 나온 적도 있으며.
스러진 인장이나 망자의 비전이 걸렸었던 역사도 있다고 했다.
그럼 반대로 탑의 등반자는 무엇을 걸어야 하는가?
그건…,
‘운명’이다.
주조사가 앞서 말했듯, 마법사는 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것은 현자가 정립한 용의 시대 이후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법칙 중 하나였기에,
하늘을 움직여 기후를 만들고 기상을 쏟는 마법사들이라도 감히 어길 수 없다.
하여 그들은 자신의 의식 일부를 위탁한 채 세상을 돌아 다녀줄 매개체가 필요했고, 상기한 법칙의 테두리 내에서 고안해낸 방법이 바로.
등반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자의적으로 탑에 들어왔으나 등반에 실패한 자들은 그 운명을 마법사에게 빼앗겨,
속칭 마법사의 전서구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위험이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지금도 탑을 등반하기 위해 움직인다고 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용기 있는 일반인부터,
몰락하거나 부흥을 꿈꾸는 깃발 달린 자까지 말이야.
어느새 테이블 위엔 다섯 잔이 넘는 술이 올라와 있었다.
그것들을 마시진 않았지만, 머릿속에 산재 된 정보들로 인해 다른 의미로 취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습니까, 그 정도 정보로 충분하신지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출구는 복도를 통해 이어진 뒷문을 이용해주십시오, 이대로 정문을 통해 나가다간 정보를 탈취하려는 자들이 엮일지도 모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손님. 이렇게 많은 정보를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조사가 건넨 인사에 같은 인사로 화답한 나는 그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골똘히 머릿속을 정돈해야만 했다.
인챈트에 연연하지 않는 마법사가 있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사실인데, 거기에 더해 바깥세상과 내기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등반의 과정에 대해서도 물을까 했지만, 애초에 탑에 걸린 상품이 주기마다 바뀌는 것을 보면.
그 과정을 당장 안다고 해봤자 시간이 지나도 계속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겠지.
제법 흥미로운 책 한 권을 읽은 기분이다.
많은 돈을 써버리긴 했지만, 세상의 새로운 면면을 구경해볼 수 있었으니 그리 아깝게 느껴지진 않네.
자리를 털고 일어서 복도를 통해 뒷문으로 나온 나는 주점을 삥 둘러 벤투스의 고삐를 잡고 길을 나섰다.
* * *
론다이트에서의 첫날이 지났다.
개인 마구간을 운영하는 여관을 구하느라 새벽까지 헤매긴 했지만,
덕분에 나도 벤투스도 아주 좋은 곳에서 숙박할 수 있었다.
캐룸 원정대가 정확히 언제 이곳에 복귀할지는 모르는 일이니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이곳을 둘러봐야겠어.
옷을 차려입고 어스름을 팔에 건 채 밑층 홀로 내려가자 이미 종업원들이 조식을 차려놓은 뒤였다.
낡은 아밍 소드를 옆으로 치워 두고 자리에 앉은 나는 건조한 밀 빵과 과일 잼으로 간단히 한 끼 식사를 해결했다.
그런 내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고 있던 여관의 안주인은,
조용히 다가와 고소한 커피 한 잔을 내게 건네주었다.
“편안한 밤 되셨는지요?”
“덕분에요.”
“그것참 다행이로군요, 중식으로는 삶은 닭과 베리가 나올 예정이니 잊지 마시고 꼭 와서 식사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게 시계가 없었구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나가서 작은 줄 시계 하나를 사야겠다.
“참, 이른 아침부터 새 한 마리가 마당 주위를 날아다니던데…,”
안주인은 내 왼팔에 묶여있는 끈을 살피곤 시선을 마당 쪽으로 옮겼다.
이런 끈을 매단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나 보군.
“그렇습니까?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서둘러 밖으로 나서자 동시에,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온다.
검은 깃을 가진 그 새는 내 정수리 위로 유려하게 원을 그리며 날기를 반복했다.
곧바로 끈이 묶인 왼팔을 슬쩍 내미니 새는 재빠르게 그 위에 착지하곤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린다.
그 다리엔 작은 나무통이 매달려 있었다.
여관 근처에 있는 새장에 새를 들여놓고 난 뒤 나무통을 가지고 방으로 올라간 나는,
리케니엔의 향수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두루마리를 꺼내 펼쳐보았다.
타지에서 홀로 잘 지내시는지, 혹 식사를 거르고 계신 건 아닌지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영주님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세라가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더군요.
영주님이 떠나신 직후 리케니엔에 일어난 부흥이 모두 꿈처럼 느껴진다면서요.
그러나 그것이 결코 꿈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케니엔은 영주님이 마련하신 기반 위로 지금도 탄탄히 쌓여가고 있지요.
먼저 베르융 오르테의 보고입니다,
리케니엔의 주민을 차출하여 조직한 병사 30명이 1차 훈련을 성공적으로 끝마쳤습니다.
그 가운데 둘을 견습 기사로 서임했으며 이제 막 2차 훈련을 위한 준비 단계에 돌입할 것 같습니다.
다음은 다소 좋지 않은 소식이지만, 리케니엔에서 첫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르긴이 사건 당일 바로 범인을 검거하였고, 기지어가 약식 재판을 통해 범인에게 교수형을 선고했습니다.
기지어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거리에 효시하여 베나즈 깃발의 위엄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이가 이에 반대했습니다.
이 건의 처분은 영주님께서 보내신 답장의 내용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다음은 정찰대, 할리 멜르아의 보고입니다.
발기지르에서 삼 백에 가까운 병사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켄타나 사이에서 팽배했던 긴장감이 드디어 폭발한 것 같습니다.
곧 전쟁이 펼쳐질 것입니다.
기지어 도의 보고로는 그가 조합으로부터 작은 건물을 임시 대여받아 학술원을 운영한다고 합니다.
행정 쪽에 보탬이 될 재원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같은 사업을 추진하려고 한다고 하니,
이 역시 영주님께서 결제를 해주시면 곧바로 기지어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조이 크레비디의 보고입니다.
리케니엔의 사신 자격으로 티히트라를 방문한 그의 말에 따르면 폴간 평야의 전투로 가주를 잃은 블로사 가문이 티히트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고 합니다.
하여 티히트라는 이런 블로사 가문의 처분을 위해 리케니엔에 지원을 요청한 상태이지만,
아직 그만한 외교를 수용할 만큼 끈끈한 유대를 쌓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이 크레비디가 한시적 거절을 한 상황입니다.
이 부분 역시 영주님께서 따로 용단을 내리신다면 리케니엔의 모두가 이에 따를 것입니다.
최근 이곳 밤하늘엔 은색 별 하나가 유독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영주님이 계셨다면 아마 그 별의 이름을 알려주셨을 테지요.
그럼 이만 글을 줄이고 영주님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바돈 앵킬로 올림
장문의 편지를 쭉 읽어내려가는 내내, 왠지 모르게 바돈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만 같다.
이제 나는 묵묵히,
깃털 팬을 휘휘 저으며 이에 대한 답장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
그 중원에서도 서쪽 땅 빌비온.
그런 빌비온 안에서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서쪽 부근의 땅,
리케니엔.
그곳은 이제 막 저무는 석양에 온통 황금빛으로 젖어있었다.
세라 앵킬로는 영주의 새로운 옷을 만들기 위해 한참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임시로 업무를 보게 된 바돈은 그 옆에서 테가 얇은 안경을 낀 채 서류를 살펴보고 있다.
“여보, 이거 어떤 것 같아요?”
세라는 흐뭇한 표정으로 은은한 빛을 뽐내는 자수를 바돈에게 보여주었다.
“화려하고 이쁘긴 한데…, 영주님 취향에 맞을진 모르겠네.”
세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냥 이쁘다고만 말해요!”
“세라, 영주님이 새색시도 아니고…,”
“언제 짝을 만나 결혼하실지도 모르잖아요?”
그녀의 말에 바돈은 일리를 느꼈는지 그럴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긴,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그 실은 뭔데 그렇게 스스로 빛이 나는 거야?”
“조합에서 새로 나온 신제품이에요, 새벽녘에 새어 나온 햇살을 한땀 한땀 추출해 염색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조합 애들은 참 별걸 다 만드네.”
“포개어진 손 조합 정도의 규모면 기업이라고 보는 게 맞겠죠.”
“아무튼 세라…, 너무 자수가 과한 것 같은데 조금은 줄이는 게 어때? 그럼 영주님께서 정말 좋아하실 거야.”
바돈이 조심스레 건넨 조언에,
세라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곤 자수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런 세라의 모습에,
바돈은 자기도 모르게 피어난 미소를 감추기 위해 들고 있던 서류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아마도 둘 사이에 자식이 있었다면,
딱 디안과 비슷한 또래였겠지.
선천적으로 불임인 세라에게 있어선 어쩌면, 모셨던 베나즈 가문의 후손이 제 자식처럼 느껴졌을지도.
이에 바돈은 내심 세라가 부러웠다.
그의 위치에서 디안 베나즈는 늘 우러러보며 모셔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계속 이어지나 싶더니,
바깥에서 웬 소란이 일어났다.
“바… 바돈님!”
말을 더듬는 걸 보면 숙맥인 할리가 틀림없다.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택 홀로 나선 바돈은 곧 차오르는 숨에 헐떡이고 있는 할리를 맞이했다.
“할리, 무슨 일인가!”
그의 물음에 할리는 헉헉거리면서 손가락으로 저택 바깥을 가리켰다.
“바… 밖에! 밖에!”
“왜! 무슨 일인데!”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는지 바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지만,
이윽고 이어지는 할리의 말에.
“새… 새가! 영주님께서 답장을!”
바돈은 얼른 맨발로 저택 바깥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런 바돈의 뒤로,
상의를 탈의한 채 이상한 자세로 바닥에 드러누워 자고 있던 기지어도 벌떡 일어나,
“뭐! 영주님께서 연락이 왔다고!”
“우… 우왁!”
놀라 자빠진 할리를 지나쳐 태연히 저택 바깥으로 절뚝절뚝 달려나간다.
그렇게 바돈이 팔을 내밀어 저택 주위에 둥글게 날아다니던 새를 불러들인 뒤,
나무통 안에 담긴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꺼내곤 도망치듯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바돈! 영주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뭐라 적혀있어!”
“기지어, 진정 좀 하게! 그리고 이 두루마리를 볼 수 있는 건 가신인 나뿐이라는 거 모르는가!”
이어 바돈은 기지어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옷은 왜 벗고 있는 건가?!”
“생각이 많으면 필연적으로 열이 발생하니 그것을 효과적으로 식혀줘야 하거든.”
“영주님 앞에선 은은한 귀인처럼 행동하더니, 이리 엉뚱한 기인이었을 줄이야!”
“원래 첫 만남엔 보기 좋은 허울을 뒤집어써야 하는 법이야, 그게 두 발 걷는 자들의 예의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 첫 만남의 관계가 성숙해지려면 상대방의 벗은 허울도 포용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일세.”
“또 이상한 연설 시작인가?! 어쨌든 내 영주님의 답장을 읽고 나서 자네에게 알려줄 테니 기다리게.”
“학술원에 대한 부분만 먼저 읽고 좀 알려주면 안 되나?”
가슴을 벅벅 긁으며 묻는 기지어에게,
바돈은 마지막이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기지어….”
“알겠네.”
기지어는 바닥에 널브러진 리넨 셔츠를 주워 입고는 태연히 저택 바깥으로 산책을 하듯 나가버렸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도망치는 것 같다.
“후.”
연거푸 이어진 소란에 정신이 쏙 빠져버린 바돈은 지친 얼굴로 그제야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펼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디안 베나즈에게서 나는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배어있다.
이윽고 드러난 글귀는 마치 은하수처럼 유려하기 짝이 없는, 아주 아름다운 필체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