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40화 (140/365)

140화. 그물과 작살 (8)

폴란 지빈

티히트라에서 차출되어 리케니엔의 행정 부관으로 임관된 그가 멍한 표정으로 거리 한가운데 서 있다.

그런 그의 앞에는,

교수형에 처한 범죄자가 효시 되어있었다.

이제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베나즈의 저택으로 달려가 곧바로 기지어를 찾는다.

“기지어님! 기지어님!”

그의 부름을 들은 기지어는 증축된 저택 별채에서 절뚝거리며 나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무슨 일인가?”

그 별채는 갖은 문서를 모아 분류하고 통합하는 행정소였다.

“영주님의 답신이 온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기지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폴란은 그의 옆에 다가가 눈썹을 찌푸리며 따지듯 되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흥의 시기에 심적으로 자유민을 억압하는 것은 큰 도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른다고요? 기지어님! 죄인의 효시는 기지어님의 안건이었습니다!”

“그걸 영주님께서 들어주신 거고.”

“허…,”

기지어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폴란에게 질문했다.

“폴란, 베나즈의 깃발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틀린 걸 바로 세우기 위해 다시 세워지려 하는 깃발이 아닙니까?”

“그래, 맞네.”

“말 그대로 ‘이상’이 아닙니까?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에서라면 더더욱.”

“그렇지.”

기지어의 즉답에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폴란에게, 기지어는 들고 있던 문서를 그에게 떠밀며 물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문제라는 건가?”

“우리는 기사의 땅에 배반자가 아니었음을 설득해야 하는 쪽입니다, 그런데 그런 설득으로 기반을 쌓아가야 하는 시기에…,”

“그놈의 설득을 자유민들에게까지 해야 할까?”

“…무 …슨?”

기지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배반자니 오명이니 관심이 없어, 폴란.”

“기지어님…!”

“그들은 자신을 지켜줄 그늘을 원할 뿐이네, 그 그늘이 정한 법칙 안에서 안전하길 원할 뿐이야. 그리고 오늘 중요한 법칙 하나가 이뤄짐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에게 안전을 약속했지.”

“약속이라구요?”

“무고한 타인을 죽이면 좆될 수 있다는 걸 우리가, 베나즈의 깃발이 증명해 줬다 이 말이야.”

낯빛이 창백하게 변한 폴란에게 기지어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대업을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계몽을 선도하고 싶은 건가? 만일 후자라면 신앙팔이 하는 조합 놈들에게 취직하는 게 좋겠군.”

“하지만…!”

“그래, 폴란. 자네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지.”

기지어는 잠시 말을 멈추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처럼 아름다운 이가 흘리듯 했던 말을 떠올리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탑을 쌓는다고 꼭대기부터 놓을 수는 없는 법이잖나?”

그 말에 폴란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끝에 가야만 대업이 아닐세. 꼭대기가 탑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는 것처럼.”

“…,제가 너무 조급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나도 자네처럼 조급한 것일지도 모르지, 영주님이 발휘하는 차분함을 생각하면 말이야.”

“영주님에 대해 더 아시는 게 있습니까? 저는 멀리서 바라본 것이 전부라 그리 아는 것이 없습니다.”

“너무 궁금해하진 말게, 영주님은 천성적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너무 깊어서 탈이니까.”

이윽고 기지어는 살짝 장난스러운 얼굴로 폴란을 꾸짖었다.

“그나저나, 지금 이렇게 팔자 좋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네!”

이에 폴란이 대번에 놀라며 큰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오늘은 문서 일부를 새로 신설될 학술원으로 옮겨야 하거든!”

“허! 드디어 리케니엔에도 지성이 만연하겠군요.”

“그래, 오늘 내로 우리 둘이서 그 문서들을 다 옮길 수만 있다면 말이지.”

폴란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진다.

“…,우리 둘이서 그걸 다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럼, 문서를 취급하는 사람이 우리 둘 말고 누가 더 있나? 지성도 육신의 고생이 없으면 빛바래질 뿐이야!”

절뚝절뚝,

기지어는 특유의 정력적인 모습으로 폴란을 지나쳐 앞장섰다.

* * *

“과연, 기사왕의 숨겨진 검이란 명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닌가 봐?”

잘 여민 검은 코트를 휘날리며 다가온 조이의 말에, 베르융은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전열 보병의 훈련은 거의 다 끝났어, 이제는 조이 자네가 저들을 진두지휘해서 진형을 꾸리기만 하면 돼.”

“궁병은 어떤가?”

“빌비온 서쪽 일대가 산악지대여서 그런지 자유민 대부분이 사냥을 업으로 살아왔더군, 따로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이미 그들은 명사수야.”

조이는 코트 자락을 거둔 채 베르융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저 병사들을 모두 다 양성시키다니.”

“그래 봤자 모두 합쳐 육십이 채 안 돼. 이번 훈련 과정에서 낙오자들이 많이 생겨버렸거든.”

베르융은 가늘게 뜬 눈으로 저 아래, 펼쳐진 광경을 유심히 살폈다.

거기엔 오와 열을 갖춘 채, 낙석 하는 바위처럼 단단한 기세로 병기를 휘두르는 병사들이 있었다.

이제 베르융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잠깐 거둔 채 다시 파이프를 입에 물며 운을 뗀다.

“조이, 티히트라에 관한 일은 어떻게 됐나? 영주님께서 답장을 보내시지 않았는가?”

“바돈이 말하기를, 영주님께선 블로사 가문 건에 대해 아직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야.”

“티히트라의 역량을 평가해보고 싶으신 거겠지.”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블로사 가문 건을 해결하고 다시 독립적인 행태를 취하면?”

베르융은 한 차례 입술을 움찔거리곤 말을 이었다.

“그들의 역량이 거기까지였음을 알게 된 거고.”

“티히트라의 영주 가본 내쉬 같은 부류는 외교적으로 접근해야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욱 쉽게 가질 수 있어.”

“우리가 그들에게서 외교적으로 무엇을 빼앗아야 하는 처지인가?”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조이의 말에 베르융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나즈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워질 깃발 근처에 역량 미달인 깃발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 전투로 굴종시키고 일방적인 외교로 수탈하는 방식은 우리와 맞지 않아.”

“에르엥님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지은 조이의 물음에,

베르융도 슬쩍 웃으며 답했다.

“그래, 에르엥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렇게 조이가 자리를 떠나자, 홀로 남은 베르융은 그를 따라 과거를 떠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불안한가, 조이. 똑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그러나 베르융은 병사들에게서 시선을 떼 허공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답했다.

“아니, 에르엥님의 희생 위에 다시 서게 될 기사왕의 이름은 디안 베나즈다. 그렇기에 같은 문제 앞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다. 애초에 조이, 네가 제일 그렇게 믿고 있잖나…,”

그렇지 않고서야,

조이가 제일 먼저 티히트라의 외교 건을 한시적으로 거부하고 나섰을 리가 없지.

그저 동지로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떠보기 위함이라는 걸 베르융은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이내 베르융은 가슴 속에 부풀어 오르던 설렘을 얼른 내뱉듯, 파이프로 태워 연기로 날려 보냈다.

아직은 설렘을 느낄 시기가 아니었으니까.

이 설렘은,

잠시 떠난 별이 다시 리케니엔의 하늘 위에 떴을 때를 위해 아껴둬야만 한다.

* * *

“여보, 왜 이렇게 신이 나셨어요?”

반나절 만에 대부분의 자수를 끝마친 세라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묻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바돈은 말없이 웃기만을 반복했다.

“영주님께서 답장으로 밀어라도 적어 보내셨나?”

“어허! 그런 말을 하면 쓰나!”

“킥킥, 그럼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건데요?”

세라가 요염한 웃음을 흘리며 침대로 다가오자 바돈은 대번에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침대 위에 눕혔다.

“세라, 영주님이 리케니엔을 떠난 날 이 모든 상황이 꿈처럼 느껴져 잠이 안 온다고 했었지?”

“맞아요, 그랬죠.”

“반대로 나는 이 모든 상황이 현실이기 때문에 잠이 안 올 것 같아. 영주님께서 보낸 답장을 받았을 때 완전히 실감되더군.”

바돈은 잠시 슬픔에 젖은 눈으로 고개를 틀었다.

“세라, 우리는 눈앞에서 베나즈 가문의 몰락을 생생히 지켜봤잖아. 얼마나 처절하게 무너졌는지…, 다 봤잖아.”

세라는 그런 바돈의 뺨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를 꿋꿋이 지키자고 했던 건 바돈 당신이에요,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 베나즈 가문이 남긴 결실이 찾아왔고요.”

“고맙소, 이런 나와 함께 해 줘서.”

“고마워요, 끝까지 고집을 부려줘서.”

이윽고 바돈은 세라의 입술을 거칠게 훔쳤다.

그러면서도 세라는 이에 밀리지 않고 순식간에 바돈의 상의를 풀어헤쳤다.

* * *

“어떠십니까? 자명종으로 찌르레기의 울음소리가 들어 있는 건 그 물건밖엔 없습니다!”

[도망치는 초침]

시계의 바늘을 이어 붙여 만든 간판 아래, 각기 다른 수많은 시계가 진열되어 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상인이 건넨 줄 시계를 살펴보았다.

이어 귀 큰 상인은 특유의 치솟은 광대를 실룩이며 내게 건넨 줄 시계를 도로 가져가 조작했는데,

조작과 동시에 다이얼 부분에 노출된 은빛 새 모양 부품이 갑자기 부리 짓을 하듯 움직이더니 곧이어,

찌르르르, 찌르르르.

정말 새 지저귀는 소리가 시계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시계의 이름은 뭡니까?”

“여름 옹이입니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이미 내 대답을 알고 있는 듯한, 노련한 상인의 물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얼마입니까?”

“금화 2개입니다. 양산형 물건이긴 하지만, 애석하게도 제품 자체가 굉장히 고가에 형성되어서요.”

금화 2개가 결코 만만치 않은 액수라는 건 알고 있는데,

일찍이 사치의 영역에서 느낄 수 있는 간극은 간접적으로 모조리 느껴본 터라 상대적으로 싸게 느껴지네.

어쨌든, 시계의 생김새가 내 마음에 쏙 들기도 했고 처음으로 물욕에 대한 감정도 느낀 탓에.

“좋습니다, 이걸로 하죠.”

상인에게 금화 두 개를 건네고 시계를 받았다.

곧이어 서둘러 허리띠에 시계 줄을 묶어 고정해보니까,

뒤집어쓴 어스름 사이로 흘러나온 은빛 시계가 허벅다리 위로 휘청이는 걸 보니 제법 멋있구나.

거리를 걸으며 자연스럽게 허리띠 아래로 흔들리는 시계를 붙잡아 뚜껑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 본다.

시간은 이제 하루의 끝을 향해 내달리는 저녁 7시.

그럼에도 론다이트의 거리는 햇살과 춤추는 벼락으로 화사하기만 하다.

혹시 몰라 다른 여러 정보를 캐낼 수 있을까 싶어 론다이트의 큰 거리로 나와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원정대로 보이는 수많은 인원이 중앙 광장에 몰려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것도 중앙 광장에서 항구로 통하는 길목이 유난히 막혀 있는 듯한 형태를 띠고 있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오늘은 완전 공 쳐버렸군. 하필이면 어스키만으로 향하는 항로에 폭우가 쏟아지다니.”

“이곳에서 최소 사흘은 꼼짝없이 붙들려 있게 생겼어.”

“탑이 또 지랄 맞은 변덕을 일삼는군.”

금방 원정대원들의 욕지거리 섞인 이야기를 흘려들을 수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많이 어그러지는 듯한 느낌이다.

원래대로라면 내일쯤 베빌리와 합류하여 곧바로 리케니엔의 서쪽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 과정에서 수반될 전투로 0의 힘을 제어해볼 계획까지 세웠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체될 줄은…,

────!

순간,

목 뒤를 할퀴듯 스쳐 지나간 감각에 온몸에 잠들어 있던 예민한 감각을 일깨웠다.

뒤쪽, 적어도 40보 이상 되는 거리.

누군가 노골적으로 내 감각을 건드렸다.

이전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존재감으로 미루어볼 때, 상대는 적어도 원할 때 자신의 기척을 완벽히 감출 수 있는 실력자임이 분명하다.

굳이 이 시점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걸 보면,

꽤 오래전부터 나를 미행해왔다는 건데.

그 의도가 어찌 되었든, 유순하게 반응할 수는 없기에.

그대로 살기를 드러낸 채 걸음을 옮기자, 내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는 기다렸다는 듯 맞춰서 걷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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