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그물과 작살 (9)
내게 기척을 흘린 상대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게 느껴진다.
그 말인즉슨 상대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날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덫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생면부지인 이곳 론다이트에서 내게 적개심을 가진 인물이 있을 리가 만무할뿐더러 그럴 이유 역시 없으니까.
그래, 상대는 그저 나를 따로 불러내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낮에도 빛 한 줌 들어올 것 같지 않은 골목에 들어서자, 곧 안쪽에서 희미한 등잔불이 밝혀졌다.
상대는 저곳에 있다.
아니, 상대는 예상과 달리 호롱불로 밝혀진 부분에 스스로 걸어와 본인의 정체를 드러냈다.
잿빛 머리카락, 백옥처럼 하얀 얼굴.
갸름한 턱 위로 맺힌 날카로운 이목구비.
아무리 많이 쳐봐도 내 또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남자.
그가 이내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귀하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미안합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맺어진 미소는 굉장히 소름 끼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얼굴로 빚은 익살은 그리 쉽게 미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는 에인츠 가문의 육남, 테론이라고 합니다.”
온몸에 절여져 있는 예절과 그로 인해 풍겨오는 기품을 보니 굉장한 깃발을 등에 업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에인츠라면 이미 여러 차례 들어본 기억이 있다.
가장 최근의 기억으론 포드에서 만났던 기사들과 함께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을 때,
그들은 내 검술을 보곤 에인츠의 이름을 거론하며 경악을 했었지.
이런 기억으로 미루어보자면, 에인츠는 보통 깃발과는 궤를 달리하는 가문이리라.
“베나즈 가문의 디안이라고 합니다.”
“이리 호의적으로 반응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테론은 재차 유려한 자태로 내게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이어서 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이런 직접적인 물음에 테론은 숙였던 고개를 슬쩍 들쳐 올리고는 조곤조곤 대답했다.
“론다이트에 당신만큼 강한 자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무례를 각오하고 귀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겠습니까.”
그의 감각은 내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예민해 보인다.
애초에 내게서 일방적으로 기척을 숨겼던 자니 그것과 관련된 능력으로는 저자가 나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이제 궁금해진다, 그가 나를 구태여 콕 찍어 불러낸 궁극적인 목적이.
“해서, 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 건지요.”
가슴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되묻자, 그는 얇은 눈썹을 치켜뜨며 내게 말했다.
“아마도 귀하께선 필시 론다이트와 어스키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폭우 때문에 곤란한 상황일 테지요.”
그런 것까지 알아낸 건가?
내 표정을 읽은 테론은 고개를 까딱이며 자신의 왼쪽 귀에 걸려 있는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귀걸이의 끝엔 아주 작은 소라껍데기 같은 것이 매달려 있다.
“홀로니의 탑에서 얻은 마법 걸린 물건입니다. 그래 봤자 귀하와 같은 분의 소리를 훔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귀하 근처에 있는 자들의 목소리라면 능히 훔쳐 들을 수 있지요.”
근처에 오가는 대화를 토대로 내가 취한 행동을 어렴풋이 예상했다는 거군.
주조사에게서 정보를 들을 때만 해도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마법이 걸린 물건이라는 거, 그 위력이 상당하구나.
“물론 이런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는 데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소리를 한 번 훔쳐 들으면 몇 분간은 왼쪽 귀의 청력을 잃어버리거든요.”
“그 몇 분간의 정적을 대가로 상대의 의중을 떠볼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가 아니겠습니까.”
내 반문에 테론은 점잖게 웃어 보였다.
“귀하의 말이 맞습니다.”
“각설하죠.”
더는 무의미한 말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테론은 내 태도에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여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 폭우, 제가 걷어드려 드리겠습니다.”
“가능합니까?”
“아가사르의 탑을 등반하여 얻은 계절의 기억이 제게 있습니다. 이것이라면 충분히 그 폭우를 잠재울 수 있을 겁니다.”
그는 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품 안에서 아주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그 안에 든 건 일반적인 날씨의 파편과는 다르게 푸른 기운이 감도는 액체였지만,
이따금 근처 호롱불의 불빛을 먹고는 눈 시린 은빛을 토해냈다.
그보다, 저 남자.
마법사의 탑을 얼마나 많이 오른 거지?
그 등반이란 걸 대체 몇 번이나 해야 저런 물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낼 수 있을까!
“조건은 어떻게 되는지요.”
일단은 그가 제시하는 것을 들었으니 그 대가로 뭘 원하는지까지는 들어봐야겠지.
“저는 지금 론다이트의 탑을 등반하고자 합니다, 그 등반길에 저와 동행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등반을 통해 무엇을 손에 넣고 싶으신 건지요.”
“론다이트의 탑 주인은 마법사 가운데서도 대단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존재입니다, 등반길에 준비해 둔 상품의 수도 어마어마하지요. 저는 그곳에서 어떤 증표를 찾고자 합니다.”
“정확히 어떤?”
“거기서부턴 에인츠 가문 내의 일이라 대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글쎄, 모르겠다.
나는 지금 미지의 영역으로 모험을 떠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폭우는 시간이 지나면 걷히게 될 테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저자의 제안은 그리 매력적이지가 않아.
이미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표정을 다 읽은 듯 보이는 테론은 묵묵히 내 선택을 기다리는 듯 보였다.
그래서 나는,
“유감이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딱 잘라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테론은 씁쓸한 표정으로 지을 뿐이다.
그러나 곧 그 표정은 의미심장한 것으로 바뀌어, 이제는 내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디안님, 지금 론다이트와 어스키만 사이에 내리는 폭우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일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만일 그 폭우가 론다이트의 탑 주인이 주도한 것이라면요?”
그는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절박함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 폭우가 그치지 않는다면요?”
“어째서 그런…,”
순간, 주조사가 말해주었던 정보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탑의 마법사가 제게 내기라도 걸어왔다는 말입니까?”
순례자를 운용할 필요가 없는, 방대한 영역을 관장하는 탑은 반대로 자신의 의지 일부를 담을 그릇을 원한다.
그래서 그런 그들을 이용해 탑 바깥의 세상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런 그들을 ‘마법사의 전서구’라 부른다.
내 말에 테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안님 정도 되는 그릇이라면, 마법사로서는 탐이 날수밖에 없지요,”
이어 그는 작심한 듯 결국 내게 숨긴 것을 털어놓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론다이트의 탑이 내기를 걸어오는 바람에 그 안에서 앞서 말한 증표를 찾아야 하는 신세지요.”
어떻게 보면, 순례자를 운용하는 탑보다 악질인 것 같은데.
그렇기에,
조금은 쓸데없는 호승심이 일어나기도 해.
마주한 내기를 보기 좋게 부숴버리고 싶다는, 그런 생각 말이야.
아무래도…,
“이곳은 길게 대화하기엔 그리 적합하지 못한 곳인 것 같군요.”
테론은 내 말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창백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디안님.”
* * *
내가 묵는 숙소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상당히 고급스러운 여관에 들어선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테론이 마법사의 탑을 왜 그렇게 많이 등반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건 에인츠 가문의 오래된 전통 때문이었다.
가문 내 적자들은 성인이 되면 인챈트가 주어지는데, 그 인챈트를 담을 물건을 구하는 건 오롯이 당사자의 몫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기업이나 조합 따위를 찾아가 그릇 삼을 물건을 제작해오는 건 같은 형제지간 내에서도 멸시받기 딱 좋은 행동이어서,
자신의 재량을 증명함과 동시에 근본적으로 강력한 마법이 걸린 물건을 쟁취할 수 있는 탑의 등반이 전통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셋째 형님이었습니다.”
살짝 취기가 오른 테론은 그 미형의 얼굴을 미역처럼 잘도 축 늘어트리며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셋째 형님이 탑의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마법사의 전서구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제가 사는 곳에선 그것을 ‘빙의자’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따금 깃든 마법사의 의지가 발현되어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테론은 고개를 푹 숙였다.
“첫째 형님이 셋째 형님을 찾아가 망설임 없이 베어버렸습니다.”
그의 참담한 얼굴을 보니 덩달아 내 마음도 무거워졌다.
“동시에 셋째 형님이 가지고 계셨던 인챈트도 그 행방이 묘연해져 버렸지요. 기본적인 그릇이 마법 걸린 물건이다 보니 아마도 탑의 상품으로 여기저기 팔려 다녔을 겁니다.”
“…,찾고자 하는 증표가 바로 그것이었군요.”
“어찌 아셨습니까? 혹시 제 귀걸이라도 몰래…,”
무겁게 치켜뜬 눈으로 부랴부랴 자신의 왼쪽 귀를 만지작거리던 테론은,
걸려 있는 귀걸이를 확인하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마법보다 취기가 더 무섭군요….”
“셋째 형님을 많이 좋아하셨나 봅니다.”
“굉장히 상냥하셨거든요, 형제 중에서도 가장 둔재인 저를 제일 많이 응원해주셨던…,”
“그런 그분을 위해 남은 것을 갈무리하고자 마음먹은 건 칭송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내 말에 테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울먹였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소…, 고맙소….”
탑에게 내기를 강요받을 걸 알았음에도, 그곳을 등반해 형님의 유품을 찾고자 하는 아우라니.
그런 마음이라면 내 감정이 감화된다 한들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 이제,
나아가야 하는 길에 이정표가 박혔으니, 그 이정표가 가리키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 * *
이른 아침, 이틀 정도 되는 숙박비를 일시에 지불한 나는 밖으로 나와 벤투스와 인사를 나눴다.
푸르릉.
내 손길에 먼저 머리를 내민 녀석은 자연스레 갈기를 흘려 쓰다듬을 곳을 지정해주었다.
까탈스러운 녀석 같으니.
“벤투스, 아마도 굉장한 곳을 다녀오게 될 것 같아.”
벤투스는 커다란 회색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며 뜨겁고 축축한 콧김을 내뿜었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맥레인이 이런 상황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도록 나를 만들어줬으니까.”
맥레인의 이름이 내 입에 걸린 걸 알았을까.
벤투스는 잠시 그리운 눈빛으로 내 입술을 바라보다가, 특유의 히죽거리는 표정으로 웃더니 콧등으로 내 볼을 밀어댔다.
“최소 사흘 뒤엔.”
슬슬 벤투스에게서 뒷걸음질 친 나는,
“너와 내가 리케니엔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을 거야.”
작게 손 인사를 한 뒤 벨트에 묶인 위 해머, 유스티아와 낡은 아밍소드를 고쳐 매고 자리를 나섰다.
약속된 장소로 나가자 이미 그곳엔 테론이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다.
“오셨습니까.”
“테론, 어제 서로 말 놓기로 한 거 잊었습니까?”
“취중 때의 저는 제가 아닙니다, 고로 그런 약속을 한 적도 없지요.”
내 말에 손사래를 치며 기겁을 하는 테론의 모습에,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테론은 자신의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잿빛 망토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망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금빛 손잡이를 아우르는 가드, 힐트가 인상적인 긴 길이의 세이버가 보였다.
“그럼, 출발할까요?”
작심한 듯 단단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테론에게,
나는 두르고 있던 어스름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담담히 답했다.
“출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