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그물과 작살 (10)
“무엇을 상상하시던 탑의 내부는 그 이상일 겁니다.”
론다이트 광장.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원정대들의 사이를 겨우 가로지르며 테론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등반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탑 내부는 마법사의 상상으로 구축된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요. 그러한 환경 가운데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면 자연히 다음 층으로 향하는 길이 열립니다.”
“그 과제라는 건…?”
“글쎄요, 특정한 괴물을 퇴치하는 것일 수도 있고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일 수도 있겠죠.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의외의 것을 통해 다음 층으로도 향할 수 있습니다.”
테론이 말하는 것은 죄다 추상적이어서 직접 마주해보지 않는 이상은 모르겠군.
“그렇게 해서 마법 걸린 물건이 포진된 특정 층을 통과하면 등반은 끝이 납니다.”
“끝이 난다는 게 탑 밖으로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네, 마법이 걸린 물품을 손에 넣으면 자연히 탑 밖으로 향하는 문이 열립니다. 물론 그럼에도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일부러 탑에 상주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맞습니다, 탑은 각층 마다 소사회를 이룰 정도로 그 세상이 정밀하게 구현되어 있지요. 비교적 규모가 작은 탑조차 가능했던 걸 보면 론다이트의 탑은 아예 또 다른 세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그런 세상에서 한 번이라도 군림의 맛을 보게 된 순간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겠죠.”
말만 들어도 상상 이상이다.
마법사는 정말 밤하늘에 뜬 별과 같은 존재라도 되는 건가?
현자가 왜 마법사들을 탑에 가둬놨는지 이제는 얼추 이해가 갈 정도야.
하지만 그렇게 새장 속의 새가 된 신세임에도,
이렇듯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니.
“그럼…, 마법사의 전서구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겁니까?”
“탑 내에서 죽음에 이르는 공격을 당하거나, 특정 상황에 굴복하기를 결정하면 그 존재는 마법사의 전서구가 됩니다.”
테론은 진지한 얼굴로 내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러니 탑 내부에 있는 짐승을 믿을지언정 두 발 걷는 자들을 절대로 믿지 마십시오.”
그것은 동시에 탑의 경험자로서 진심을 담아 말한 조언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걸음을 옮겨 론다이트 서쪽에 우뚝 솟아있는 탑으로 향했다.
탑으로 이어지는 길목엔 여러 상인이 그와 관련된 상품을 팔고 있었는데, 탑의 모습을 띤 사탕이라던가 그 모양이 음각되어있는 목검 따위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거리를 지나치면,
탑 주위에 있는 평지에 여러 두 발 걷는 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보인다.
탑을 향해 엎드려 기도를 드리는 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은 내심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었다.
만약 탑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았더라면, 저들 가운데 몇은 순례자가 되어 인챈트를 사냥하고 다녔겠지.
예배자들을 지나쳐 탑 바로 아래까지 도착하자 그곳에도 꽤 많은 이들이 서성이고 있는 게 보였다.
저들 역시 등반하기를 원하는 자들인가?
그보다, 높이가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탑은 그 폭이 생각보다 넓어 보이진 않았다.
과연 저만한 폭 안에 또 다른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상상이라는 가공할 만한 소재로 덧대어졌다는 걸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리라.
이윽고 테론은 탑 외벽에 다가가 그곳에 새겨져 있는 그림들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내게 말했다.
“디안님, 이쪽으로.”
그 부름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일일이 손으로 그림들을 짚어가며 말을 이어갔다.
“이 그림들이 보이십니까? 바로 이것으로 등반의 시작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같은 두 발 걷는 자를 찌르는 그림.
괴물의 아가리에 창대가 박혀있는 그림.
장성하게 솟아있는 나무 그림.
전부 다 의미심장한 것들투성이다.
“분명 첫 번째 그림은 같은 등반자를 살해하는 것이겠군요.”
“맞습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 자들끼리 임의의 장소에 모여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지요. 두 번째 그림은 괴물의 사냥으로, 나무 그림은 마법사가 구축한 환경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등반을 시작하는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 등반을 하든 상관은 없는 겁니까?”
“그렇죠, 어떤 그림을 선택해도 일단 통과하기만 하면 아마도 2층이라 불리는 탑의 소도시에 모두 모이게 될 겁니다. 제가 등반했던 탑들은 모두 다 그랬거든요.”
그래서 같은 두 발 걷는 자들을 믿지 말라고 했구나.
첫 등반으로 어떤 그림을 선택했는지 알 길이 없으니까.
“그럼, 시작은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슬슬 긴장감을 베어 물은 테론이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그의 물음에 나는 괴물이 그려진 그림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게 좋겠군요.”
내 눈짓을 따라 시선을 옮긴 테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나서야, 테론은 괴물이 그려진 그림에 손을 얹어 그것을 강하게 밀었다.
그그극-
돌 긁히는 소리와 함께 밀린 외벽 틈새 너머,
쏟아져나오는 빛.
동시에 먹먹해지는 오감.
그러나 이내 코에 내려앉은 향취는.
론다이트의 축축한 도시 냄새가 아닌, 숲이 껴안은 새벽의 차가운 그것이었다.
* * *
처음은 귀,
다음은 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곤두세워진 촉각.
하나둘 돌아오는 감각 속에서 제일 먼저 느껴지는 건 야밤에만 활동하는 맹금의 울음소리였다.
그런 울음소리를 반주 삼아 천천히 눈을 뜨자, 그 앞에 펼쳐진 것은 장대한 숲.
“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습니까, 상상 그 이상이지요?”
이윽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먹먹한 감각에서 막 헤어나온 듯 보이는 테론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평소 상상을 다루듯 행동하다간 큰일 납니다. 이곳은 누군가 구축했을 뿐이지 현실과 똑같으니까요.”
그는 곧바로 경계를 취하는 표정으로 품에 있던 세이버를 뽑아 들었다.
“혹시 디안님은 괴물을 상대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어지는 그의 물음에 나는 유스티아 자루 위에 손을 얹은 채 덤덤히 대답했다.
“딱 한 번, 숲의 읍소를 상대해본 적이 있습니다.”
“…네?”
테론은 어벙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깃발을 가지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이름난 원정대분이셨군요?”
“원정대라면 원정대겠죠.”
한 명뿐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없었으면 숲의 읍소를 이기긴 힘들었을 거다.
테론은 얼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끝내 내 오묘한 답을 수긍한 듯 혼자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면 제가 디안님의 뒤를 맡겠습니다, 괴물에 한해선 디안님이 몇 수는 저보다 위에 계시니까요.”
살짝 걸음을 물리는 테론의 움직임에 맞춰,
나는 기민하게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곧이어 이런 우리의 움직임에 맞춰, 저 멀리 한바탕 그림자로 범벅이 된 무언가가 재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테론, 11시 방향입니다.”
유스티아를 뽑아 단단히 고쳐잡고 움직임이 포착된 부분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상체를 기울이고 숨을 고른다.
이내,
내가 노려보고 있는 곳에서 밝은 점 두 개가 또렷이 빛났다.
분명 저건 놈의 눈빛이리라.
서로 몇 초간 눈을 마주쳤을까,
내 시선에서 호승심을 엿보았는지 몰라도, 그것은 곧바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르륵──!
깊은 동굴 속에서 돌을 굴리는 듯한 으르렁거림과 함께 그림자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늑대 머리에 검은 털을 뒤집어쓴 모습의 괴물이었다.
놈이 달려드는 그 순간에 몸을 최대한 숙인 나는 유스티아의 망치 끝에 달린 날카로운 정을 녀석의 배에 찔러 넣었다.
이어서 유스티아를 뒤로 크게 휘둘러 괴물을 매치듯 뒤로 던지자,
그 절묘한 순간에 테론의 세이버가 무방비하게 드러난 괴물의 목을 스쳤다.
한 번도 합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가히 기가 막힌 연계였다.
괴물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다가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 우리를 경계했다.
“디안님, 원정대셨다면 저 괴물이 뭔지도 잘 아시겠죠?!”
모르는데.
“괴물의 약점이 뭡니까?!”
나도 그게 궁금한 참이야.
“테론, 옵니다!”
괴물의 움직임에 맞춰 테론에게 주의를 두자, 그는 정말 신묘한 발재간으로 미끄러지듯 몸을 옆으로 비켜섬과 동시에.
그 몸에서 절묘하게 드러난 금빛 세이버가 빛을 내뿜으며 괴물의 옆구리를 베었다.
그렇게 타격을 입은 괴물이 허공에서 자세가 무너져 내려올 때,
나는 유스티아를 양손으로 거머쥔 채 놈의 턱주가리를 그대로 올려쳤다.
빡!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괴물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떨어진다.
괴물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약점은 머리입니다.”
아마도.
“역시…”
그걸 왜 또 감탄하고 있는 건지.
상황이 끝났음을 인지한 나와 테론은 자세를 물리고 숨을 골랐다.
이윽고 테론이 세이버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을 때.
“도와주세요! 제발…! 으아아!!”
저 멀리서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에 테론은,
“디안님, 다음 층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따라오라는 듯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가자,
그곳엔 다리를 다쳐 피 흘리는 귀 큰 여성이 있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이곳에 괴물이…!”
“진정하십시오, 괴물은 저희가 처리했습니다.”
테론은 익숙한 모습으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정말입니까?!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그녀의 얼굴엔 그 향기가 느껴질 정도의 진한 안도가 묻어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를 마을에 데려가 주실 수 있는지요…?”
그녀는 피 흘리는 다리를 바라보며 고통에 겨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부탁했다.
그제야,
테론이 했던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얼추 알 수 있었다.
등반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였군.
괴물을 처리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난 상황으로 다음 층으로 이동한다.
“테론, 같이 합시다.”
여인을 부축하려는 테론을 도와 그녀의 한쪽 어깨를 거들었다.
등반에 대해선 이제 어느 정도는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궁금한 것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 부축하고 있는 이 귀 큰 자는 정체가 무엇인지, 정말 바깥 현실의 두 발 걷는 자와 같은 자라면 왜 이 안에서 이런 일을 하는지.
아직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산더미야.
* * *
버려진 마차를 이용해 여인을 싣고 굽이진 길을 따라 쭉 이동하기를 한참.
마지막 언덕길을 오른 끝에 우리는 규모가 꽤 큰 마을을 마주할 수 있었다.
테론은 그 마을을 가리켜,
“저곳이 바로 이 탑의 2층이 되겠군요, 확실히 다른 탑에 비해 그 규모가 상당합니다.”
내가 어느 정도 이해한 것을 확인사살 시켜 주었다.
여인을 마을에 데려다주자, 그녀의 부모는 우리에게 처음 보는 금화 두 개를 보상으로 건네주었다.
테론은 그것이 탑 내에서 쓸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
“시작은 목표가 명백하게 드러난 그림을 고를 수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모르니 연속된 상황 속 선택에 신중하셔야 할 겁니다.”
“그럼 테론, 지금부터는 뭘 해야 합니까?”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마을에서 정보를 모으죠.”
“방금 그 여인과 부모는…,”
이어지는 내 질문의 저의를 단박에 파악한 테론이 대답했다.
“등반에 실패했으나, 동시에 마법사의 전서구가 될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탑의 환경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기억을 거세당한 채로요.”
“참으로 가혹하군요.”
“저들의 선택이기도 하죠, 스스로 탑에 들어와 등반하기를 자처한 자들이니까요. 그 실패에 대한 대가도 오롯이 저들의 몫인 겁니다. 이렇듯 선택이란 건 정말 무섭습니다. 그 선택 하나에 저희 셋째 형님도 돌아가셨으니까요.”
테론은 초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슬쩍 내리깔았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셋째 형님의 증거를 찾게 될 겁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 위로에 테론은,
다시 온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숙소부터 잡죠, 며칠은 묵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며칠이라고 했습니까?”
테론은 내 허리춤에 드러난 줄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마법사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니, 그 시간도 당사자의 조율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요. 가령 살아있는 자들의 시간은 그대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사물은 마법사의 법칙에 대부분 걸리기 마련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시계에서 단 한 번도 새 소리가 울리지 않았어.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담긴 시간을 보자,
하나,
둘,
셋.
마음속에서 셋을 새자 그제야 초침이 어색한 움직임으로 한번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