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그물과 작살 (11)
햇살을 들이부은 듯, 쨍한 거리를 품고 있는 마을은 바깥세상과 다를 바 없는 활기를 띠고 있었다.
피리 연주에 몰입한 노인, 겁 없이 달리기 시합을 하는 천진한 아이들.
바구니를 만드는 여인과 그 일을 돕는 소녀.
아마도,
저들은 테론이 말한 것과 같이 등반에 실패하여 이곳에 잔류하게 된 자들이겠지.
마법사가 구축한 탑 속 세상에서 기억을 잃은 채 새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역시나 두 발 걷는 자이기에 다시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고, 목적을 부여하며, 또 나아가길 반복하는 듯 보였다.
그런 마을의 풍경을 보니 대뜸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탑의 마법사였다면,
나는 세상을 접할 수 없으니, 세상이 나를 접할 수 있도록 할 것이리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탑 내에 이런 세상을 만들어 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면서도 바깥세상에 손이라도 뻗쳐보기 위해 등반자를 불러들이는 것을 보면,
도통 이해가 갈 것 같으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인 것 같구나.
마법사라는 존재는 말이야.
“이곳에 처음 온 것처럼 행동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한창 거리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뒤를 바짝 따르던 테론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거리에 있는 두 발 걷는 자들 가운덴 필시 등반자도 섞여 있기 마련이거든요.”
“이들 가운데 등반자가 있단 말입니까?”
“이곳은 엄연히 2층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형식상 1층의 통과자들이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죠.”
테론은 이어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등반자를 조심하십시오, 가능하면 암묵적인 적이라 생각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 말대로,
2층에 있는 동반자 중엔 필시 1층에서 같은 동반자를 살해하고 올라온 자들이 있을 테지.
“그렇기에, 지금 거리에 보이는 두 발 걷는 자들이 제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해도 경계하셔야 합니다. 개중엔 탑의 시간으로 수년, 아니 십 년을 넘게 체류한 등반자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그들이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이상 우리 쪽에서 먼저 등반자임을 가려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리 긴 시간을…?”
“어쩌다 보니 바깥세상보다 이 세상에서 이룬 것이 더 많아져 버린 거겠죠.”
다시 나갈 수 없을 만큼 잃을 것이 많아진 것이로군.
어쨌든 지금 시점에선 탑 내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테론의 조언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파악하는 게 좋겠어.
“디안님, 이쪽으로.”
테론의 안내를 따라 제법 규모가 큰 상점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서 유리구슬을 매만지고 있던 난쟁이가 우릴 반겼다.
“어서 오시구랴!”
특이한 방언을 쓰는 난쟁이의 인사에 자연스럽게 화답한 테론은 곧장 유리관으로 된 매대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보십시오, 상점에서 팔고 있는 게 뭔지.”
그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엔,
솔방울 모양의 한 손 메이스가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건 일반적인 무기 따위가 아니었다.
[95년, 락폴두드]
메이스 밑, 종이에 적혀있는 내용은 분명.
“인챈트가 아닙니까?”
“가격을 보시죠.”
재차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자 그 아래에 표기된 것은.
‘금화 8,000개’
분명 탑 내에 유통되는 화폐를 말하는 거겠지.
바깥세상이라면 말도 안 되는 헐값이었겠지만, 탑 내 화폐로 따지면 적정가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내 시선에서 이해를 엿보았는지, 테론은 담담히 설명을 이어갔다.
“탑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그림,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같은 두 발 걷는 자를 찌르는 그림.
괴물의 아가리에 창대가 박혀있는 그림.
장성하게 솟아있는 나무 그림.
아직 눈꺼풀 사이에 끼어 있는 햇살처럼 선명하게 기억나.
“나무 그림을 고른 등반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대부분 저런 것들입니다.”
“마법사가 구축한 환경에 도움을 주고…,”
“네, 그 대가로 주어지는 금화를 모아 마법이 걸린 물품을 구매한 뒤 탑에서 나가는 거죠.”
테론은 이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과정은 가장 안전하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방법입니다. 더군다나 목표에 다다르면 다다를수록 위험도도 점점 커지게 되지요.”
“위험도가 커진다니요?”
“아무래도…,”
테론은 자신의 작은 주머니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금화 8,000개를 수중에 들고 다니면 누구라도 알아차리게 될 테니까요.”
“결국엔 살해하는 자들의 표적이 되겠군요.”
그렇게 되면 그간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게 물거품이 됨과 동시에, 바로 마법사의 전서구가 될 신세가 되어 버리겠군.
초반에 보장받는 안전에 대한 대가를 후반부에 톡톡히 치르는 방식이네.
“그럼 테론, 이제 설명해주십시오.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통해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탑을 나갈 것인지.”
“1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테론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내게 즉답했다.
“저희는 괴물을 사냥할 겁니다.”
“그 방법으로 확실히 찾을 수 있는 겁니까? 형님의 증표 말입니다.”
이제 상점 밖을 나선 테론은 살짝 그림자 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일전에 올랐던 탑에서 등반자 하나와 목숨을 걸고 싸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 숙련된 등반가였죠.”
“그래서요?”
“증표에 대한 정보도 그때 얻었습니다, 놈이 말하더군요. 론다이트의 탑 8층에서 제가 찾던 것과 관련된 정보가 있었다고. 그것은 8층에 있는 괴물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그 정보를 콕 찍어 당신에게 설명해줬다는 겁니까?”
내 물음에 테론은 씩 웃으며 자신의 귀걸이와 품에 있는 유리병을 가리켰다.
“그놈은 저를 아주 오래전부터 노려왔었습니다. 제가 가진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님을 알고서요. 뭐…, 굳이 물건이 아니었어도 제 이름이 에인츠인 걸 안 이상 놈의 표적이 될 운명은 똑같았을 겁니다.”
그래, 에인츠 가문의 그 전통이란 걸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해서 이제 우리가 밟아야 하는 등산로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어차피 목표는 그 증표를 찾는 것.
그 외에 이곳에서 어떤 이유로든 더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고 간결하게 원하는 목표를 쟁취하고 마법사에게 보란 듯이 탑 밖으로 나가야 해.
“이런 마을이 존재하는 층은 시간이 지나면 다음 층에 해당하는 ‘공고’가 내려옵니다. 그것은 마을 증축이 될 수도 있고, 모종의 이유로 살해자임이 발각된 등반자의 체포가 될 수도 있으며…,”
“괴물의 토벌일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바로 그겁니다.”
이윽고 테론은 벨트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유리병을 내게 건넸다.
“이 물건은 지금 드리는 게 이치에 맞을 것 같네요. 그래야 등반길에 선뜻 따라주신 디안님의 신뢰를 보답할 수 있을 테니까요.”
* * *
테론과 함께 이곳 마을을 둘러본 결과,
몇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다.
공고는 특정한 다수의 장소에 개재된다는 것과,
그런 장소를 선점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것.
테론은 그것을 두고 무리 등반이라 일컬었다.
무리 등반이란 마치 괴물을 공략하는 원정대처럼, 탑 내에 알려진 핵심적인 물건을 쟁취하기 위해 사전에 만들어진 조직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나와 테론도 무리 등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분명 있다.
그들의 공략 대상에는 등반자들 역시 포함되어 있어, 기회만 주어진다면 주저하지 않고 악질을 부린다는 것이 그 차이였다.
하여 테론은 설명 끝에 간단한 결론을 덧붙여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지요.”
덕분에 테론과 따로 움직여 몇 시간을 찾아 헤맨 끝에서야 원하는 공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내가 등반자임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차린 자들 가운데 무리 등반하는 이가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미리 약속한 장소에 다시 모인 우리는 서로 얻은 공고를 맞교환하였다.
해서 내가 테론에게 받은 공고는,
[이끼 거두기]
요즘 북쪽 숲에서 온몸에 이끼가 돋아난 채 죽은 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레 밟힌 이끼가 복수심이라도 품었는지…,
현상만 포착했을 뿐 다른 사항은 최초목격자나 이 공고를 올리는 본인이나 아는 게 없으므로 수주자가 직접 처리해야 하지만 그에 따른 위험수당은 확실히 사례함.
-벌목꾼 댄
이러했다.
그리고 내가 테론에게 건넨 공고는.
[바탄의 악마]
이 신성모독자와 같은 쓰레기 새끼를 처단해 주시오!
서쪽, 간이 교역소에서 이번 달에만 죽은 처녀가 다섯이나 되니 피해자들의 연인이었던 사내들의 절규가 끊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소.
사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피해자 모두 동공이 녹은 것을 보아 예사 사건이 아님은 틀림없으니 이를 해결해 준다면 후하게 보상을 한다 약속하겠소.
다만 이 개 같은 놈의 면상을 확인하고 싶으니 표적의 트로피를 꼭 내게 가져와 주시오.
-바탄 교역소장 울레이즈
그가 금방 두 눈을 반짝일 정도로 흥미를 보였다.
“디안님, 용케도 이런 걸 가져오셨군요.”
“다만 등반에 능숙하지 않아 누군가에게 제가 등반자라는 걸 들켰을지도 모릅니다.”
테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다가와 공고에 적힌 내용 중 일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이십니까? 공고를 내린 자가 한 지역의 장입니다. 보통 한 지역의 장이 내건 공고는 그 난이도가 상당하지만 동시에 보상은 확실하지요.”
“이를테면?”
“마법이 걸린 물건.”
“그럼 일단 탑을 나갈 수 있는 열쇠는 쥐게 되는 거군요.”
“그렇지요.”
“확보합시다.”
“다만…, 확실히 위험부담이 큰 건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과감함을 부려 부딪쳐볼 기회를 얻을 수도 있는 거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단연,
눈앞에 테론 에인츠 조차 눈길을 주지 않는 낡은 아밍소드 때문이다.
직감컨대, 이런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부딪치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인챈트를 결코 다룰 수 없다.
리케니엔으로 돌아왔을 때는 적어도 기지어와 한 약속 일부라도 지켜가야지 않겠어?
또 베빌리와 함께 리케니엔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곧바로 서쪽 숲에 만연한 괴물의 토벌을 시작하게 될 거다.
발기지르와 켄타나의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촉박함 속에서, 정작 내게 속도를 낼 수단이 없다면 그건.
베나즈의 이름으로선 직무유기에 가까우리라.
“테론, 그래서 더더욱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당장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있잖아.
“디안님 말씀이 맞습니다.”
테론은 자신의 세이버 자루 위에 손을 얹은 채 작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금화 두 개로 말 두 마리를 사서 방금 출발했습니다.”
귀 뒤, 심어놓은 작은 산 위에 얹어진 손가락 두 개.
그것은 귀 큰 자들이 만든 물건으로 같은 작은 산을 심은 자끼리 은밀한 메아리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막, 마을 어귀에서 밀짚모자를 눌러 쓴 채 앉아 있던 남자가 나지막이 메아리를 내는 참이었다.
“당장 확인이 된 것은 잿빛 놈의 금색 세이버와 검은 후드 놈의 무늬 들어간 워 해머 정도입니다.”
건너편 어디선가, 자신에게만 들려오는 메아리를 경청하던 남자는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작게 속삭였다.
“예, 일단 그 두 물건은 멀리서 봐도 명품급인 건 확실합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일단 추적만 해보겠습니다.”
이제 밀짚모자를 슬쩍 치켜세워 얼굴을 드러낸 남자는 꺼벙한 표정으로 주위를 쭉 훑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곳곳에 은밀하게 상주하고 있던 자들이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다.
귀 뒤에서 손가락을 뗀 남자는 이제 불현듯 나타난 무리에게 담담하게 명령했다.
“실력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으니 거리를 두고 천천히 놈들을 추적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 금세 밀짚모자를 쓴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