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그물과 작살 (13)
“말씀하신 장소가 바로 이곳이로군요.”
테론은 세이버 자루 위에 한쪽 팔을 얹은 채, 거멓게 그을린 저택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저택의 규모를 보아하니 탑 내에서도 알아줄 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가문이었나 봅니다.”
“지금에 와선 그 모든 게 무색해졌지요.”
그는 내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결국엔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두 발 걷는 자는 두 발 걷는 자인가 봅니다. 이런 군상의 흔적을 보면요.”
테론의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저택 뒤쪽으로 향하는 길로 고갯짓을 이어간 나는,
“따라오시죠, 테론. 제가 말씀드린 것은 저택 뒤쪽에 있습니다.”
테론을 끌고 저택 뒤뜰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협소한 밀실 앞에서,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곤 마주한 광경을 이 잡듯 샅샅이 살폈다.
“저 백골이…,”
“네, 테론. 아베롯 가문의 근친아 일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어서 그는 의문을 품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밀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그릇더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에게 음식을 준 흔적이 있는 겁니까? 보관소에 있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거의 악마 취급을 받았었을 텐데요.”
“아마도…,”
가정을 해보자면.
“명분을 얻기 위해서일 겁니다.”
“명분이라니요?”
테론이 두 눈을 번쩍인다.
“테론, 아까 말씀하셨지요. 저택의 규모만 봐도 그 영향력이 탑 내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대단한 가문이라고.”
“…,맞습니다. 저 정도 저택이라면 바깥세상에선 최소 변경백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규모죠.”
“그럼, 저 정도 규모의 저택을 가진 아베롯 가문은 가진 재산도 많았겠지요?”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테론은 곧이어 시선을 내 입에 고정했다.
“그에게 음식을 준 이는 아베롯 가문의 재산을 노렸을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해서 저 근친아가 보기 좋은 명분이 되었군요. 하긴, 이 정도 되는 가문이 고작 근친상간 때문에 멸문이 되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요.”
“네, 악마의 존재로 선동시킨 뒤 대중에게 그와 관련해 조금이라도 증명할 수 있다면.”
테론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예컨대 굶주려 죽을 시간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살아 있는 모습을 본다면…,”
“맞습니다, 테론. 소수의 굳은 믿음은 다수에게 전염병처럼 퍼졌을 테지요.”
“굉장히 설득력 있는 추론입니다.”
그는 손뼉을 치며 수긍의 표정을 지었다.
“디안님! 그럼 근친아에게 음식을 준 자가 바로 이 사건의 주모자라는 소린데…,”
“저희로서는 알 길이 없지요. 설령 알아낸다 해도 이 이상의 진전은 외부의 적을 늘릴 행위일 뿐입니다.”
다소 냉정한 내 모습에 테론은 의외라는 듯,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그러한 의견에 강한 동조를 내비쳤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를 악마 취급한 덕분에 그를 위시한 괴물이 탄생했으니까요.”
“업보가 무서운 이유는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무의미한 희생을 줄여야 하는 것은 맞으니…, 이제 끝맺음을 지읍시다.”
* * *
밀실에서 죽어간 근친아는 괴물의 매개다.
밀실에서 그가 받아 왔을 멸시의 시선들은 매개 발현에 아주 강력한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그 ‘시선’이 바로 이번 사냥의 맹점이리라.
그럼 이제 그 괴물을 어떻게 끌어들여야 하는가?
매튜 아저씨, 그리고 케니와 함께 물리쳤던 디글렛을 떠올려 보자.
디글렛은 물욕이 형상화된 괴물이다.
디글렛이 두 발 걷는 자의 꿈속을 은닉처로 삼을 수 있었던 건, 물욕 자체가 두 발 걷는 자들의 심중 심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디글렛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당연히 놈의 근원인 물욕을 이용해야만 했어.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괴물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역시 그 괴물의 유력한 근원인 시선을 이용해야겠지.
“디안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테론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이어진 내 끄덕임에 덩달아 고개를 맞춰 끄덕인 테론은 성큼성큼, 밀실 안으로 들어가 그 문을 닫았다.
이제,
나는 밀실 앞에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밀실을 향해 냉담을 담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연히 나부끼는 바람 속엔 어느샌가 스산함이 짙게 묻어나기 시작하고,
햇살에 드리운 그림자는 바닥에 박힌 땅거미처럼 짙어져 갔다.
내 그림자마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찰나.
스스스──
마치 뱀이 날름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뒤쪽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요란한 한기에 살갗에 잠들어 있던 모든 감각을 일거에 깨워야만 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괴물이 우리에게 이끌렸다고.
다만 섣불리 움직일 순 없었다.
아직 놈에 대해 전부를 파악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저 괴물에게 당한 피해자는 특별한 외상없이 동공만이 녹아 죽었다.
그렇다면 숲의 읍소와 같은 강력한 물리력을 발휘하는 쪽과는 거리가 멀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동시에 어스름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무시무시한 능력을 선보였던, 숲의 읍소가 가진 단편적인 능력을 저 괴물은 주력으로 삼고 있을 것이다.
하면,
놈이 능력을 발휘할 여지를 이쪽에서 원천봉쇄하면 될 일.
나는 조용히 소맷단을 찢어 두 눈을 질끈 묶어 가렸다.
동시에 밀실 안쪽에서 동요한 듯 덜그럭거리며 움직이는 테론이 느껴져,
그를 향해 말없이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러자 그는 애써 동요를 참은 채 바깥 상황을 주시하는 듯, 이내 잠잠해진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스티아를 뽑아 든 나는 그 안에 내재 되어있는,
토르킨 선생께서 한 땀 한 땀 수놓은 벼락을 내 몸속에 내리치게 했다.
가진 0과 비교하면 유스티아의 벼락은 유순하게 느껴질 정도였기에, 나는 내 모든 근육을 옥죄어 오는 벼락의 찌릿함을 무리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
이제 내 다리는 절벽을 오르는 짐승의 다릿심을 품었고,
두 팔은 바위를 내던진 산처럼 유스티아를 낙석시킬 준비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준비를 알아차린 괴물의 움직임이 내 감각의 영역 속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이미 벼락을 품은 내 몸은 전신에 흐르는 감각과 거의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팍!
굳세게 휘두른 유스티아로부터 터져 나간 바람결이 내 뺨을 때린다.
보이진 않지만 유스티아의 타격점을 중심으로 바람이 허옇게 질려 터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렇다 할 타격감은 느끼지 않았어.
부스럭.
이어지는 작은 소리에 즉답하듯 반응한 나는 유스티아를 크게 위에서 아래로 휘젓듯 내리쳤다.
팍!
내리친 유스티아에 터져 나간 토사가 내 발목을 때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괴물에겐 유효한 타격을 입히진 못한 듯하다.
쉬싯──
잠시 후, 근처에서 날렵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스럭부스럭─
놈의 움직임.
어째 놈의 움직임이 점점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테론!”
괴물이 다른 시선에 이끌린 것이라면,
그건 분명 테론일 것이기에.
나는 황급히 그를 부름과 동시에 밀실이 있는 방향을 향해 본능적으로 달려나갔다.
* * *
무시무시한 감각이다.
꽤 강력해 보이는 벼락을 몸에 품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감각에 기대 움직일 수 있다니.
본디 벼락을 몸에 품으면 감각보다 육신의 능력이 앞서 감각이 육신의 움직임을 뒤따르는 기현상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아이베리아의 서쪽 땅에선 벼락을 품은 기사를 ‘광전사’라 부르겠는가?
그런데 저 완성도 높은 벼락을 품었음에도,
아직 그의 감각은 육신보다 한참이나 앞서있다.
바꿔 말하면,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광전사의 그것과 같은 휘몰아침을 행할 수 있다는 소리인데.
말 자체에 모순이 느껴질 정도로…,
그 경지가 모순에 가깝구나.
대단한 사람이야.
그러고 보니, 베나즈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들었던 이름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가 발휘하는 감각은 마치 둘째 형님과 같구나.
넋을 잃고서 괴물을 상대하는 그의 모습에 빠져 있던 나는, 아주 뒤늦게.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뒤틀린 살덩이들이 서로 엉겨 붙은 모습을 한 괴물의 얼굴 부분이 어느샌가 정확히 나를 향한 것이다.
내 넋 놓은 시선이 그의 관심을 유발한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두두두두.
묵직한 뜀박질 소리가 이곳으로 향한다, 괴물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게 쇄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디안 베나즈가 바짝 쫓고 있는 듯,
“테론!”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이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밀실의 문을 박차고 나아가 부드럽게 연결된 하나의 동작으로 세이버를 뽑아 들었다.
이어 검 자루 끝을 반대편 어깨에 붙여 날 끝을 가로 세운 나는,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디안!”
협소한 이 공간에서만 할 수 있는 유일의 검술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으니…,
부디 당신의 감각으로 내 공격에 연계해 주시기를!
[에인츠 스파타 3장]
아버지께 배운 가문 검술의 토대에.
[23년, 글라시스]
[겨울이란 계절이 벼린 송곳]
세이버에 잠들어 있던 인챈트를 일깨워 끔찍한 한기를 도신에 발현시켰다.
* * *
왼쪽 이마가 본능적으로 꿈틀거린다.
예민한 감각 가운데 오른쪽 어깨에선 이질적인 한기가 느껴졌다.
테론이 인챈트의 힘을 발휘했구나.
그 힘이 발현되는 방식은 아마도 국소부위를 노린 찌르기.
벼락으로 더욱 예민해져 버린 내 감각이 초 단위 안에 내놓은 결론이었다.
반사적으로 괴물의 지척에 다가가기 무섭게 허리를 뒤로 눕힌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유스티아를 힘껏 올려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파악!
폭력적인 바람 소리와 함께 내 전신을 한바탕 쓸고 지나간 한기.
뒤이어 안면에 몇 방울 떨어진 뜨거운 무언가.
이것은 괴물의 피일 것이다.
그렇게 테론의 공격에 괴물이 뒤로 크게 휘청이는 것을 느낀 나는, 녀석의 머리 부분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뻐억!
둔탁한 타격감이 손목뼈를 일순간 저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진득하게 이어지는 침묵,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불러본다.
“테론.”
그러자 저 앞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저 여기 있습니다. 끝난 걸까요?”
나는 짙게 배어 나온 안도를 씹고서 안대를 풀어헤쳤다.
그렇게 드러난 눈앞에 광경은,
조용히 드러누워 있는 기묘한 살덩이와 그 너머, 꽤 불안해 보이는 테론의 모습이었다.
“테론?”
“디안님, 괜찮으십니까? 찌르기에 같이 휩쓸리신 건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테론.., 당신의 허리가….”
테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피가 배어 나온 옆구리를 손으로 움켜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의 가슴께를 관통시켰을 그 찰나에, 그 몸부림까진 막지 못했습니다. 모두 다 평시에 갑옷을 입고 활동했었던 저의 무지에서 비롯된 불찰이지요.”
“어서 가서 치료를 받읍시다.”
“얕은 상처라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테론은 조용히 바닥에 널브러진 살덩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끝났군요.”
“네, 끝났습니다.”
모호했던 신뢰가 확실시되는 그 순간.
우리는 마치 아이베리아에서 마주친 두 기사처럼 서로를 보며 신의를 담은 미소를 나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