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그물과 작살 (15)
원래 이렇게 진료소가 조용했던가?
본디 교역소라면, 오랜 여정들이 맞물리는 곳일 진데.
그럼 필시 여정으로 얻은 질환들을 치료하기 위해 진료소에 두 발 걷는 자가 몰려 있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바탄 교역소의 진료소는 마치 의도적으로 비워진 것처럼 텅 비어있구나.
여기서부터 뭔가 잘못됨을 느낀 나는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게 자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서 긴 복도를 건너 곳곳에 비어있는 병실들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와라.”
확신할 수 있었다.
나와 디안 베나즈를 노리는 놈들이 있단 사실을.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곳곳에서 인기척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척은 끝끝내 내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영역 선에서 멈춰섰다.
이런 일련의 드러난 행동을 토대로 난 저들이 어떠한 자들인지 단번에 유추할 수 있었다.
분명 등반자들을 사냥하는 놈들이겠군.
어느 탑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비열한 짐승 놈들이지.
다만 역시 론다이트의 탑 규모에 걸맞게, 그 숙련도가 아득히 높은 것처럼 느껴진다.
거기다 숫자도 지금껏 마주한 무리보다 배는 많아.
결국엔 이곳은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가 아니었기에.
나는 눈먼 볼트 한 발에도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베리아에 만연한 그 명예라는 것이 기사에겐 가장 훌륭한 방패이지만,
명예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기사는 그저 허울뿐인 명칭일 뿐이야.
잠시 후, 벽 너머에서 날 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하겠습니까, 도련님? 가진 것을 순순히 내려놓고 안전히 탑을 나가시렵니까?”
가진 것을 모두 빼앗은 뒤 쓸모없는 마법물품 하나를 쥐어주고 탑 밖으로 내쫓아 주겠다 이건가?
제딴에는 내게 최선의 자비를 배푼 것이겠지만,
오히려 너희들이 내 자비를 바라야 할 것이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는 너희들이 더 잘 알텐데.”
“그래서 다른 대답을 듣고 싶어 이렇게 묻는 거잖아, 씨발 새끼야.”
멍청한 놈, 세 마디 이상으로 대화를 진전시키지 못할 만큼 머저리였군.
“오히려 나는 너희들에게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은걸.”
스릉─
가진 살기를 드러내며 세이버를 뽑아 든 나는 그들에게 경고하듯 이죽거렸다.
“제발 살려주세요 하는, 그런 말.”
그것이 신호탄이었을까.
쉭─
하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상체를 비틀자 아까까지 상체가 자리 잡고 있던 공간으로 수 발의 볼트가 날아들었다.
“… 큭.”
볼트를 피했지만, 지끈거리는 상처의 고통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최대한 빨리 해결하자.
거침없이 땅을 박차 앞으로 나아간 나는 내 발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장정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 *
“저것 봐라, 뼈째로 팔을 자를 정도면 명품이 맞지?”
싸움이 진행되는 장소로부터 먼발치 떨어져 있는 곳에서 호리호리한 귀 큰 자 하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옆에 애꾸눈을 한 인간 남성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맞장구쳤다.
“그래, 깊은 숲에서 만들어진 거로군. 저 검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겠어.”
“그런데 심지어 저 검에 인챈트까지 깃들어 있단 거잖아?”
“저거라면…, 충분히 바깥 세상에서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두 작자가 그렇게 중얼거림으로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는 데에 정신이 쏠려있을 때,
막 그들의 발밑으로 핏방울이 튀었다.
“… 어?”
그 광경을 지켜본 인간 남성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내 가을바람에 잎사귀가 떨어지듯 그 머리통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직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귀 큰 자는,
“뭐… 어?!”
당황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자 그 눈동자 안엔, 어느새 온몸에 피를 칠한 채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언제…?!”
분명 싸움은 먼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목표물에게 되려 목표가 되어 이렇게 빨리 당할 줄은.
팍!
귀 큰 자는 그렇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박제 당한 채로 단칼에 머리를 베였다.
* * *
테론은 세이버에 엉겨 붙은 지방과 핏방울을 한 차례 털어냈다.
벌써 그의 검으로 벤 적들의 숫자가 아홉에 달했다.
이는 심지어 인챈트의 힘을 발휘한 것도 아니었으리라.
단지 검술의 명가로 알려진 에인츠 가문 고유의 기술.
‘에인츠 스파타’의 절륜한 위력이 테론의 손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을 뿐이었다.
뒤이어 정면으로 달려드는 두 남자를 향해 테론은 고른 숨을 내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하나는 창, 다른 하나는 한 손 자귀.
그 둘의 무기로 제법 빈틈없는 연계를 선보였지만 그것은 테론에겐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의 세이버가 그리는 궤적이 상대에겐 빈틈 그 자체였기 때문에.
파박!
연속적인 피격음을 끝으로 세이버가 그린 궤적을 따라 두 장정이 무기째 양단되어 피를 쏟았다.
이어서 쉴새 없이 뒤에서 달려드는 사내를 향해, 테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이버를 역수로 들어 그의 가슴을 꿰었다.
그런데, 상대의 가슴을 꿰자마자.
퍽!
상대의 몸을 관통하고 들어온 볼트 끝이 테론의 등을 찔러 들어왔다.
그것은,
“검에 꿰이기도 전에 쏜 건가.”
아군이라는 개념이 없는,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 공격.
직후 이번엔 사방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통들이 날아들었다.
이에 테론은 곧바로 한쪽 팔로 입과 코를 틀어막아야만 했다.
극독은 아닐 것이다.
그는 금세 복도에 들어찬 검은 연기 안에서도 극도의 침착을 발휘하며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물건을 온전히 빼앗기 위해선 일단 그 전제 조건이 목표물의 생존이란 걸 테론,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검은 연기는 마비를 일으키는 신경독일 테지.
이제 검술만으론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인지한 테론은 망설임없이 세이버에 잠들어 있던 인챈트의 힘을 깨웠다.
[23년, 글라시스]
[겨울이란 계절이 벼린 송곳]
세이버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극악의 냉기.
그 서슬 퍼런 파장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다.
이내 그것은 공기 중에 흐르는 검은 연기를 째로 얼려버리는 기염을 토해냈다.
공기 중 일말의 수분 방울조차 결정화시킬 정도였으니 검은 연기가 퍼질 여지는 인챈트가 발휘된 시점부터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윽고 얼어붙은 연기를 깨트리며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온 테론은 자세를 다듬으며 잿빛 안광을 번뜩였다.
용의 시대, 그 무시무시한 한파의 재해는 지금 테론에 의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 * *
진료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작은 진찰실.
그곳에선 한바탕 진료실 내부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신기루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좀 더 품평을 해보시겠습니까? 아직 넷 정도는 더 쓸 수 있습니다.”
느긋한 남자의 목소리에,
드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만족감으로 흠뻑 젖어있다.
“서둘러 저 물건을 그에게서 인계받고 싶군.”
드롱의 말에 오른편에 서 있던 남자는 귀 뒤에 손가락 두 개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제대로 진행 시켜.”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 진찰실 안에 피어난 신기루는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기루는 진료소 외부에서 수십의 장정들이 막 몰려오는 장면을 보여주다가,
목표물과 대치하고 있던 자들이 미리 구비 해두었던 그물과 독 묻은 볼트를 준비하는 모습을 이어 보여주었다.
이후 귀 뒤에서 손가락을 뗀 남자는 드롱에게 허리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녀석들이 말하기를 목표가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답니다. 그렇다고 신경독을 낭비했다간 드롱님께 물건이 인계될 시점이 늦춰지게 될 테니 정공법으로 진행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래, 잘 했어.”
“잠시만요….”
남자는 잠시 귓전에 울리는 메아리를 포착하곤 드롱에게 양해를 구하는 듯 고개를 숙이며 귀 뒤에 손가락을 얹었다.
“드롱님, 놈의 일행이 눈치를 채고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전에 저놈을 먼저 해결하면 될 일이잖아?”
“…알겠습니다.”
드롱의 지시에 오른편의 남자는 재차 귀 뒤에 작은 산을 통해 강조하듯 메아리를 질렀다.
“서둘러라.”
* * *
“흐아아악!”
외마디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상대의 옆구리에 세이버를 박아 넣는다.
그러자,
“으…으이아아악..!”
기세 좋은 함성은 외마디 비명으로 뒤바뀐다.
옆구리에 박아 넣은 검 자루를 틀자 상대는 크게 두어 번 발작을 하곤 그대로 절명했다.
“허억…. 허억….”
슬슬,
힘에 부친다.
내 뒤쪽으론 그 자리에 선 채로 얼어붙어 동사한 자가 다섯이나 되었다.
그래, 이미 인챈트의 힘을 사방으로 한바탕 전개한 뒤다.
비록 강력한 인챈트라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숙련도가 그리 높지 않다면 하룻밤 중에 반짝이고 사라질 별과 다를 바 없지.
그래, 나는 지금 아침을 기다리는 별과 같은 신세다.
놈들은 작전을 바꿔 총력전으로 내게 덤벼들었다.
벌써 몇을 베었는가.
서른? 서른셋?
내게 갑주만 있었더라면, 아니 적어도 이 땅이 명예가 통용되는 곳이었더라면.
나는 최소한의 명예라도 누리며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커헉…!”
옆구리의 통증이 격통이 되어 상체 전반에 얼룩처럼 져버렸다.
동시에,
내 오른 팔뚝과 왼 종아리에 박힌 화살이 미치도록 뜨겁다.
그건 아마도 촉에 발린 독이 슬슬 제 효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셋째 형님.
미안하오.
나는 아직 이런 비열함에서 꿋꿋이 설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소.
그렇기에 형님이 남긴 유일한 것조차 쟁취하지 못한…,
못난 아우가 돼버렸소.
내가 첫째 형님처럼 강했더라면,
아니.
‘글라디움’이란 칭호를 가진 둘째 형님처럼 강했더라면.
이 탑 자체를 양단하여 그 안에서 셋째 형님의 증표를 쟁취하였을 텐데…!
시야가 어둑해진다.
세이버의 도신에 맺힌 한기가 물기가 되어 뚝뚝 방울져 흩어져간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 한쪽 무릎은 바닥에 닿아 있었다.
기회를 엿본 적들은 내 상태를 확인하곤 멀리서부터 늑대 무리와 같이 달려드는구나.
한 번 감긴 눈꺼풀을 겨우 떴을 땐.
적들이 내 몸에 엉겨 붙어 양팔을 억류한 뒤였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다 확인한 뒤에야.
내려앉은 눈꺼풀은 이내 내 의지를 벗어나 굳게 잠겼다.
* * *
피비린내.
낯선 얼음 냄새.
유독기가 느껴지는 매캐한 향.
…,
말끔하게 양단된 시체.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갈고리 달린 그물.
동상처럼 바닥에 선 채 얼어붙은 자들.
…,
볼트 자국.
한바탕 뒤엉킨 장정들의 흔적.
그리고.
피범벅 가운데 누군가가 무릎 꿇고 있던 자국.
그 앞에 멈춰선 나는.
잠시 베나즈의 깃발을 위해 머금었던 침착을 내려놓고.
열렬하게,
아주 열렬하게.
엄습하는 분노를 통감했다.
이제 그곳을 떠나 교역소장이 있는 저택으로 단번에 걸어간 나는 닫힌 접견실의 문을 발로 박차 부숴버리곤 안으로 들어섰다.
울레이즈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벌벌 떨며 내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물었다.
“말해.”
그러자 중력에 짓눌린 듯, 얼굴 근육이 심히 뒤틀린 울레이즈는 숨이 찬 듯 컥컥거리며 내게서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는지 오줌을 지린다.
“그들은… 드롱 갱단이라고 합니다…, 등반자 사냥꾼들이지요..”
“그들은 어디에 있지?”
“교역소 동쪽 관문…, 제분소에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