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그물과 작살 (17)
경과된 시간 속에 자연히 닿을 수 있었던 경지인지.
아니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촉발로 만들어진 결과인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분노는 깨달음의 단초가 되어주었고,
그로 인해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것뿐.
낡은 아밍소드를 뽑지 않아도, 그 자루를 손으로 직접 쥐지 않아도.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인챈트는 내 의지에 따라 숨겨왔던 실체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것은 하늘이 만들어낸 눈이었으며,
동시에 내게 주어진 새로운 감각 기관이기도 했다.
하늘의 눈 아래 펼쳐진 모든 장면이 내 두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생생히 느껴졌고,
더 나아가.
알겠다.
이것이 바로 군림의 인챈트라는 걸.
하여,
나는 이제 눈 아래 펼쳐진 것들 위에 군림하리라.
“지금부터 내가 이곳을 관제하겠다.”
* * *
오랜 시간 동안 등반자를 포식해 배를 불려온 드롱 갱단원들은 개개인이 인챈트로 무장하고 있을 정도로,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했었다.
그러나,
“씨발 이거 왜 이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데?”
지독히도 고요하게 개어버린 하늘 아래서.
그들 가운데 가진 인챈트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 겪어봤을 것이다.
0의 재해가 강요하는 압도적인 관제를.
탑 내 세상에서 무법으로 살아가던 자들에게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 새겨진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
그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들 중 가장 먼저 상황을 직시한 자는,
화려한 액세서리를 온몸에 두르고 있던 난쟁이 드롱이었다.
“정신 차려라! 상대는 하나다, 어쨌든 심장에 볼트 하나만 박혀도 죽는다고!”
거친 목소리로 모두에게 소리치자, 그제야 몇몇이 덩달아 작심하고 무기를 뽑거나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사람을 상대로 빈틈없는 대립각을 만들어낸 드롱 갱단원들은 이제 두목의 말만을 기다리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그 대립각을 깬 것은.
오히려 맞은편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없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에 맞춰,
문자 그대로.
비교적 그와 가까운 위치에 포진해 있던 갱단원들이 위에서 떨어지는 무언가에 의해 압착이라도 된 듯.
퍽!
퍼벅!
이질적인 모습으로 짓눌려 터져버렸다.
이윽고 그 장면 직후,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낀 그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급히 도망을 치기 위해 물러났으나.
맞은 편 남자는 그에 맞춰 그저 제분소를 향해 천천히 걸어나가 그들을 차례로 터트려 나갈 뿐이었다.
“으… 으아아악!”
“비켜 씨발! 비키라고!”
바람 소리조차 없는, 지독의 고요 속을 가득 채우는 처절한 아우성.
그 뒤로.
팍!
파박!
정말 이질적이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는 파괴음.
그리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핏자국.
당연하게도 최후방인 제분소의 외벽까지 도망친 드롱은 펼쳐지는 모든 장면을 목격한 끝에,
지척까지 다가온 남자를 향해 넙죽 절을 올렸다.
“이제부턴 그대가 이곳의 왕이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호소하는 드롱의 말에, 남자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에 드롱이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으려고 고개를 드는 찰나.
퍽!
드롱의 머리가 터져버렸다.
이제 남자는 묵묵히 제분소 계단을 올라 2층을 향했다.
남자가 느끼고 있는 분노의 결정적 기원이 된 2층엔, 왠 덩치 큰 사내가 테론 에인츠를 인질로 붙잡고 있었다.
“다… 다가오면 놈의 목을 긋겠다…!”
딱 보아도 약에 흠뻑 취해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테론의 뒤로, 그 목에 칼을 들이댄 채 질린 얼굴로 위협을 하는 사내.
그는 테론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노… 놈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인질이 휘말릴 수도 있잖아? 그렇지?!”
이에 밤하늘을 품은 듯한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마치 무언가를 재는 듯이.
그러한 행동에 더더욱 두려움에 질려버린 남자는 테론의 목에 검 끝을 찔렀다.
그러자 테론의 목에서 피가 주르륵 새어 나온다.
“살리고 싶다면 물러서. 네가 완전히 떠나면 그때 인질을 진료소에 보내겠다. 안심해, 너 같은 괴물에게 거짓말을 치를 정도로 난 멍청한 놈이 아니니까…!”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밤하늘 같은 사내는 묵묵히 한쪽 발을 뒤로 물렸으니까.
탈출의 물꼬가 트였다.
이렇게 생각한 사내가 재차 위협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발을 뒤로 물렸던 남자는 그것을 축으로 쏜살과 같이 튀어 나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절묘한 검술로 사내의 목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떨어진 사내의 목, 그 두 눈 속엔 아직 한쪽 발을 뒤로 물린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제 지지할 곳을 잃은 테론이 그대로 뒤로 쓰러지려 하는 것을 남자는 조용히 받쳐 든 채.
제분소를 빠져나갔다.
* * *
진료소를 막 빠져나온 나는 조용히 근처 돌무더기에 기대앉아 정비를 위해 낡은 아밍소드를 뽑았다.
그런데,
검엔 피 한 방울조차 묻어있지 않았다.
그제야 뒤늦게 내 양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 떨림은 아마도,
0, 마그나베노스를 품었던 그 순간의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분노라는 감정이 가진, 주체할 수 없는 폭발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맥레인이 내게 말했지.
나 자신을 잃지 말라고.
그래서 두려웠다.
동시에 분노라는 건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단서였다는 걸 지금 막 깨우치게 되었으니까.
그래, 이제야 알겠어.
그때 라티아에 나타난 그 소용돌이는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결과였다는 걸.
그리고 그 대가로…,
한참이 지나고 양손의 떨림이 멈추고 나서야,
나는 낡은 검을 검집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테론의 상태는 생각보다 위독했다.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치사량의 약물이 주입되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란다.
그의 생사는 오늘 밤 고비를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도 했다.
부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어나기를.
테론.
흩어진 감정을 갈무리한 뒤 그것을 침착함에 폭 담가놓은 채 자리를 뜬 나는 정처 없이 마을 거리를 거닐었다.
이곳 두 발 걷는 자들은 방금 제분소에서 일어난 기상 현상에 대해 정신없이 떠들고 있었다.
그 중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용기 내어 제분소에 다녀온 자들까지 더러 있어서,
그들의 생생하고 끔찍한 증언들이 허언과 더해져 이야기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진료소의 일 때문에 가뜩이나 불안에 떨고 있던 몇 대중들은 교역소장의 저택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신을 믿는 자들은 거리로 나와 기도를 했지만, 되려 하늘에 박제되듯 새겨진 균열을 보고 울부짖었다.
그 말대로.
제분소 위로 마그나베노스의 눈이 떠진 이후, 탑 내 세상의 하늘은 큰 균열 하나가 생겨버렸다.
그래서 혹시나 이곳이 만들어진 세상이었음을 주민들이 깨닫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지만.
아니,
세상이 만들어진 가짜일지언정, 두 발 걷는 자는 진짜였기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늦은 저녁.
교역소장 울레이즈는 내가 가져다준 괴물의 트로피를 이용해 대중을 진정시켰다.
그것을 제시하며 인근 모든 기현상의 원인은 이것 때문이었으며 이제 다 끝이 났다 선포한 것이다.
그 선포는 불거진 교역소 주민들의 불안을 줄이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하루 끝에 걸쳐진 교역소는 차분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곳에서 허름하고 조용한 여관을 골라 들어간 나는 외진 창가 자리에 앉아,
여관 주인이 건네준 과일주를 받아들고 테론이 고비를 넘기길 기다렸다.
그때.
여관 대문이 열리고 그 너머로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온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구태여 나와 가까운 자리를 골라 앉고는 태연히 헐렁한 소매를 정돈했다.
곧이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여관 주인이 그에게 과일주를 건네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
귀 뒤로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틀어 뒤를 바라보자.
미상의 손님에게 다가가던 여관 주인이 마치 밀랍처럼 그대로 굳어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눈으로 허리춤에 있는 줄 시계를 열어보자,
시계는 정지되어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 당신을 위해 시간을 좀 멈춰야 했소.”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완전히 돌리자, 미상의 손님이 막 후드를 벗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말끔한 민머리에, 수염까지 정돈한 초로의 그 남자는.
유려한 몸동작으로 내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안녕하시오?”
그의 인사에 나는 시계 뚜껑을 닫은 뒤 물었다.
“아마도 당신은…,”
“네, 이 탑의 주인인 비르겐트 오르마라고 합니다.”
유쾌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잔을 조심스레 내밀어 보였다.
“건배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습니다.”
단호한 내 대답에 비르겐트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혹시 몰라 들고 있던 과일주도 얼른 내려놓자 비르겐트는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더군다나 저라는 존재가 그리 반갑지도 않게 느껴지실 테죠.”
“이유가 뭡니까?”
“아,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비르겐트는 민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말투로 운을 뗐다.
“혹시 이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제법 말끔한 인상을 골랐습니다만, 원한다면 이성의 모습으로 바꿔올 수도 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간다고 해놓고, 왜 또 에둘러 가려는 겁니까.”
“마법사의 천성이 이렇습니다. 탑에 갇혀 지내는 신세이기에 성격이 많이 파탄 나버렸거든요. 마치 용의 시대에 만연한 변덕스러운 날씨처럼요! 아 지금은 우리 마법사가 그 날씨였군요! 하하!”
무표정한 얼굴로 비르겐트를 바라보자 그는 곧 아랫입술을 삼킨 채 내 눈치를 살폈다.
“미안합니다, 그럼 제가 왜 당신을 찾아왔는지 그 목적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과일주를 내려놓은 마법사는 자세를 정돈한 뒤 정중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부탁했다.
“탑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
그 부탁에 나는 반문했다.
“역시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압니다, 당신의 동료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걸요. 만약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그는 이곳의 원주민이 됩니다.”
“그게 이유는 아닐 텐데요.”
“제가 또 서두를 잘못 골랐군요! 그러니까 당신이 가진 힘은 제게 너무나 큰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인챈트 때문입니까?”
“네, 당신은 내게 너무 위험합니다. 탑은 물론 마법의 개념까지 박탈시킬 만큼 강하니까요.”
“보통은 이런 힘을 손에 넣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목마른 자가 우물 파듯이 힘이 필요한 마법사나 그런 짓을 벌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지간해야죠. 당신도 보셨지 않습니까? 내 상상력, 그러니까 추상적인 개념까지 박살 낼 정도로 그 힘은 강해요! 무섭다구요!”
그래, 이 세상은 마법사의 상상력으로 구축되었다고 했었지.
그럼 하늘의 균열은 곧, 그가 가진 상상력의 파괴를 의미한다는 건가?
마법의 개념은 도통 보편적인 생각으론 헤아릴 수가 없는 것 같구나.
“그래서 제 동료 얘기를 꺼낸 거군요.”
“예, 탑에서 나가는 대가로 그를 살려주겠다. 이 말입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 말에 비르겐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다 당신의 동료가 죽는다면요?”
“그라면 죽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원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는.”
“기사들의 개념은 도통 헤아릴 수가 없군요.”
그 말에 나는 방금 내가 속으로 느낀 간극을 느끼며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 웃음을 엿본 비르겐트는 더욱 긍정적인 목소리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원하는 바를 제가 이뤄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진심입니까?”
담담한 내 말에, 비르겐트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제발 나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