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그물과 작살 (18)
“그러니까 이곳에 당신의 동료가 찾는 물건이 있을 수도 있다 이거군요.”
비르겐트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가, 곧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치켜뜬 채 말을 이어갔다.
“말씀해주신 것과 비슷한 물건이 얼추 스무 개는 넘는 것 같습니다만.”
“그의 이름은 테론 에인츠입니다.”
“아.”
에인츠라는 이름을 듣기 무섭게 그는 특유의 짙은 속눈썹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고개를 들어,
“있군요, 있어요! 당신의 동료가 찾고 있는 그 물건. 에인츠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걸 보니 확실해요!”
나로서는 도저히 수긍하기 힘든 말을 늘여놓았다.
“확실… 한 겁니까?”
“네! 확실해요! 그렇다면 내 새벽이 밝기 전까지 상상력을 발휘해 당신에게 그 물건이 자연히 흘러가도록 하겠으니 그것을 받는 즉시 떠나주십시오.”
“제 동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와 함께 타고 갈 마차를 준비해놓을 테니.”
“마차가 아니라 그의 상태 말입니다.”
이젠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특유의 유쾌한 표정을 지은 비르겐트가 내 의문에 곧바로 즉답한다.
“괜찮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동료를 탑으로 내보내는 방법으로 꿈을 쓸 생각이니까.”
“꿈…?”
“네, 탑에 있었던 일이 마치 하룻밤 사이에 꿈처럼 느껴지실 겁니다. 그리고 그 꿈이 끝나는 것으로 탑의 퇴장이 이뤄지는 거죠.”
“말로만 들어선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정말 말이 되는 이야깁니까?”
비르겐트는,
활짝 웃으며 양팔을 펼쳐 보였다.
“당연히 말이 되죠!”
성향이 온건한 자라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싫다, 마법사는.
“그럼 이걸로 거래가 성사되었다고 봐도 되겠죠?”
그 물음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건배를 합시다, 성사의 의미로!”
“그럽시다.”
마지못해 그가 내미는 잔을 향해 내 잔을 부딪치자.
마치 눈앞에 벼락이 친 것처럼, 돌연 비르겐트가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뒤에선,
“뭐지? 여기 있던 손님 못 보셨습니까?”
빈 쟁반을 든 여관 주인이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 *
방금 막 줄 시계 속 시침이 자정의 벽을 깨트렸다.
혹시 모르니 테론에게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비르겐트와의 일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지 모르니 자리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관 안으로 볼이 홀쭉한 사내 하나가 들어오더니, 이내 나를 발견하곤 급한 모습으로 달려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디안님. 저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케넷.”
교역소장 울레이즈의 비서인 케넷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
“교역소장님이 디안님을 모셔오라고 신신당부하시는 바람에 저녁 내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지 뭡니까. 혹 벌써 이곳을 떠나진 않았을까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계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셔츠를 휘휘 펄럭이며 긴장과 안도를 한바탕 긴 말로 쏟아낸 그에게,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여관 한쪽에 마련된 물통에서 물 한 컵을 떠 그에게 건네주었다.
“휴, 감사합니다.”
“교역소장이 왜 저를 보자는 겁니까.”
“아시다시피….”
그는 갑자기 난색을 보이며 내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교역소장님이 디안님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셨지 않습니까.”
알고 있다.
그러나 이해했기에 넘어가려고 했었다.
울레이즈는 그 나름대로 목숨이 걸린 일이었을 테니까.
결국엔 테론을 끌고 간 일당의 행방을 시인하기도 했었고.
“하여 사죄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제 제가 얼른 가서 교역소장님과 함께 이곳에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케넷, 그러면 당신의 오늘 하루가 더 길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냥 저와 같이 갑시다.”
내 대답을 들은 케넷은 입술을 양쪽으로 가득 당기며 미소 지었다.
“예, 디안님.”
케넷과 함께 텅 빈 거리를 걷다 보면,
그는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내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디안님께서 발탄 교역소의 괴물을 처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대답하십니다! 그 극악무도한 괴물을…!”
“테론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괴물과 마주치지도 못했을 겁니다.”
“참, 동행하시던 분께선 어디에…?”
“… 부상을 치료하는 중입니다.”
케넷은 새삼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제 더는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그를 위로해주기 위해 말을 건네니, 케넷은 다시금 내게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교역소장이 있는 저택 안뜰에 들어서자,
바로 눈에 들어온 건 문밖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날 기다리는 듯 보이는 울레이즈의 모습이었다.
뒤이어 그 역시 나를 발견했는지 헐레벌떡 달려 나와 그 앞에서 대뜸 무릎을 꿇었다.
“어찌 직접 오셨습니까, 디안님!”
“일어나십시오.”
“제 잘못의 무게를 생각하면 일어서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짐을 덜기 위해 나를 찾은 게 아닙니까.”
냉정한 내 대답에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잘못의 무게를 스스로 늘리진 마십시오. 어느 정도는 당신의 선택을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디안님께 너무 많은 것을 얻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 교역소도 그리고 저 울레이즈란 인간도.”
그는 손짓으로 뒤따르던 시종을 시켜 들고 있던 함을 건네받고는,
그것을 열어 내용물을 내게 보여주었다.
“저는 디안님이 주신 이해와 같이 귀한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못 되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할 역량은 됩니다.”
그 안에 든 것은,
어떤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브로치.
“오늘 저녁에 좀처럼 보기 힘든 북쪽 상인들이 교역소를 찾아왔습니다. 이건 그들에게서 구한 물건이지요. 제게는 이게 기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디안님께…,”
비르겐트가 말한 게 바로 이런 것이었나.
원하는 물건을 자연스레 흘려보낸다는 말이.
만들어진 세상, 그곳에 진짜로 살아는 두 발 걷는 자들의 동기를 통해서.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받아주시길.”
울레이즈의 간곡한 부탁에 나는 그가 건넨 선물을 받아들였다.
그 브로치는 마치 맥레인의 안장 가방에서 처음 발견한 베나즈 가문의 인장처럼.
그리운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울레이즈, 이건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혹시 묵을 곳이 없으시다면 이곳에서…?”
“아니요, 저는 이제 떠날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울레이즈는 뭔가를 더 챙겨주려는 듯 부랴부랴 움직이기 바빴지만, 나는 그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한사코 거절했다.
“그럼, 이만.”
“앞으로의 여정에 평온함이 가득하기를.”
꾸벅, 고개를 짧게 숙여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브로치를 품에 넣고 진료소로 향했다.
* * *
줄 시계의 시침이 더욱 기울어져 세 시를 가리켰다.
이 이상 더 기울어지면 슬슬 새벽의 기운이 눈에 보일 정도로 만개하겠지.
테론은 진료소 내부, 가장 고급스러운 병실에 홀로 누워있었다.
벗겨진 상체엔 마치 알록달록한 멍처럼 펴 바른 연고의 흔적들이 선명했고, 손가락은 마디마다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음에도 붉게 물든 상태였다.
하지만 과연 에인츠 가문의 이름답게, 그의 육신은 참으로 강인해 보인다.
만약 마법사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테론은 틀림없이 내일 아침 눈을 떠 나와 함께 다음 층을 향했을 거야.
슬슬,
비르겐트가 말한 대로 탑을 나갈 때가 임박했음을 직감한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업고 병실 밖을 나섰다.
그의 말 대로라면 우리가 탈 마차가 곧 나타날 것이리라.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테론을 업고 진료소를 빠져나가는 동안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마 간호사라도 마주쳤다면 내 행동을 뜯어말리려 했을 텐데.
그렇게 진료소 밖에 나서자,
나는 자연스레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진료소 앞에 거대한 마차가 아주 대놓고 주차되어 있었으니까.
말을 끄는 기수는 후드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마치 인형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기수를 보니 비르겐트가 보낸 마차임이 틀림없다는 걸 확신한 나는 테론과 함께 그곳에 올라탔고,
안에 자리를 잡고 앉기 무섭게 기수는 고삐를 놀려 마차를 움직였다.
덜그럭덜그럭.
마차 바퀴가 땅을 할퀴며 나아가 순식간에 바탄 교역소 밖을 벗어난다.
아직 갈 길이 먼지 창밖 너머 보이는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아 보였다.
이윽고 새벽의 기운이 만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위에 안개가 자욱이 피었는데, 그 안개가 얼마나 진한지.
그것을 손으로 훑으면 끈적한 감촉이 느껴질 것만 같을 정도였다.
이제 안개는 마차 안으로까지 기어 들어왔고,
슬슬 내 두 귀도 먹먹해졌다.
덜그럭덜그럭.
그런데도 마차의 바퀴 소리만은 유독 귓가에 선명히 들린다.
덜그럭덜그럭.
마치 유유히 진행되는 암시처럼.
마차 바퀴 소리가 반복될 때마다 내 눈꺼풀은 점점 더 무거워져.
덜그럭덜그럭.
이내 완전히 감겨버렸다.
* * *
달그락달그락.
마차 바퀴가 거친 길 위에서 통통 구른다.
그 우악스러운 반동에 몸이 흔들리니 자연스레 내 눈도 퍼뜩 떠졌다.
“아유, 드디어 일어나셨네. 손님! 슬슬 목적지에 도착하니까 일행분도 미리 깨우시는 게 어떠십니까?!”
내 앞,
마차의 기수엔 웬 시커먼 중년 남자가 특유의 호쾌한 말투로 내게 소리치고 있다.
분명…,
내 기억으로 기수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술을 얼마나 잡수신 건진 몰라도, 이 거친 길을 가는데 일어나질 않으시네!”
기수가 껄껄거리며 능숙한 솜씨로 고삐를 이리저리 놀렸다.
그래,
꿈이로구나.
비르겐트가 말한 대로, 꿈으로서 탑을 나온 것이로구나.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기대어 누워있는 테론을 바라보았다.
그는,
얻은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테론.”
그를 흔들어 깨우자.
잿빛 눈썹이 꿈틀거린다.
“테론, 일어날 시간입니다.”
더 격하게 흔들자,
이내 그의 눈에 번쩍 떠졌다.
“허억…!”
물 밖 구경을 나온 생선처럼 펄떡 튀어 오른 테론은 주위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넋 나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찌?!”
그리곤 생생한 악몽을 떠올리듯, 자신의 손을 살폈다.
흉측하게 깨져있어야 할 손톱은 멀쩡했고, 욱신거리던 고통은 몸에서 떠난 지 오래다.
“대체…. 뭐가 어떻게….”
“자 손님분들, 목적지에 도착이오!!”
어안이 벙벙한 테론을 뒤로, 기수가 냅다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나와 테론은 동시에 양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거대한 탑.
그리고 그 아래 꽃처럼 활짝 펼쳐진 도시.
‘론다이트’
“테론, 등반은 끝났습니다.”
“그… 렇습니까…?”
승강장에 도착한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이전에 같이 거닐었던 론다이트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처음 그와 만났던 장소에서, 품에 간직하고 있던 가문의 브로치를 건넸다.
“이건….”
“해 줄 이야기가 많습니다.”
* * *
그리 긴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테론은 마치 굉장히 긴 서사시를 읽은 것처럼 이야기를 듣는 내내 복잡미묘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0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먼저 꺼내지 않아 굳이 말하진 않았다.
다만 내가 구한 것쯤은 정황상 확신하고 있을 뿐.
그렇게,
테론은 약속했던 날씨를 걷는 유리병을 내게 건넸고.
그것을 받아든 나는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의 법도에 맞춰 한쪽 손을 가슴에 얹고 그에게 인사했다.
“테론, 그대와는 참으로 흥미로운 인연이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디안.”
이윽고 서로 각자의 길을 향해 나아가려는 찰나.
테론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다짐하듯 내게 소리쳤다.
“에인츠 가문은 이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