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그물과 작살 (19)
째깍째깍.
손에 담긴 회중시계 속 초침은 제 속도대로 움직이고 있다.
이내 시계 너머로 불현듯 보이는, 드높은 론다이트의 탑을 눈에 담고 나서야 실감했다.
진정 한밤의 꿈 같았었구나.
탑의 세상은, 그리고 등반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떠올려봐도 마법사에 관해선 의외였어.
생각해보면 마법사도 그 기원은 두 발 걷는 자이기에, 그 이념과 성향이 각자 다를 수밖에 없겠지.
단지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그들의 위상과 존재감에 당연한 말들을 쉬이 떠올리지 못했을 뿐.
경험이라는 칼날로 선입견을 한 꺼풀 벗겨 내보니, 어느새 내가 보는 세상이 더욱 넓어진 것같이 느껴졌다.
물론 넓어진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0, 마그나베노스.
그것은 어느새 내 몸 안에 스며들듯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어떤 힘이나, 내면에 작용하는 내력 따위가 아닌.
하나의 감정, 하나의 감각.
하나의 기관 같이 느껴져서…,
비유하자면 눈도 못 뜬 갓난아이가 어미젖부터 찾는 태초의 본능과 같은 것에 가까웠다.
하여 아직 0에 대해 전부를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눈을 떠야 한다는 본능적인 생각에 따라 마그나베노스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아직도 생생해.
마그나베노스의 눈을 떴을 때 느껴졌던 새로운 감각들이.
그리고 그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절절하게 체감했다.
군림형 인챈트의 무지막지한 위력을.
개안 된 눈의 영역 안에 들어온 자들을 억압에 가까운 관제로 제어하고,
이어서 단지 의지만으로 발현시킨 기압에 모두를 짓눌러버렸던 그 압도적인 힘을.
마그나베노스의 눈을 뜬 그 순간만큼은, 나는 분명 살아있는 태풍이었으리라.
하지만 반대로 경이로운 힘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제, 첫걸음이잖아.
그 첫걸음을 뗀 것만으로도 이런 힘을 발휘했다면, 두 걸음째는? 그다음은?
어렴풋이 세공소에서 읽었던 용의 시대 책들이 떠오른다.
태풍은 그 자체로 강하지만 바람길에 쉽게 설득되기 때문에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일이 적다고.
나는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마도 평생을 되뇌어야 할지도 모르는 말이겠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자.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바람길로.
언제 풀릴지 모르는 고심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필요는 없으니까.
곧바로 테론에게 건네받은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는 이 안에 담긴 것이 계절의 기억이라고 했었지.
마법사의 탑에서 구한 물건인 만큼 일반적인 날씨 파편과는 그 효과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대단할 것이다.
단단하게 봉인된 병뚜껑을 열어젖히고, 그 안에 든 푸르스름한 액체를 쏟자.
그것은 마치 수증기와 같은 모습으로 허공에 떠오르다가 이내 흩어졌다.
이것으로 된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 되는 건지, 그와 관련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아마도 방금 장면은 되게 흥미로운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좀 더 넓게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한 게 불과 몇 초 전이었는데, 벌써 내가 보는 세상이 또 좁게만 느껴지네.
자리를 털고 일어선 나는 론다이트의 시내로 향했다.
그러다가 줄 달린 회중시계 옆에 매달려 같이 흔들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시선을 옮기자,
그렇지.
이게 있었지.
론다이트와 어스키만의 발을 묶은 기상이 개일 때까진 지루할 일이 없겠어.
벨트와 결합 된 금속 고리 끝, 작은 수첩을 손에 쥔 나는 근처 서점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리케니엔에 포개어진 손 조합이 들어오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는데,
사실 종이는 굉장히 값비싼 물건 중 하나였다.
포개어진 손 조합에 진 빚 가운데 적어도 1할은 종잇값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물론 이는 양질의 종이에 한한 것이다.
마치 술의 세계처럼, 종이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서 애호가들이 매우 많다고 바돈에게 얼핏 들었어.
특정 종이로 발간된 한정판 책은 그 가격이 중립지역에서 보았던 사치품에 버금간다지.
리케니엔에 보급되는 종이는 바비토드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습기와 변색에 강하여 내용의 변질을 막는 데 탁월하다.
하도 그 종이를 만져봐서 이젠 질감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야.
그걸 생각하면, 확실히 빠져들 여지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반면 ‘위위키’라 불리는 나무로 만들었다던 이 수첩은,
그 질감부터가 굉장히 특이했다.
천천히 만지면 특유의 굴곡진 결이 다 느껴질 정도였고, 빠르게 스치듯 만지면 마치 종이가 지문 틈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울레이즈는 이 수첩에 ‘정돈’을 버무렸다고 했었다.
말만 들어도 마법사의 언어인 것 같으면서도, 그 이치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자는 기억을 잉크 삼아 인챈트를 썼고,
론다이트의 탑 마법사는 꿈이라는 문으로 나를 상상력 밖으로 내보냈다.
라고 생각해보면, 이 정돈이란 것도 그 개념을 물방울 따위로 치환하여 책에 펴 바른 거라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
사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아직 아리송한 기분만 들 뿐이다.
어렵네,
그들의 언어와 개념은.
무엇보다 과정을 모르고 그저 말로만 들으니까 더 이해가 되질 않아.
당장 내 머리로 생각해보자면…,
회계 업무 보는 자를 일부러 뛰게 만들어서 그 이마에 땀이 맺히면 그게 물방울로 치환된 정돈이 아닐…,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으니 이쯤 하자.
어쨌든,
울레이즈는 이 위위키 수첩이 최대 두 권 분량의 책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어.
이마저도 직접 써보고 겪어보지 않는 이상은 이해하기 힘든 말이니, 자.
서점은 어디에 있지?
* * *
거멓게 멍이 든 론다이트의 한쪽 하늘이 슬슬 개고, 이에 맞춰 광장의 두 발 걷는 자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능 확실하네.
계절의 기억이란 거.
격류처럼 쏟아져 나오는 자들을 거슬러 간신히 광장을 빠져나온 나는 근처에,
[어떤 책이 그대 손가락을 베었나.]
나무 간판 안에 우스꽝스러운 글씨가 새겨진 서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선 그곳은,
구월의 낙엽 냄새가 났고 시월의 쓸쓸한 햇살 기운이 감돌았다.
물론 구월의 낙엽이 이곳에 켜켜이 쌓인 진한 종이 냄새 전부를 가릴 순 없었지만 말이다.
또 한껏 소란스러운 외부와는 달리 이곳은 매우 고요해서 이따금 들리는 것이라곤 종이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이어 미로처럼 늘어서 있는 책장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위위키에 담을 책을 고르기 시작한다.
[도련님, 저는 시녀라고요! -1권-]
[태양과 달의 경계는 있는가?]
[방랑하는 별들의 자리]
마음 같아선 이곳에 틀어박힌 채 전부 다 가져가 늘어지게 읽고 싶다.
손가락 끝에 종이 냄새가 잔뜩 밸 만큼.
어떤 목적을 위해서 탐독하는 게 아닌, 그저 문화적 즐거움만을 충족시켜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가 됐든, 공연 같은 것도 볼 기회가 내게 올까?
순간 충동적인 갈망에 휩싸여 심장이 콩닥거린다. 그럴 순 없지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하루, 그것도 목표를 위시한 기다림 속 몇 분 정도는.
갓 성인이 된 청년 행세도 해볼 수도 있는 거지 뭐.
퍼뜩, 그 짧은 시간 속으로 재미난 치기를 다 부린 나는 침착함에 가슴을 흠뻑 적신 뒤 책 한 권을 빼 들었다.
[죽음에서 태어난 괴물들]
굳이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탑의 세상에서 상대했던 괴물이 떠오르기도 했고, 리케니엔의 서쪽 문제를 해결하려면 관련된 정보를 익힐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위키는 어떻게 써먹는 물건이지?
고른 책 표지 위에 위위키를 올려보기도 하고, 서로 펼쳐 맞대보기도 해봤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책등을 서로 맞대자,
그 순간 위위키에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던 위위키의 책등에 웬 글씨가 나타난 것이다.
[위위키/죽음에서 태어난 괴물들]
작은 수첩 책등에 순식간에 새겨진 글귀.
바로 위위키의 첫 페이지를 펼치자.
1. 사냥꾼 키르진의 수필
2. 개요
3. 괴물의 종류
3-1. 이쉬가나
3-2. 가르도로
3-3. 비저즈댄
4. 논란 및 사건 사고
5. 여담
방금까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던 종이에 내용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말 그대로 두꺼운 책을 이 작은 수첩이 소화해낸 듯한 느낌이야.
다음 장으로 넘기자 구불구불한 글씨가 가득 나열되어 있다.
1. 사냥꾼 키르진의 수필
별자리에 속하는 강티아 원정대 소속의 엔트로피급(1) 사냥꾼, 키르진의 세 번째 수필이다.
(1) 강티아 원정대 내에서 두 번째로 엔트로피를 달성했다.
2. 개요
일반적인 사냥꾼의 수필과는 다르게 내용의 절반 이상이 키르진의 경험담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저자 특유의 세밀한 묘사 덕에 독자들 사이에선 오히려 괴물에 대한 정보가 더 와닿는다는 평이 자자하다.(2)
(2) 비르겐트의 갈까마귀로 수집한 견해
3. 괴물의 종류
이 책에선 총 세 종의 괴물이 등장한다.
3-1. 이쉬가나
이쉬가나를 만나고 나면 네 똥이 얼마나 향기로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될 거다.
고름에 달라붙은 폐 비늘과 불어터진 신체는 멀리서 봐도 그 역한 냄새가 느껴질 정도거든. -키르진-
익사체에서 발현되는 괴물로 주로 타인에게 강제로 익사 당한 피해자에게서 많이 발현되는, 전형적인 사념형 괴물이다.
키르진이 만난 이쉬가나는 바람을 핀 약혼남에 의해 익사 당한 약혼녀였으며, 이를 의뢰한 자는 바로 약혼남(!)이었다.
(!) 실로 쓰레기 새끼라 할 수 있겠다. –위위키의 정돈-
…,
쭉 내용을 살펴보니 이 위위키라는 물건에 대해 어느 정도 알 것도 같다.
수첩에 그리 많은 내용이 적혀있지 않은 걸 보면 그건 아마도 책이 수필 형식의 글이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정보량이 많은 도감이나 사전 쪽이 위위키에 훨씬 더 적합하겠어.
어찌 되었든,
내게 있어선 정말 도움이 되는 물건임이 틀림없다.
까딱하다간 위위키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쓰임새를 확인한 뒤 곧바로 수첩을 덮은 나는 이제 바깥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 * *
날씨가 진정되자 겨우 배 위에 올라탈 수 있었던 베빌리는 그새 몰골이 초췌해져 있었다.
아니, 비단 그뿐만 아니라 배 위에 올라탄 캐룸 원정대 모두가 그러했다.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의 변덕 덕분에 출발이 늦어져 여러모로 부족한 보급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부랴부랴 어스키만 내에서 자체적으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또 대뜸 마법사의 변덕으로 날씨가 개어버렸으니 여러모로 넋이 나갈 수밖에.
거기에 더해 베빌리는 아직 세멜레아와의 서먹한 관계를 바로잡지 못했다.
분명 원정대 내 위치로 따지면 베빌리가 그녀보다 높은 직급이었지만,
같은 종끼리의 서열로 놓고 보자면 위대한 뿌리 출신의 세멜레아가 베빌리보다 한참이나 더 높았기에.
그 간극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베빌리를 괴롭히는 난제와 같았으리라.
“많이 지쳐 보이는군, 베빌리.”
곧 갑판에 걸터앉아 있는 베빌리 옆으로 아톰 뱅퀴시가 다가왔다.
“꽤 힘든 시간이었잖습니까, 아톰님.”
나른한 베빌리의 말투에 아톰이 털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힘들었고말고.”
“돌아가면 보름 정도는 쉴까 합니다.”
“그게 자네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 느꼈다면, 그 길로 가는 게 맞지. 내 원정대원들에게 말해놓겠네.”
아톰은 베빌리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아톰님.”
“세멜레아를 너무 어려워하지 말게나, 그녀는 위대한 뿌리 출신이잖아? 위험을 무릅쓰고 조바심을 내는 데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이해합니다, 같은 귀 큰 자로서 더더욱. 하지만 그것을 막지 못해 그녀가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길잡이는 길을 안내하는 자일 뿐이지, 누군가의 사명까지 간섭할 필요까진 없어.”
“전 그렇게 매정한 놈은 못되나 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자네가 훌륭한 길잡이인 걸세, 그래서 아직도 궁금하군. 그런 자네에게 성장의 단서를 준 그 숲의 읍소를 사냥한 자가 누구인지.”
아톰의 말에 베빌리는,
배에 올라탄 이후 처음으로 미소지으며 답했다.
“저도 궁금합니다, 그분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이제 배는 고동소리를 내며,
막 론다이트의 항구 안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