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그물과 작살 (20)
“이제 와 생각해보니 문제가 있습니다.”
폴란 지빈은 책더미 사이에 반쯤 파묻힌 채 심각한 표정으로 기지어에게 말했다.
“무슨 문제?”
“과연 이 빌비온에 인재가 남아 있을까 하는 문제요.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더 심각한 문제는?”
“아무리 장사치들이라 해도 그렇지, 이리 귀한 책들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놓다니요! 이는 지성을 짓밟은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말에 기지어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폴란, 지성체인 우리조차도 집이 없으면 남루한 신세를 면치 못하는데, 책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조합은 우리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 책장보다 책을 먼저 들여왔을 뿐이야.”
이어 기지어는 폴란을 따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리고 엄연히 말하면 이것들은 베나즈 가문이 조합에 진 빚이야. 우린 집 없는 책들을 걱정하기보다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진 빚보다 더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해.”
말을 마친 기지어는 이제 슬슬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작은 별채.
비록 그 안엔 아직 책장도 들어서지 못해 책더미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지만,
그는 지금 학술을 위한 공간이 마련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서 당장이라도 날뛰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니까.
반면 폴란은 심각한 표정으로 책더미 사이를 오가며 푸념을 이어가기 바빴다.
“그래요, 맞습니다.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바로 인재 말입니다! 학술을 익히고 재능을 펼칠 인재가 이 빌비온에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그런 말을 하는 자네조차 빌비온의 북쪽, 티히트라의 휘하에 있었잖나.”
“저는 엄연히 깃발에 의해 고용된 자일 뿐입니다. 이 땅의 토박이가 아니라고요.”
기지어는 코웃음을 쳤다.
“당장 서 있는 땅이 빌비온이면 빌비온의 지식인인 거지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지요! 그래서 지금 동쪽을 제외하고 빌비온 땅을 밟은 지식인이 저 말고 또 누가 있답니까?”
기지어가 수염을 실룩거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기 리케니엔의 사람 모두!”
“기지어님!”
폴란의 반응에 기지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그 절묘한 눈빛은, 그래.
‘리케니엔에는 저자와 같은 냉소적인 지식인이 필요했어.’
라는 뜻이 담겼으리라.
“좋아, 그럼 문제점들을 어디 내게 다 열거해 보게.”
기지어의 물음에 폴란은 망설임 없이 혀 뒤로 꾸역꾸역 참아왔던 말들을 내뱉었다.
“베나즈의 영주님께선 자리를 비운 상태이고, 빌비온의 동쪽 땅을 양분한 발기지르와 켄타나는 현재 전쟁을 위해 병사들을 집결시킨 상황입니다.”
“그래서?”
“베나즈의 깃발, 아니 리케니엔에겐 지금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미 초읽기를 해야 할 판일지도 모르는 이 마당에, 지식인을 모집하고 양성할 시간은 없습니다. 우린 당장 근방의 지리를 지도로 따야 하고, 보급로를 최적화하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라…!”
“이봐 폴란, 리케니엔엔 지금 베나즈 가문을 모시는 두 기사가 있네. 그들이 누구인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그 말에 폴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만 했다.
이어 별수 없이,
“베르융 오르테…, 조이 크레비디….”
폴란은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여 기지어의 저 말에 대한 저의에 수긍해야만 했다.
단 두 기사에 의해 티히트라가 박살 난 건 사실이니까.
“한때 아이베리아 중앙 지역 패권을 거머쥐었던 기사왕 에르엥의 최정예 기사들이지. 살아있는 전설들이란 말이야.”
기지어는 흡족한 표정으로 양팔을 펼쳤다.
“자네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고 옳아, 하지만 그 일을 잠시 미뤄도 될 정도로 리케니엔의 두 기둥은 아주 굵고 튼튼하네.”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지식인은 국가가 위기의 그림자에 드리워졌을 때 빛나야 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강병의 그늘 속에서도 빛을 잃지 말아야 하는 존재여야 해.”
그 말에 폴란은 눈을 반짝였다.
“좋은 말이군요.”
“자네가 내놓은 건의 사항도 다 좋은 말들이었어, 그래서 말인데.”
기지어는 잠깐의 생각 끝에 절충안을 내놓았다.
“앞서 말한 그 문제들은 자네에게 모두 일임하겠네, 그 과정에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 붙여주지.”
“기지어님?”
그는 이제 폴란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지금처럼 자네는 리케니엔의 ‘이성’으로서 고민하게, 난 ‘이상’으로서 꿈을 꿔볼 테니.”
“끝까지 남아계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지식인에게 이상은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자신 있네, 적어도 지금은.”
기지어의 말에 폴란은 호쾌하게 웃으며 그 악수에 응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생겼습니다.”
“뭔가?”
폴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넌지시 근원적인 궁금증을 던졌다.
“물론 베르융 오르테와 조이 크레비디가 베나즈 가문과 함께 하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땅에 베나즈는 배반자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해도 그 두 기사는 글라디옴이라는 칭호를 위시한 최강의 기사와 함께 싸운 자들이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베나즈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워왔다고 해도, 베나즈의 핏줄만으로 그 이름의 오명을 벗겨내기엔 명분이 약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기지어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다가, 이내 폴란의 손을 놓으며 덤덤히 답했다.
“물론 베나즈의 이름만으론 오명을 벗기 힘들겠지. 기사왕 에르엥을 배신하고 0을 찬탈한, 희대의 배반자라는 오명은 아이베리아에 역사라는 얼룩처럼 남았으니…, 하지만.”
“하지만?”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에르엥의 유지였다면, 그리고 그 유지를 베나즈라는 이름으로 잇기 위해서였다면?”
“그게 말이 되는 소리….”
“그 증거를 베나즈의 핏줄이 가지고 있다면.”
폴란은,
벌어진 입을 도저히 다물 수가 없었다.
지금 기지어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아이베리아의 중앙을 넘어 동과 서, 북의 열강 모두를 뒤집을 만한 것이었으니까.
“기사왕의 0은 찬탈 뒤 유실된 것이 정설 아니었습니까?”
간신히 반문한 폴란의 말에 기지어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0은 지금 베나즈 영주의 손에 있네. 그것도 그의 의지에 따라 발현 가능한 상태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
“0을 가진 것도 모자라 그 힘을 발현할 수 있다는 말은…,”
“그래, 기사왕의 의지로 0이 베나즈에게 전승되었다는 증명임과 동시에 배반자라는 역사가 거짓되었다는 것을 반박할 증거가 되겠지.”
“그야말로 역전의 대업…,”
폴란은 자신의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밟고 있는 이 땅이 바로 새롭게 기록될 역사의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지식인으로선 감당하기 힘든 벅차오름이었으니 말이다.
* * *
폴란이 물었다.
그러면 더더욱 이상을 좇아가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기엔 디안 베나즈의 냉철함이 너무나 탐이 난다고.
그 대업은 틀림없이 지식인의 이성으로 짓누르고 견제하여 탄탄대로의 길을 만들어야 가능할까 말까 하는 일이다.
설령 0의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와 함께 기꺼이 싸워줄 기사들이 있어도.
승자에게서 승리를 빼앗고, 기재된 역사를 부정하는 일은 해낼 수 있다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리케니엔의 책사를 자처하는 작자가 이상을 한번 좇아가 보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업의 중심에 서 있는 자가 그런 이상마저도 품을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두 발 걷는 자들을 셀 수 없이 꿰뚫어 보아왔지만, 단 두 명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하나는 나의 영원한 선생이신 토르킨님이시고.
다른 하나는 바로 리케니엔의 영주인 디안 베나즈다.
힘에는 아주 강력한 추진이 따른다.
하여 힘을 가진 자들은 눈앞에 놓인 계단을 차례로 밟지 않는다.
몇 계단씩 거침없이 올라가 정점을 향해 치닫지.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디안 베나즈라는 인간은 다르다.
그는 묵묵히 한 계단씩 올라가는 치밀함을 발휘해서 내가 이성으로 견제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있다.
어쩌면 당장 가진 힘을 내비치는 것만으로 눈앞에 놓인 계단보다 더 높이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나는 모른다.
어떤 계기가 그의 운명을 이끄는지 나는 모른다.
애초에 그가 다음 발을 내디딜 계단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나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가 멈춰 서 있는 계단 안에서 꿈을 꿔보련다.
한 번 몽상가가 되어 보련다.
“설렘이 내 잠까지 뺏어가 버렸네.”
정신을 차려보니, 창밖엔 막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폴란과 헤어지고 학술원에서 꼬박 하루를 지새워버리다니, 이래서 생각이란 것은 참으로 무섭다.
이렇게나 잘도 내 시간을 좀먹다니!
괜히 빼앗긴 시간에 신경질 내보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지.
다시 머리를 비우고 책 정리에 몰두하려는 찰나,
창가에 드리운 그림자를 느낀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그쪽을 주시했다.
그러자 내 눈초리에 놀랐는지 그림자는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호기심이 다 좋을 순 없지만, 그쪽이 이곳에 느낀 호기심은 나쁘지 않다 내 장담할 수 있소.”
능숙하게 책을 정리하며 바깥이 다 들리게 소리치자,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다시 창가에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 하나.
날카로운 턱에 끝이 뭉툭한 코, 부리부리한 눈은 아침 햇살을 한 움큼 집어먹은 듯 초롱초롱한 것이.
똘똘하게 생긴 청년이로구나.
창가 너머 그에게 들어오라 손짓하자, 청년은 쭈뼛쭈뼛.
학술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름이 뭔가?”
“조엘, 조엘 올란드라고 합니다.”
“조엘, 조엘이라. 좋은 이름이군.”
슬쩍 청년을 바라보자, 그는 눈빛으로 탐냄을 드러내며 쌓여있는 책표지를 쓰다듬고 있다.
“리케니엔에 쭉 살아왔나?”
“아뇨, 서쪽 숲에서 이주해왔습니다.”
“책 읽는 걸 좋아하나 보지?”
“좋아합니다만…,”
“다만?”
청년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쩔 땐 답답합니다.”
“답답하다니?”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대로잖습니까. 아무리 읽고 질문해도 같은 대답만 읽어야 하는 게 답답합니다.”
이놈…,
봐라?
나도 모르게 입맛을 슬쩍 다셨다.
배움은 없다.
그런데 그 자체가 배움인 부류로 보인다.
“자네는 리케니엔에서 무슨 일을 하지?”
“거름을 모아 가을바람에 삭혀 비료를 만듭니다. 천한 일이지요.”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더러운 두 팔을 뒤로 숨겼다.
일단 학술과는 거리가 먼일이로군.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그래, 조엘. 어떤 책이 네 물음에 같은 대답을 일삼았지?”
“그게…, 한두 권이 아니라서요.”
“그럼 지금 당장 대답이 듣고 싶은 질문은 뭔가?”
“아이베리아.”
“응?”
조엘은 정말 천연한 눈빛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아이베리아를 알고 싶습니다. 제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모양인지, 또 위로는 뭐가 있고 옆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샅샅이요.”
“그 질문에 대한 답.”
이제 나는 그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네, 단.”
그러자 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답을 들으려면 꽤 많은 값을 내게 지불해야 해.”
“아시다시피 제 직업으론…, 그 값을 온전히 치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거 곤란하군, 그렇다면 지금 하는 일 그만두고 내 밑에서 일해 보는 건 어떤가? 그럼 충분히 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저는 어제까지도 비료를 손으로 만졌던 천한 놈입니다.”
“나도 어제 내가 싼 똥을 내가 직접 닦았는데.”
태연한 내 대답에 조엘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자네 머리로 느끼는 그 갈증을 풀어보고 싶진 않나? 그럼 한 번 그 갈증을 풀기 위해 전부를 투신해 봐, 난 그걸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해서 내 예상대로 자네가 재능이 있는 자라면,
그때는…,
히히 못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