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그물과 작살 (21)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가진 청년 하나가 반가운 얼굴로 막 정박한 배 앞으로 다가가며 말하자,
가장 먼저 배에서 내린 아톰 뱅퀴시가 방긋 웃으며 그 청년과 악수했다.
“아르포소, 자네 얼굴을 보니 이번 원정이 정말 끝났다는 게 실감 나는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톰님.”
아르포소.
캐룸 길드의 2등 주무관인 그는 수석 길잡이인 아톰과의 악수를 마치고 곧바로 뒤따라 내려오는 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 아르포소의 눈빛을 읽은 아톰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가보게, 이번 원정에 자네 동지가 고생이 꽤 많았으니까.”
살짝 몸을 틀어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아르포소는 쓰고 있던 주홍빛 후드를 벗어 드러낸 얼굴로 아톰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곤 바로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베빌리! 괜찮소?”
이어 막 하선한 베빌리에게 안부를 묻자, 베빌리는 방긋 웃으며 그와 손을 맞잡고 팔꿈치를 부딪치는 특이한 방식의 인사를 나눈다.
“날씨가 기적적으로 풀려버려서 다행이지 뭡니까, 그 기세라면 보름은 더 지체됐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말입니다.”
아르포소는 베빌리와 마찬가지로 귀 큰 자다.
다만 베빌리와는 달리 아르포소의 오른 귀는 그 끝이 잘린 모양이었다.
“허 참, 무안하군요. 안부보다 그게 더 중요한 일이었소?”
“라게니드의 덩치가 평균 이상이었지만, 리키님이 벼락을 내려친 이상 이미 원정의 성공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베빌리는 이내 말끝을 흐리며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물론 과정 전부가 순탄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캐룸 길드 내에 사망자가 생기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지요, 다만 두 명이 절단상을 입고 네 명이 크게 추락해 중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배 앞에서 계속되는 둘의 열렬한 대화에,
막 짐을 들고 배에서 내린 귀 큰 자 소여가 작게 투덜거렸다.
“거, 같은 뿌리 출신이라고 두 분만 너무 친하신 것 아님까?”
그의 투덜거림에 아르포소는 털털하게 웃으며 소여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내 자네를 어찌 소외시키겠는가? 뿌리는 다르다 해도 자네와 나는 같은 숲이야.”
“근데 왜 제 가지에만 이렇게 짐이 주렁주렁 매달린 검까?”
“하하! 이리 주게, 내가 좀 거들어주지.”
소여의 투정에 뒤에 있던 베빌리도 결국 그에게 달려들어 짐을 덜어주었다.
그렇게 그들 셋이 사이좋게 항구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
세멜레아가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유유히 지나쳤다.
“엇….”
아르포소는 순간 어떤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끝내 지나친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이에 베빌리는 아르포소를 보며 고개를 슬쩍 가로저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에겐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적응이 안 되는군요, 외지에서 위대한 뿌리 출신을 대하는 건.”
“인간 사회의 곁가지로 생활했던 저보다 더하겠습니까.”
두 귀 큰 자가 그렇게 작게 탄식할 때,
“일단 좀 갑시다! 팔 떨어질 것 같은뎁쇼!”
소여는 뒤에서 씩씩거리며 그들을 재촉하기 바빴다.
* * *
“다름이 아니라 베빌리, 이곳에 대기하는 와중에 론다이트 원정 길드에서 제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늦은 저녁,
아르포소는 식후주를 기울이며 베빌리에게 말했다.
“무슨 연락 말입니까?”
“누군가가 캐룸 원정대에 의뢰를 요청했다고요.”
그 말에 베빌리는 마시려고 들었던 술잔을 잠시 내려놓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찌 제게 그런 말을 하시는 건지요? 의뢰 부분은 아톰님이나 리키님을 통하면…,”
“그 미상의 의뢰인이 베빌리, 당신을 지목했습니다.”
“… 절 말입니까?”
베빌리는 순간 의문을 느껴 아르포소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어찌 ‘미상’의 의뢰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겁니까? 원정 길드라면…,”
“글쎄 그 의뢰인이….”
아르포소는 베빌리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즉답했다.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는 사냥꾼이랍니다, 대단한 전리품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는군요.”
그 말에 베빌리의 한쪽 눈썹이 크게 움찔거렸다.
“대게 길드에 걸러져서 오는 미상의 의뢰인들은 뒷배에 깃발과 연관된 자이거나 상당한 실력의 사냥꾼들뿐인데, 이 미상의 의뢰인은 후자에 속한다고 봐야겠죠.”
“혹시 그 의뢰인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는 더 없습니까?”
베빌리의 반응에 아르포소는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압니다. 보통 이런 의뢰는 위험요소가 많지요. 하지만 의뢰를 받고 안 받고는 베빌리 당신이 결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르포소, 의뢰인에 대한 다른 정보는요?”
재촉하는 베빌리에게 아르포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해서 의문을 표했다.
“의뢰에 관심이 있습니까? 듣던 바로는 보름 정도는 뿌리내린 곳으로 돌아가 쉬신다고…,”
“… 그냥 얘기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어지는 베빌리의 반응에 아르포소는 얼른 자세를 고쳐잡고 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길드에게 들은 정보는 의뢰인이 정한 시간과 장소, 그게 전부입니다.”
“언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 * *
시간은 찾는 것 앞에서 낭비하기 쉽지만,
반대로 찾게 만들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지점 길드를 통해 특정 원정대에 의뢰를 요청할 수 있다.
단 의뢰를 요청할 때에는 지점이 위치한 곳에 해당 원정대가 파견된 상태여야만 한다.
원정대 내 대원을 지목해 직접 계약할 수도 있다.(1)(2)
(1) 직접 계약을 위해 특정 원정대의 파견지까지 쫓아가 진상을 부리는 자들이 많아 원정대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비르겐트의 갈까마귀로 수집한 증언
(2) 보통 직접 계약은 해당 인원의 파견을 원하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 높으신 가문들의 뒷일(!)을 해결해 달라는 의뢰가 많다.
(!) 생각해보자, 얼마나 개 같은 짓을 일삼았으면 가문의 뒷일 처리에 괴물 퇴치가 필요할까?! -위키키의 정돈-
원정대에 관한 기본적인 서적을 위키키에 옮겨 담아 얻은 정보 덕분에 어쩌면, 당장 오늘이라도 베빌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다만 베나즈의 이름을 공공연히 쓰지 못하는 이 상황 속에서, 또 나를 특정할 만한 증거를 흘린다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다분하기에.
베빌리에겐 아주 작은 단서만을 흘려놓은 상태다.
이제는 그가 그 단서를 놓치지 않고 나를 찾아와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어.
조용한 노상, 그 앞에 놓인 낡고 작은 의자에 걸터앉은 나는 껍질째 반으로 가른 과일 주스를 머금으며 위위키를 살폈다.
생각해보니까 이 위위키라는 물건은,
그 편의성은 정말 흠잡을 곳이 없지만 반대로 그만큼의 단점도 명확한 것 같다.
어쨌든 이 위위키는 마법사 비르겐트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떤 책을 옮겨 담던 그의 견해가 묻어나올 수밖에 없을 테니.
고로 위위키로 정보를 얻되 그것을 결코 맹신해서는 안 되겠어.
또 이 위위키에 들어갔다는 한 방울의 정돈 역시 설명자의 차분함과는 거리가 먼 걸 보면.
같은 책이라도 위위키마다 내용이 다 다를 수도 있겠구나.
이 마법이 걸린 물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엔 마법이 걸린 물건이라 할지라도, 신뢰와 경계를 적당히 안배하지 않는 이상 무심코 쓰긴 어렵겠군.
수첩을 덮고, 줄에 달려 있던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한 나는 자리서 일어나 광장 한쪽에 길게 펼쳐진 의자로 향했다.
날씨가 갠 지 하루가 지난 터라 원정대들이 다 빠져나간 론다이트는 생각보다 훨씬 썰렁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렇게 홀로 낡은 의자에 걸터앉은 나는, 회중시계 속 임박한 시간 걷는 소리를 들으며 그 위에 심장 박동을 얹은 채 기다렸다.
이윽고 시간이,
찌르르.
좀 흐르고.
찌르르.
회중시계 안에서 선명한 새 소리가 들려 올 때 즈음.
“알았다면 제가 먼저 찾아뵈었을 겁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내 앞에 귀 큰 자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베빌리.”
“디안님.”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 그에게 손을 내밀자,
그는 감격한 듯한 표정으로 얼른 내 손을 굳게 잡아 단단하고 투박한 악수를 이어갔다.
“찾는 것에 앞뒤가 어딨겠습니까, 그저 찾고자 마음먹으면 그것이 앞이 되는 거지요.”
“마음만으로 앞이 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바로 저처럼요.”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요, 디안님은….”
잠시,
베빌리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다.
“혼자입니다, 이제는.”
그런 그에게 차마 숨기지 못한 씁쓸함을 드러내며 말하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잘 지냈습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요.”
서둘러 차가워진 분위기를 데우기 위해 사족을 덧붙이자 베빌리는 그제야 얼굴에 감췄던 웃음꽃을 드러냈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군요.”
“예상이라니요?”
“처음 봤을 때부터 깃발을 가진 분이리라 생각했거든요. 지금 디안님의 모습을 보니 제 자리를 찾아가신 듯 보여 참 기쁩니다.”
아이러니하구나.
그땐 쓰고 있던 탈이 본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는데.
운명이란 건 걷다가 맞닥트리기 전까진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레인.
당신은 본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내게 베나즈의 이름을 물려주리라 결심하셨지요.
“여러 가지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선 다 설명하지 못할 만큼.”
내 대답에 베빌리 역시 고개를 얼른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디안님께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디안님께서 저를 이렇게 찾아주셨으니 그 이유에 대해 듣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그래,
지금은 한창의 반가움을 나누는 것보다.
잠깐의 목적부터 나누는 것이 더 좋겠다.
* * *
내 말을 들은 베빌리는 그리 고심하지도 않고 내게 재차 질문을 이어갔다.
“디안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지의 서쪽 숲길을 열어달라 이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서쪽 숲길엔 다수의 괴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요.”
“맞습니다.”
“그중엔 대단한 개체가 있다고도 하셨고요?”
“네.”
이어 내 대답을 모두 들은 베빌리는,
아주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선뜻 부탁을 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디안님께서 제게 열어주신 길과 비교하면, 그 숲길은 채 1할도 되지 못합니다.”
가는 길이 멀다.
하지만 그 길이 짧게 느껴질 만큼, 나와 베빌리 사이에 풀 이야기들이 많겠지.
본디 계획이라면 이곳에서 베빌리의 도움을 받아 괴물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잠재적인 0의 힘을 깨우치려 했었는데, 본의 아니게 테론 에인츠를 만나 탑을 등반하는 과정에서 그 잠재의 벽을 깨트리는 데에 성공했다.
해서 이제부턴 이야기가 아주 달라진다.
타지에서 위험부담을 안고 0의 힘을 휘두를 걱정을 해소함과 동시에, 리케니엔의 서쪽 숲 개척과 인챈트의 숙달을 같이 해낼 수 있게 됐으니까.
가장 좋은 건,
역시 리케니엔에서 모든 동향을 실시간으로 보고받으며 행동할 수 있다는 거겠지.
어쩌면 이 일로,
다음 목표로 가기 위해 걸어야 했던 열 걸음 가운데 여섯 걸음 정도는 한 번에 앞서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네 걸음.
그 후면 빌비온 동쪽에 우뚝 서는 것은,
베나즈의 깃발이리라.
그렇게 된다면.
그땐 아이베리아 전체에 알릴 것이다.
‘태풍이 돌아왔다고.’
그러니,
‘눈보라여 이제 그칠 때가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