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54화 (154/365)

154화. 그물과 작살 (22)

“들었슴까, 이번 의뢰에 우리 조가 파견 나간다는 거?”

벽에 기대어 조심스레 묻는 소여의 물음에,

정숙히 의자에 앉아 있던 세멜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대장은 이번 원정을 끝내고 가족에게 돌아가 보름 정도 쉬려 했던 것도 암까?”

그 말에 세멜레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안사람 되시는 분이 아이를 품고 있는 건 아심까. 몇 달 뒤면 태어날 거라는데.”

소여는 벽에서 물러나 팔짱을 낀 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위해 의뢰를 받은 걸 검다, 그 잘난 위대한 뿌리의 임무를 위해서.”

“말조심해, 소여.”

“숲속도 아닌데 조심할 게 뭐 있음까?”

“숲 밖에 나와 있다고 해서 네가 귀 큰 자가 아닌 건 아냐.”

“그렇다고 당신이 숲속에서 받아왔던 대접을 이곳에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슴까.”

세멜레아는 순간 치기가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동시에 소여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파르르 떨어야만 했다.

“여긴 숲 밖임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다 대굴빡에 볼트 하나 박혀도 이상하지 않을 곳인.”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세멜레아에게, 소여는 마치 여우의 눈매와 같은 모양으로 히죽 웃으며 답했다.

“귀 큰 자 소염다.”

이어 그는 뒤돌아 좁은 복도로 향하며 그녀에게 경고했다.

“처신 잘하시는 게 좋을 검다. 대장 명령만 잘 따르면 그 위대한 뿌리 임무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소여가 복도에 드리운 어둠에 완전히 잡아먹힐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던 세멜레아는,

뒤늦게 풀린 긴장에 한숨을 내쉬며 의자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한참 동안 착잡한 얼굴로 옆에 기대어 놓았던 투헨디드 소드를 어루만지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 * *

이른 아침, 베빌리와 약속했던 장소로 나가보니 그곳엔 이미 캐룸 길드에서 준비한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곳엔 나보다 더 일찍 나온 듯 보이는 베빌리가 한창 귀 뒤에 손을 얹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는데.

그 표정이 참으로 애틋해 보였다.

혹여나 나 때문에 그 애틋함이 끊길까 봐.

멀리서 그의 목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 나는 그렇게 한참 후에나 마차 쪽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베빌리.”

“오셨습니까, 디안님!”

“일부러 보려던 건 아니지만, 참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저 때문에 당신의 애달픔이 더 고프게 된 것 같아서.”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사람 옆엔 항상 어머니께서 함께하시니까요.”

괜히 나도 그리워지는구나.

“어머니는 잘 지내십니까.”

“물론입니다, 가끔 디안님의 안부를 묻기도 하셨지요. 이제 그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나저나 중립지역에서 어떻게 빠져나오신 겁니까? 그 전쟁통에서 탈출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그러니까 그게…,”

베빌리는 눈치를 쓱 살피다가 마차 문을 열고는 내게 살짝 고개 숙였다.

“그리 빨리 끝날 이야기는 아니라서요.”

그의 말에 나는 미소로 화답하며 마차 위로 올랐다.

그 마차 안엔,

처음 보는 귀 큰 자 둘이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서로 어색한 눈빛을 교환하는 와중에, 베빌리가 부랴부랴 마차 안으로 기어와 서로를 향해 손짓하며 바삐 말을 이었다.

“디안님, 이쪽은 제가 이끄는 원정대원들입니다. 세멜레아, 소여. 이분이 바로 제 은인이자 숲의 읍소를 단신으로 퇴치하셨던 분입니다.”

전쟁통에 무사히 중립지역을 탈출한 것도 모자라,

제법 건실한 자리까지 잡고서 잘 살아가고 있었구나.

“반갑습니다. 디안입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 인사를 건네자,

미묘한 웃음을 짓던 젊은 청년이 먼저 내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이야, 대장 말만 듣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다니 영광임다! 대장이 과장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삐까번쩍하게 생기셨슴다.”

버릇처럼 말끝에 특이한 방언을 덧붙인 그 남자는 잡은 손을 휘휘 흔들며 활기찬 말투를 이어갔다.

“소여라고 함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어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귀 큰 여인이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세… 멜레아에요.”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덜컥 놀란 얼굴을 하며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디안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유분방한 모습의 소여와는 달리,

그녀에게선 뭔지 모를 기품 같은 것이 흘렀다.

인간으로 치면 깃발 아래 태어난 가문의 자식 같은, 그런 느낌.

“그럼 디안님,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네, 베빌리. 출발합시다.”

그렇게 마차의 기수가 고삐를 흔들고, 바퀴가 슬슬 땅을 할퀴며 덜그럭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리케니엔.

베나즈 저택 인근에 마련된 학술원은 막 조합에서 공급된 책장 덕분에 제법 말끔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널브러진 책들이 다 치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두 사람 정도는 바닥에 드러누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 정도는 확보한 상태였다.

책 정리를 주도하던 기지어는 그 과정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호기심에 이끌려 찾아온 조엘이라는 자가 기지어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지어는 책을 정리하며 해당 책과 관련된 사담을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글쎄 조엘이 그 장단에 맞춰 대부분을 대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본인은 자신이 밟고 있는 이 땅의 생김새도 잘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인 줄 알고 있지만.

기지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우물 속에 빠진 별이리라.

그래서 이제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면, 그땐 어떤 색으로 반짝일까 기대가 되어서.

“자 조엘, 그럼 자네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것들을 내 알려주지.”

책들 사이에 드러누워 쉬고 있던 기지어가 벽 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조엘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네, 기지어님. 저 듣고 있습니다.”

조엘은 금방 두 눈을 반짝이며 기지어에게 집중했다.

“이 아이베리아가 궁금하다고?”

“그렇습니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기지어는 조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어 낱장으로 널브러진 종이 몇 개를 집은 기지어는 품에서 꺼낸 펜으로 그 위에 뭔가를 휘적거리며 그리기 시작했다.

“기지어님, 그것들 모두 뭔가가 기록된 문서가 아닙니까?”

“다 내 머릿속에 있으니 굳이 종이로 남아있을 필요는 없지.”

“어떤 책에서 읽기를, 머릿속만큼 변질하기 쉬운 저장고도 없다고 했습니다.”

“줏대 없는 자들의 볼품없는 탄식일 뿐이지, 진정 자신이 지식인의 길을 걷는다고 한다면 머릿속에 변치 않는 저장고 하나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쓱쓱, 거침없이 펜을 놀리는 기지어의 즉답에.

조엘은 매료된 듯 감탄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기지어는 휘적거리던 펜 질을 멈추고 그려진 결과물을 조엘에게 과시하듯 손짓했다.

그 손짓에 따라 시선을 옮긴 조엘은,

“음…, 그러니까….”

난색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이라기엔 그저 꼬불꼬불한 선으로 이은, 아이의 장난스러운 낙서처럼 보였으니까.

“형태가 볼품없는 것 같나?”

“아… 닙니다.”

“때잉! 볼품없는 것 맞아!”

“그… 렇군요.”

“하지만 형태는 안에 들어있는 것으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지.”

기지어는 뚜껑을 닫은 펜 끝으로 자신이 그린 덩어리 진 꼬물꼬물한 그림을 가리켰다.

“자, 이게 아이베리아라고 치자고.”

그 말에 조엘은 기지어의 그림 대신 자신의 머릿속에 비슷한 모습을 가진 땅덩어리를 떠올렸다.

“아이베리아는 현재 3강 체재로 이루어져 있네. 북방의 강국 ‘리시론’ 동방의 제국 ‘시르아’ 서방의 제국 ‘니플리엔’으로 말이야.”

기지어의 설명에 조엘은 자신이 떠올린 땅덩어리 안에 북으로는 리시론의 깃발,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시르아와 니플리엔의 깃발을 꽂아 넣었다.

비록 아이베리아에 대한 지식이 전무 한 조엘이라 할지라도, 그 3국의 깃발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리시론의 깃발은 푸른 배경에 잿빛 첨탑.

시르아의 깃발은 주홍 배경에 편자와 겹쳐진 메이스.

니플리엔의 깃발은 검은 배경에 위로 세워진 검.

“딱 보면 중앙이 비어있고 그 위와 양옆이 비대하게 채워져 있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이겠지만.”

기지어는 이제 자신이 그린 그림의 중앙 부분을 콕 찍었다.

“이 균형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네.”

“어째서입니까?”

“불과 20여 년 전까진 이 중심 땅이 기사왕에 의해 통합되었었으니까.”

“기사… 왕…!”

조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막 세 살에 접어든 아이들 사이에선 최고의 가십이었고,

열 살에 접어든 소년 소녀에겐 꿈이었으며,

스무 살 청년기에 접어든 이들에겐 빛바랜 전설로 남은.

그 기사왕의 이야기에 가슴이 벅차올랐으니까.

“비록 지금은 중심 땅의 통합이 무너져 내렸다곤 하나, 기사왕이 이끌었던 기사단의 파편들이 중심 땅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자리를 잡은 덕에 균형이 지금까지 이어진 걸세.”

“그렇군요…,”

“자 그럼 리케니엔이 어디인지 알려줄까? 리케니엔은 중심 땅에서도 서쪽에 치우친 곳에 있어.”

기지어는 자신이 그린 그림의 중심 부분에서 약간 왼편으로 치우친 곳을 가리켰다.

“음…, 이쯤이 바로 지금 조엘 자네가 밟고 있는 부분이 되겠군.”

조엘은 순간 자신이 머릿속에 그린 것들을 지우고 기지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저 부분이,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이로구나 하는 표정으로.

“어때, 궁금증이 조금은 해결됐나?”

기지어의 물음에 조엘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해결된 것보다 새로 생긴 것이 더 많아진 기분입니다.”

“그게 바로 지식인들이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허기야. 충족되는 순간 더한 허기를 느껴야만 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지. 자네는 그 배고픔을 평생 느낄 자신이 있나?”

“배고픔은 매일 겪는 것인데, 어찌 그런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허!”

기지어는 자기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 * *

베나즈의 저택에서 마련된 정찬.

바돈은 마주 앉아 식사에 열중하는 기지어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참았던 말을 꺼냈다.

“기지어,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지, 이고마고.”

“최소한 입에 머금고 있는 건 삼키고 말씀하십시오!”

바돈의 쓴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삶은 콩을 한 숟가락 더 뜬 기지어는 입안에 든 음식을 양쪽 볼에 나눠 담은 뒤 말했다.

“훗날 베나즈의 깃발에도 아주 좋은 일이 될 거요.”

그렇게 뜬 숟가락을 말끔히 비운 기지어는, 잠시 멈칫하고는 입안에 든 것을 꾸역꾸역 삼킨 뒤 바돈에게 물었다.

“바돈, 무슨 일이라도 있소?”

그의 물음에 바돈은 점잖게 포크와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영주님께서 리케니엔으로 돌아오고 계십니다.”

기지어는,

마치 불붙은 화약처럼 그 자리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그게 정말인가?! 언제, 언제 오신다는가?”

아니 그보다,

기지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돈, 가장 들떠야 할 자네가 어찌 그리 차분한가?”

“영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으니 시종 장으로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가, 그렇지. 그분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지 정작 우리는 깃발 아래 가장 기본적인 구색조차 갖추지 않고 있었구먼.”

기지어의 수긍에 바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베르융님께 연락하겠네, 병사를 이끌고 그분이 직접 리케니엔 변방서부터 영주님을 맞이한다면 흡족해하시지 않겠는가?”

바돈은 눈을 번뜩였다.

“그거 좋군요.”

“자네 안사람의 손재주가 조합에 비할 정도니 지금이라도 빨간 융단을 만들어 저택 입구에 깔아놓게.”

“그것만으론 너무 조촐한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리, 우리 영주님께서 어디 사치스러운 것을 쫓으시는 분인가? 간결하고 차분하게 진행하세나.”

그렇지, 그랬지.

바돈은 고개를 얼른 끄덕이며 숨겨왔던 기쁨을 그제야 얼굴 밖으로 드러냈다.

디안 베나즈가 돌아온다.

누군가에겐 소중한 이가 본래 위치로 되돌아오는 것이겠고.

다른 누군가는 원대한 첫걸음의 결실을 확인하는 순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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