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그물과 작살 (23)
영주 맞이 준비에 여념이 없는 바돈의 뒤를 아까부터 기지어가 쫄래쫄래 따라다니고 있다.
절름발이인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잘도 붙어 다녀서 바돈이 쉽사리 떨쳐낼 수도 없다.
결국엔 하던 일을 멈추고 한숨을 내쉰 바돈이 뒤돌아 기지어를 보며 말했다.
“하…, 또 뭔가.”
“시종장, 할리가 정찰 임무를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지?”
바돈은 순간,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감추지 못했다.
영악한 사람 같으니.
구태여 자신을 시종장이라 부르는 기지어에게 차마 싫은 소리는 할 수 없었는지.
바돈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흘이 지났지.”
“그럼 슬슬 돌아오겠구먼,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만큼 대단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거나.”
“그렇겠지, 할리는 사냥꾼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사냥감이 되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바돈. 아니 시종장.”
“뭔가?”
“할리는 어떤 사람이지? 숙맥 같아 보이다가도 어쩔 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동공이 베이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 내 궁금하군.”
기지어의 물음에 바돈은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생각해보게, 글라디옴이 신용한 사냥꾼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라면 그 실력이 어떻겠나?”
“그걸 몰라서 지금 자네의 그림자를 자청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언제 주도권을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바돈은 이미 기지어와 마주 앉아 있었다.
“멜르아 가문은 다른 일반적인 사냥꾼들과는 달리 새를 이용하지 않아.”
“새를 이용하지 못하면 숲에서 마주칠 수 있는 괴물의 위협은 어떻게 방지하나? 또 원하는 사냥감을 찾는 건 어떻게 하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기지어의 질문 공세에,
바돈은 손가락을 휘저으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야 간단하지, 가진 시력이 새가 제공하는 그것보다 월등히 뛰어나면 될 일이니까.”
“그게 가능한가? 아니지…. 가만!”
기지어는 스스로 해답을 찾으려 바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곤 끝내 눈빛을 반짝이며 찾은 답을 내놓았다.
“가문 자체가 별을 믿는 가문이었군, 그렇지?”
“그래 맞네, 멜르아 가문은 사냥꾼의 별 중 하나인 ‘베나텔라’를 믿지.”
“왜 그런 걸 내게 진즉에 알려주지 않았는가!”
“그래서 지금 묻는 그대에게 답해주고 있잖나.”
바돈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케니엔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반대로 이 많은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리케니엔의 그 누구도 베나즈의 깃발과 관련된 것들을 함부로 열거할 수 없었어. 나도 방금 케케묵은 기억 속에서 겨우 꺼내 간신히 말하고 있는 거야.”
바돈에게서 일말의 씁쓸함을 맛본 기지어는 섣불리 반응할 수 없었다.
이후,
바돈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가 당당히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그 묻힌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꺼내야 할 걸세. 알다시피 베나즈의 이름은 다시 역사하는 중이니까.”
“그래, 그래야지.”
이윽고 기지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리가 대단한 인재라는 건 이제 충분히 이해했으니, 그에 걸맞은 기대를 할 수 있겠어.”
“무슨 기대?”
“아마도 발기지르와 켄타나의 전투를 직접 목격한다거나 하는 그런 일 말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단편이라도 드러난 상대에 대해 미리 알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겠는가?”
“바꿔말하면, 할리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정찰대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과감히 적들의 땅에 발을 들이는 용사들이야.”
기지어의 말에 바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예전부터 할리는 티히트라의 땅에도 잘만 들어가 사냥을 해오는, 사냥꾼으로선 엄두도 못 내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삼아 왔던 강심장이었으니까.
“그런데 자네, 뭘 만졌길래 손에서 그리 구린 냄새가 나나?!”
다시 평상으로 되돌아온 바돈이 얼굴을 찌푸리자,
기지어는 절뚝절뚝, 저택 바깥으로 향하는 현관에 진입하며 넌지시 중얼거린다.
“아 그러고 보니 볼일을 보고 손 닦는 걸 깜빡했군. 가는 길에 씻어야겠어.”
* * *
할리는 숨을 짧게 나눠 쉬며 가파른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지금 하늘엔,
아이베리아에선 서식하지 않는 별종의 새가 무리를 지어 날고 있다.
이는 근방에 ‘떠 있는 눈’이 있다는 뜻이리라.
떠 있는 눈.
새때를 부리는 개인을 지칭하는 말로서 바꿔말하면.
인챈트가 배제된 야전에선 신과 같은 존재.
새때를 날려 광범위한 영역의 시야적 정보를 얻는 그들의 능력을 할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그가 지금 위험천만한 도박을 감행하는 중이다.
물론 할리가 이러한 도박을 감행하는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 제공을 장악하며 날아다니고 있는 새들은,
결정적으로 그 안구가 결손 된 흔적들이 보이지 않는다.
할리는 그러한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렇다는 건 근방에 있을 ‘떠 있는 눈’은 물리적으로 시야를 확보하는 유형이 아니다.
‘드루이드’
극한의 조련을 통해 새들의 행동만으로 정보를 취하는 작자임이 틀림없어.
해서 할리는 과감히 새들을 기만하기로 했다.
그렇게 절벽에 기우뚱 서 있는 산양처럼, 짧게 숨을 나눠 쉬며 느긋하게 움직이기를 몇 시간.
가지고 있던 힘이 거의 다하기 직전,
그 절묘한 순간에 새들은 취한 정보를 주인에게 알리기 위해 날아왔던 반대 방향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흐으….”
그제야 거친 숨을 마음껏 몰아쉬던 할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간신히 들어 절벽 등반을 마무리 지었다.
이어 허리에 맨 수통을 쏟아 흙을 질척이게 반죽하고,
그것을 드러난 살갗에 빈틈없이 바른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구릉 끝에 걸쳐진 언덕 위에 다다랐다.
그리고,
보았다.
저 멀리 평야에 대치하고 있는 두 깃발을.
할리는 벅차오르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 잠시 두 눈을 질끈 감아 동공을 어둠에 적셨다.
직후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에 또렷이 나타난 별처럼, 영롱한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 * *
빌비온 서쪽 경계에 걸쳐져 있는 평야.
빌비오나스.
그곳엔 지금 막 두 깃발이 일어섰다.
하나는 검은 바탕에 흰색 사자머리가 그려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붉은 바탕에 검은 카이트 실드가 그려져 있다.
그 중,
사자머리가 그려진 깃발 아래 잿빛 브리간딘을 걸친 사내가 슬쩍 동쪽에 펼쳐진 구릉지를 훑기 시작했다.
그는 발기지르의 다섯 기사 중 하나인 가르웨.
“새가 뭐라도 발견했소?”
그런 가르웨에게 질문한 또 다른 사내는 그 덩치가 매우 장대하여 풍기는 위압감이 대단했다.
“늘 그렇듯 소식을 듣고 몰려온 까마귀들일 뿐입니다. 테티르 경.”
가르웨의 말에, 테티르라 불린 거인은 호쾌하게 웃었다.
“뭐 좋지 않소? 그들이 역사의 증인이 되어줄 테니.”
“까마귀들이 그런 거룩한 일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둘 중 죽어가는 이에게 엉겨 붙어 살점이나 뜯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카하하핫! 그것 역시 좋소! 오늘 죽어가게 될 자들은 모두 켄타나 쪽일 테니까.”
테티르 론바즈.
발기지르의 다섯 기사이자 대장군인 그가 거대한 메이스를 고쳐 잡으며 고개를 까딱이자,
풀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그의 종자가 그레이트 헬름을 가져온다.
곧바로 종자가 건넨 투구를 뒤집어쓴 테티르는 걸친 백은의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자랑하듯 상체를 틀어 몸에 묻은 햇빛을 산산이 부쉈다.
“자, 가르웨. 슬슬 시작합시다.”
“저들은 진형 전투를 강요할 겁니다.”
“그럼?”
“늘 그랬듯이 테티르 경께선 길만 마련해주시면 됩니다.”
“카하하! 그거 좋지!”
고삐를 놀려 육중한 군마의 앞발을 치대게 하던 테티르는 이제 뒤로 도열 한 병사들 앞에 마주 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부딪쳐라, 부숴라, 꺾어라!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말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처럼.
빌비오나스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그의 음성에,
발기지르의 병사들이 잔 벼락으로 화답한다.
────── !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반대편에서도 방금 막 굴러떨어지는 바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호 간의 예열은 끝이 났다.
이제 불을 붙일 일만 남았을 뿐.
시작은,
테티르로부터.
부우우 ─── !
배꼽 아래를 지긋이 울리는 뿔피리 소리가 사방에서 화음을 쌓으며 울려 퍼지고.
발기지르의 병력이 테티르를 필두로 나아간다.
사십의 중무장한 창기병.
그 뒤로 이어지는 육십의 중기병.
이어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백의 보병이.
둥둥둥─
빌비오나스를 울린다.
그런 땅 울림에, 켄타나 측에서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후방의 궁병대였다.
파박!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시위 놓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면,
이내 저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점점이 그늘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쏴아악!
일순간 쏟아진 소나기에, 기막히게 틈새를 공략당한 기병 몇이 말째로 고꾸라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발기지르의 병력은 더욱 가열 차게 속도를 올렸다.
다시 한번,
파박!
켄타나의 궁병대가 시위를 놓자, 그제야 테티르는 들고 있던 메이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22년, 훌리가트]
[열 개 산을 정형한 바람]
“흐아아!”
테티르의 기합과 함께 푸른 빛을 내뿜는 메이스가 전방으로 크게 휘둘러지자.
그 시발점으로부터 절륜하게 터져 나간 바람이 전방으로 퍼져 나간다.
파바박─ !
허옇게 질린 바람 막은 그렇게 쏟아져 내리는 화살을 일거에 내팽개쳐버렸다.
하지만 켄타나는 초연한 기세를 유지하며 조속히 전방에 타워실드를 위시한 방진을 구축했다.
2중, 오르막 형태로 만들어진 진형 뒤로는 마치 가시밭처럼 창대가 곧추세워져 있어 다가오는 기병들에겐 죽음의 덫과 같았다.
물론 선두의 테티르에겐 예외였다.
그것은 켄타나 병사들에겐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22년 훌리가트는 엄연히 장악형 인챈트였지만,
테티르의 성향과 맞물려 마치 재림형 인챈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실 그런 것들은 지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테티르의 훌리가트가 휘몰아치면, 일대는 그의 의지대로 장악되었고.
뒤따라오는 아군 진형이 적들에게 확실한 패배를 선사해왔었으니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지역을 장악하는 건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팍── !
테티르의 메이스가 아래에서 위로 올려 쳐지자, 방진 일부가 위로 솟구쳐 날아가더니 허무할 만큼 쉽게 길이 열려버렸다.
장정 넷이 날아가고, 조각난 타워 실드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여파를 맛본 자들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테티르는 그레이트 헬름 속에서 두 눈을 번뜩이며 드러난 틈새를 놓치지 않고 말을 몰았다.
그렇게 방진이 허무하게 무너지는가 싶었지만.
그런 테티르 앞을 한 젊은 사내가 가로막아 섰다.
범상치 않은 검은색 코트 플레이트를 걸친 사내는 들쳐져 있던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내리며 롱소드로 테티르를 가리켰다.
“나는 다이드 가문의 장남 잭슨이다.”
이윽고,
그의 롱소드가 푸르게 빛나니.
[30년, 매니서스]
[쏟아져버린 무거운 산의 세월]
이름난 산 하나를 붕괴시킨, 그 산사태의 원초적인 힘이 그의 육신에 재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직전,
“나는 테티르 론바즈으으으─!”
다이드의 잭슨은 순간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테티르가 느닷없이 코앞에 나타났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것을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그렇게 테티르의 메이스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잭슨의 머리를 쓰고 있는 아멧 헬름 째 으깨버렸다.
전쟁은,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