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그물과 작살 (24)
되돌아오는 길은 제법 수월했다.
결정적으로 중립지역을 거쳐 지나가지 않은 게 컸다.
이 모든 건 캐룸 원정대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적재적소에 최소의 인원들이 항상 배치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마주한 같은 원정대원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이동수단부터 해당 지역을 통과하기 위한 부수적인 일들의 해결까지, 이동하는 내내 나는 그저 길을 긁는 바퀴의 감각만을 온몸으로 느끼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꼬박 하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나와 베빌리는 지친 기색 없이 열렬히 대화를 나누었다.
마마 오르델의 안부.
또 그때 만난 귀 큰 이웃들의 안위.
원정대의 환경과 거기서 만난 인연.
마지막으로 살라엑스의 노래로 청혼에 성공한 이야기.
재밌었다.
그리고 그리웠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잠깐이지만 중립지역에서 살았었던 내 옛날 냄새가 느껴졌으니까.
반대로 나도 베빌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중립지역에 전쟁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떠난 상황이었기에, 그곳에 정확히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해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썼었던 가면을 벗지 않았다.
마치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 마냥, 이제는 그 가면이 내 얼굴이 되어버렸으니 벗을 필요도 없겠지.
맥레인은 나의 대부였고.
그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만 설명했다.
베나즈라는 이름이 아이베리아에서 어떤 의미인지, 또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이 무엇인지.
행여 내가 지금 그 땅에서 해내고자 하려는 일이 어떤 것인지는 그가 알 필요도 없고,
또 알아서 좋을 것도 없으니.
명목상으로 베빌리는 내 영지에 나타난 괴물과 그 괴물이 점거한 숲길의 개척을 위해 동행하는 것뿐이다.
각설하고 다시 베빌리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의 입에서 나온, 원정대와 관련한 이야기들은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아무래도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왜, 처음 맛보는 진미에 황홀감을 느끼는 것처럼.
귓속으로도 별안간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이야기가 들려온다면 당연히 황홀감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세상에 나타난 현상을 조사하고,
현상으로부터 나타난 재앙을 마무리 지으며,
재앙에서 나타난 결실을 갈무리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를 어렴풋이 떠올리게 했다.
동시에 잔잔한 마차 위에서 들려주었던, 매튜 아저씨의 향기도 느껴졌고 말이야.
베빌리는 캐룸 원정대에 정식으로 입단하고 난 직후, 다섯 섬과 여섯 땅을 밟으며 여러 의뢰를 해결했다.
아이들의 공포를 먹고 자라난 허수아비부터, 악마로 지칭된 별을 숭배한 광신도들의 괴물까지.
그러면서 만난 동료가 바로 지금 동행하고 있는 귀 큰 자 소여와 세멜레아였다.
* * *
아이베리아,
들어 본 적이 있다.
기사의 땅이라고도 불렀지 아마?
위대한 뿌리 중 하나인 ‘맨드’가 있는 곳이라 그리 낯설게만 느껴지진 않아.
다만 그곳은 인간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서 다른 귀 큰 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땅이다.
그럼에도 어떤 멍청한 귀 큰 자들은 그 명예라는 것에 취해 인간 사회에 뒤섞였다고 들었는데,
솔직히.
관심이 갔다.
저 디안이라는 인간에게.
길잡이가 깃발을 가진 인간과 연줄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의 깃발이 가진 영향력은 아이베리아 내에서 어느 정도지?
주성은 갖고 있을까?
있다면 성벽의 높이와 내성의 규모는?
어쩌면 그가 가진 영향력을 발판삼아 내 앞길을 도모할 수도 있겠어.
“세멜레아.”
한창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대뜸 베빌리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상체를 움찔거렸다.
“무슨 일이죠, 베빌리?”
“막 소여의 이야기가 끝나서요, 혹시 할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아뇨, 없….”
슬쩍 베빌리 옆에 앉아 있는 디안의 눈치를 살핀 나는 마저 뱉으려던 말을 얼른 삼켜야만 했다.
“저는 위대한 뿌리 ‘고라드’ 출신, 세멜레아에요.”
그래, 깃발 가진 인간에게 위대한 뿌리와 연줄이 생기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겠지.
서로 상부상조하자고.
그런데 내 기대와 달리, 그는 그저 아리송한 표정으로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어 베빌리가 그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자.
“저는 디안 베나즈입니다.”
그제야 정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위대한 뿌리라는 말조차 처음 들어봤단 거군.
그래, 이제 알 것 같네.
그의 깃발 아래엔 성벽도, 이렇다 할 내성도 없다는 걸.
* * *
소여는 실눈 속 기밀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로 세멜레아를 훑었다.
그러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시선을 디안 쪽으로 옮기면, 그는 소여의 그 눈빛을 바로 느끼곤 눈을 마주쳐 왔다.
다르다.
그 세멜레아보다도.
소여는 옅은 미소와 함께 눈을 마주친 디안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는 아이베리아를 겪진 못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용병으로 일해왔기에 그곳의 이야기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용병 적인’ 일로써.
그와 함께 싸웠던 선배 용병들은 하나같이,
아이베리아에서 용병 일을 하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다고 했었다.
인간 기사들은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흉기 그 자체고, 그 기사들의 우두머리는 대부분 인챈트까지 가지고 있어 마주치면 도망치는 것밖엔 답이 없다지.
디안 베나즈.
아이베리아에서, 그것도 깃발을 가진 자라면 그도 필시 기사일 것이다.
그것도 깃발의 주인이니 기사들의 우두머리겠지.
인챈트야 당연히 소지하고 있을 테고.
딱 보아도 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워 해머가 인챈트의 근원일 것이리라.
다만,
소여는 실눈 속으로 시선을 감춘 채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그는 오랜 실전을 겪어온 탓에 딱 규정해서 설명하기 힘든 어떤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강자와 마주했을 때 특히 극렬히 반응해 소여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리고 지금 그 감각이 디안을 만난 직후부터 그의 머릿속을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이건 비단 기사나 인챈트 따위의 범주를 가름하는 감각이 아니었다.
그래,
보통 소여의 그 감각을 건드리는 존재들은 대게.
‘비전’의 소유자.
마음만 먹는다면 전승의 씨앗으로 대의 뿌리를 이어 세상에 무의 흔적을 남길 수도,
아니면 패배를 모르는 고독한 늑대로 그 명성을, 그 악명을 떨칠 수도 있는 무지막지한 기술을 보유한 자.
세멜레아도 비전을 갖고 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간 같이 일해온 용병들 가운데서도 마주한 적들 가운데서도 그의 감각이 이렇게 극렬하게 반응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이거 대장 연줄 가운데 이런 미친 거물이 있었을 줄이야.’
속으로 중얼거리던 소여는 혹여나 그 심중의 언어도 간파당할까 디안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기세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쨌든 그도 잔뼈가 굵은 전사였기에.
아이베리아의 단편이기도 한 디안을 마주하면서, 그 땅에 대한 동경심이 더욱 부풀어 올랐으니까.
* * *
배를 타고 아이베리아 남단에 진입한 뒤, 말을 타고 북쪽 길로 오른다.
벤투스는 아이베리아의 거의 모든 길을 알고 있는 듯, 거침없이 움직였다.
만약 마법이 걸린 나침반이 있다면, 최소 그 능력에 배가 되어야 벤투스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벤투스는 이미 내게 가장 소중한 동지이자, 중요한 친우였다.
나무들이 먼저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길로 들어가, 구릉이 숨겨놓은 비경에 진입하면 놀란 형형색색의 새들이 도망치듯 날아가고.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뿜는 나뭇잎 사이를 거슬러 거대한 길에 진입하면,
중간중간에 깃발이 걸린 성채가 보인다.
이어 험한 계곡 하나를 더 건너면, 그때부턴 내게 아주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지금 막 빌비온에 내가 접어들었다는 걸.
그리고 그 빌비온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앞쪽으로 중무장한 흑기사 하나가 나타났다.
안장 옆쪽, 특수 제작된 검집에 가로 매달린 대검.
밤하늘을 태워 나온 잿가루를 묻힌 듯, 반짝임조차 없는 묵색 갑주의 그 기사는.
“베르융?”
“영주님, 이곳으로 진입하실 줄 알고 미리 나와 있었습니다.”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윽고 베르융이 고삐를 놀리자, 양쪽 옆길로 빠져 있던 두 명의 기사와 여덟의 기병이 나와 내 일행을 감쌌다.
비록 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이 느껴질 만큼 무장한 군인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두른 정신은 열 중갑도 부럽지 않았다.
자로 잰듯한 제식.
그런 그들의 등 뒤로 흩날리는 베나즈의 깃발.
“지금부턴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베르융의 담담한 말을 시작으로, 나는 장대해진 맘을 품고 리케니엔으로 향했다.
* * *
냄새라는 건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단순히 코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치부할 수도 없으면서, 동시에 기억이라는 인상 속에서도 포함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그렇다.
그리웠던 리케니엔의 냄새가 느껴졌으니까.
그것은 코가 아닌 기억으로서 느낀 것이었으니까.
초입에 다다르자 리케니엔의 주민 몇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길로 나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은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멀리서 우리 뒤를 쫓아 뛰었다.
그렇게 저택에 진입하자,
미리 나와 있던 바돈의 얼굴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구나.
“바돈.”
“영주님, 여정은 편안하셨는지요.”
저택 입구서부터 깔린 못 보던 융단, 뒤따라 들어오며 땀이 찬 투구를 벗는 베르융.
그들을 아우르듯 보던 나는 미소와 함께 바돈에게 화답했다.
“덕분에요.”
그 말에 바돈은 뒤에 멀찌감치 서 있던 세라와 은근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손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저 세 분께 방을 마련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돈은 저택 고용인들을 시켜 베빌리와 두 귀 큰 자를 저택 내 방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베빌리, 자세한 내용은 내일 나눕시다. 오늘은 턱밑까지 차오른 여독을 푸는 데 집중하기로 하죠.”
분위기에 감화된 것일까,
베빌리는 나를 동경하는 듯한 눈빛으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렇게 그들이 각자 방을 안내받기 위해 이동하자, 바돈이 기다렸다는 듯 내 뒤로 달려들었다.
“어떠셨습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식사는 거르지 않고 잘하셨습니까?”
걸치고 있던 어스름을 받아들고, 마치 품질 검사를 하는 것처럼 나를 살피던 그는,
“세라에게 다음부터 더 좋은 옷을 마련해두라 하겠습니다, 못 보던 회중시계로군요? 새로 장만하신 건지요? 내일 바로 조합에 맞춤 시계를 여러 개 주문하겠습니다.”
“… 바돈.”
“네.”
“고맙습니다.”
내 감사에 대뜸 놀랐는지 그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이어 한창 점잖아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올라가시지요.”
“참, 베르융 님.”
집무실로 향하기 전,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베르융을 부른 나는 살짝 고개 숙여 그에게 예를 표했다.
“참으로 든든했습니다.”
그러자 베르융은 투구를 옆에 끼고 내게 짧게 고개 숙였다.
이제 집무실로 들어간 나는 그간 기지어가 말끔하게 수렴하고 정돈한 문서들을 살피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 순간,
밑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윽고 이곳으로 점점 커지는 쿵쾅거리는 소리는 문 앞에서 뚝 그쳐.
똑똑.
“기지어, 들어오십시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칵 열린 문 너머, 절뚝절뚝 기지어가 기습을 하듯 안으로 들이닥쳤다.
“영주님!”
반짝반짝,
금방이라도 그의 눈에서 운석이 다발로 떨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곧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통찰을 두 눈에 담은 채 곧장 근원적인 질문을 해왔다.
“된 것입니까. 0의 주인이시여.”
그 질문에 나는,
“막 눈을 떴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