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57화 (157/365)

157화. 그물과 작살 (25)

“폴란, 영주님을 코앞에서 뵙는 건 처음인가?”

기지어의 말에 폴란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긴장할 것은 없어, 그분이 자넬 잡아먹진 않을 테니. 그저 자네가 본 것, 또 한 일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말하기만 하면 되네.”

“알겠습니다.”

늦은 저녁.

접견실로 향하는 복도 앞에서 기지어와 폴란, 두 사람이 막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있다.

“준비됐나?”

“네.”

이윽고 두 사람이 성큼성큼 복도를 거쳐 접견실 앞에 멈춰 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바돈이 문을 두들기며 작게 입을 열었다.

“영주님, 기지어 도와 폴란 지빈이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들어오세요.”

폴란은 덜컥 마른 침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이제 문이 열리고, 간소화된 문서를 보고 있던 디안 베나즈가 빛나는 눈동자로 눈을 마주쳐온다.

폴란은 얼른 그 앞에 고개를 숙였다.

사실 폴란은 기지어의 말을 듣기 전까진 디안 베나즈를 그저 속이 좀 깊은 어린 영주, 제법 대범하지만 무모한 영주쯤으로 평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0의 주인.

지금은 전설로 남아버린 기사왕의 재목에 가장 가까운 존재.

베나즈의 오명을 씻는다는 명분 아래 자라나고 있는 거목.

폴란에게 디안 베나즈는 이제 꿈과 같은 것이다.

“그럼, 시작할까요.”

디안은 들고 있던 문서를 내려놓고 깍지 손을 꼈는데, 그런 그의 손에 끼워진 인장엔 아직 덜 굳은 밀랍이 묻어 있었다.

“영주님의 결제가 필요한 서류는 없었을 텐데요?”

폴란의 긴장도 누그릴 겸, 기지어가 그 인장을 보며 묻자, 디안은 자신의 손가락에 걸린 인장을 바라보며 답했다.

“공문 하나를 작성하느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공문이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디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문서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이를 놓칠세라, 문서를 받아든 기지어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폴란은 그 안에 담긴 글씨를 눈으로 흡입하듯 바삐 움직였다.

[통제령]

현 시간부로 리케니엔의 서쪽 숲 출입을 금한다.

-디안 베나즈-

기지어는 눈을 반짝이며 디안에게 재차 물었다.

“서쪽 숲 괴물의 토벌을 시작하시려는 거군요.”

“정확히는 원정입니다. 이번에 데려온 손님들은 그 일에 도움을 줄 친구들이지요.”

“그거 나쁘지 않군요. 확실히 길잡이가 있다면 우리 병사들의 피해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아뇨, 기지어. 원정에는 저 혼자 갑니다.”

그 말에 기지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기지어, 구태여 병사들의 손실을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진형을 갖추어줄 한 명의 병사조차 소중한 실정이니까요. 더군다나 베르융의 휘하에서 조금이라도 훈련을 더 받는 것이 군사적으로도 이득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디안의 말에,

기지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0의 주인이시여, 뜻대로 하소서.”

가진 힘의 정돈, 그리고 숙달.

디안의 의도를 곧바로 파악한 기지어였다.

그 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폴란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함에 저도 모르게 짝다리를 짚었다.

곡식이 얼마나 나왔느니, 누군가의 땅을 빼앗아야겠다느니 하는 지루한 공론만 들어왔던 그에겐 참으로 새로운 것이었으니까.

“서쪽 숲의 개척이 끝나면, 그곳의 귀 큰 자들과 홀로 대면할 생각입니다.”

“그들의 속내는 마치 막바지 봄에 피어난 봉오리 같아서, 영주님께 만개할지 아니면 끝내 닫고 있을지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혼자서는 너무 위험합니다.”

“그래서 혼자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혼자 가는 게 우르르 몰려가는 것보다야 그 변덕스러운 봉오리에 그림자를 덜 지지 않겠습니까?”

기지어는 마른 입술을 다시며 수염을 실룩거려야만 했다.

실수했다.

괜한 비유를 했다가 역으로 당해버렸어.

디안 베나즈는 웬만한 비유론 논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마치 토르킨 선생처럼.

기지어는 하는 수 없이 수긍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우르르 몰려가는 것보다 영주님 한 명이 만드는 그림자가 더 클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디안은 그제야 폴란을 쳐다보았다.

“반갑습니다. 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군요, 폴란.”

그분이 내 이름을 부르셨어.

폴란은 한쪽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인사했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폴란 지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디안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폴란의 입을 주시하자,

크흠, 목을 매만지며 방열 준비를 마친 폴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보고를 시작했다.

“우선 티히트라의 지원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폴란이 운을 떼기 무섭게 관련된 서류를 골라 집어 든 디안.

이내 움직이기 시작한 그의 눈동자에 맞추어 폴란이 유창하게 말을 잇는다.

“상기한 내용대로 나흘 안에 군마 스물, 군용 서코트 사십 벌을 리케니엔에 보급할 것이며 앞으로 계획된 전투에서는 보병 육십, 기병 이십 총 팔십이 2군 형태로 조이 크레비디 경에게 배치될 겁니다.”

“블로사 가문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티히트라 내에서 그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블로사 가문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시기를 엿보는 중입니다.”

디안은 보고 있던 서류를 짚으며 폴란을 바라보았다.

“아모랑 가문의 몰룬이 2군 부관으로 임명받길 원한다고 적혀있군요.”

“그렇습니다, 비록 한쪽 팔을 잃었다곤 해도 현재 티히트라 내에 그와 견줄 기사는 없을 것입니다. 또 이번 전투로 베나즈 가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내세우고 있어 부관 정도는 믿고 맡기셔도 무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디안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폴란, 티히트라로 해당 사안에 대한 승인 공문을 작성해서 내일까지 제출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리케니엔의 부재 속 공백을 차근차근 채워나가기 시작하는 디안의 눈빛은 점점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공백을 빽빽하게 채워 넣는 기지어와 폴란의 열기도 갈수록 뜨거워졌다.

* * *

평복으로 갈아입은 세멜레아는 저택 홀로 내려가 그곳에 비치된 것들을 차근차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조숙한 여인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레 묻는다.

“무겁지 않으십니까?”

이에 세멜레아는 반사적으로 메고 있던 투핸디드 소드의 어깨끈을 꽉 붙잡고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제법 예민한 반응에 조숙한 여인은 살짝 놀란 눈치를 보였지만, 이내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인사했다.

“저는 세라 앵킬로라고 합니다.”

“세멜레아입니다.”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아뇨, 괜찮습니다.”

세멜레아는 세라에게 주었던 시선을 거두며 차갑게 대꾸했지만, 내심 마음이 불편했는지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질문을 이었다.

“베나즈 가문의 역사는 어느 정도 됐습니까?”

“깃발로 역사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답니다. 후대에 맥레인 베나즈가 기사로 서임 받으면서 그 깃대가 우뚝 솟았으니까요.”

맥레인 베나즈…,

맥레인 베나즈?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그 이름에 세멜레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 인간의 이름이 귀 큰 자들의 사회로 널리 퍼지는 경우는 드물기에 그 궁금증은 더욱이 증폭되어,

“음…,”

세멜레아는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생각 읽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끝내 원하는 기억을 건져 올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귀 큰 자들의 사회에서 아직 씨앗에 해당하는 어린 나이였고 맥레인이란 이름은 그보다 더 어린 나이 때 스치듯 들어봤던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귀 큰 자들의 사회에 흘렀던 이름치고는 아이베리아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토록 작을 리가 없을 텐데.

“그럼 지금 계신 영주님이 그 후대이신 겁니까?”

세멜레아의 질문에 세라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맥레인 베나즈의 뒤를 잇는 유일한 후계지요.”

“그렇군요…,”

과정적으로 어쨌든,

몰락을 면치 못한 깃발인 것 같네.

비슷한 동질감을 느낀 세멜레아는 혀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맛에 표정을 일그러트려야만 했다.

세멜레아, 그녀도 엄연히 귀 큰 자들의 사회에선 위대한 뿌리 출신이었지만.

그 뿌리에서 나온 것은 과실이 아닌 낙엽이었기에.

이렇게 그녀는 내몰리듯 강요된 과업을 이루기 위해 방랑을 하고 있었으니까.

베나즈의 깃발을 발판 삼아 도움을 받아볼까 했지만, 그녀는 얼른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래도 괜찮다.

대신 이곳 원정을 통해 트로피를 채울 수 있다는 건 변치 않으니 말이다.

* * *

방황하던 길잡이를 구원해 주었던,

디안 베나즈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던 베빌리는 안내받은 방 안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왔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그러면 그에게서 느껴지던 그 허한 공백을 조금이나마 채워줄 수 있었을까 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나와는 갈 길이 다르구나.

지금은 그저 잠시 길이 마주한 탓에 동행하는 것일 뿐.

그래도 디안님이라면 멀어져가는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을 끝까지 친우라고 생각해주시겠지.

베빌리는 결심했다.

이번 원정에 자신이 지금껏 익히고 배운 모든 것을 쏟아내겠노라고.

디안이라는 이름 아래 뿌리내릴 수 있었던 베빌리라는 나무는, 이제 맺힌 과실로 그 보답을 할 것이리라.

장비를 점검하고, 날씨 파편이 든 유리병들을 재정돈하며 감각의 날을 세우고 있을 때.

똑똑.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들겼다.

“누구십니까?”

그의 말에 열린 문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민 이는,

“안녕하십니까, 저는 바돈 앵킬로라고 합니다.”

정숙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중년의 남자였다.

물론 그의 어깨 뒤로는 반가운 얼굴의 소여가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 디안님께서 모두 참석하시길 바라고 계시니 시간이 괜찮다면 조금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바로 가죠.”

* * *

기지어와 폴란을 통해 부제의 공백을 거의 다 채웠다.

그 가운데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단연 빌비온의 동쪽 두 깃발의 일이야.

발기지르와 켄타나가 전쟁에 돌입했고, 그 중간 결과는 인근에 나가 있는 할리가 쥐고 있다.

그 말인즉슨 할리의 복귀가 곧 모든 일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이후 서쪽 숲 일이 끝나면 조이와 베르융을 만나 내가 가진 뜻을 전달할 생각이다.

그것은 차분하게 계단을 밟아 오르느라 숨겨왔었던 내 본의이자, 베나즈라는 이름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향하는 단초다.

거기까지.

만찬 자리에 슬슬 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다.

지금부터는 오랜 이동의 여독을 푸는 데에 집중하자.

아니, 집중하려고 했는데.

언제나 일은 불현듯 발생하고야 만다.

막 초에 불을 붙이면 유독 나부끼기 시작하는 바람처럼.

저택 밖,

다급한 발굽 소리가 크게 들려오다 뚝 그치고.

벌컥.

저택 문이 열리며 그 너머로 가죽 갑옷을 입은 할리 멜르아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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