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그물과 작살 (26)
할리가 복귀하고 난 뒤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조이와 베르융, 두 기사가 저택으로 찾아왔다.
세라는 손님들을 따로 조용한 별채로 안내했고, 그사이에 나는 베빌리에게 양해의 눈빛을 건넸다.
그 눈빛에 베빌리는 이해의 눈빛으로 답해주었다.
바돈은 고용인들을 대동해 자리를 치우고, 붉은 바탕에 금실로 테두리를 마감한 커튼을 우리 주위에 내걸어 순식간에 홀 안에 독립된 공간을 만들었다.
이제,
나는 상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막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는 할리를 정식으로 맞이했다.
“하… 할리 멜르아.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지금 복귀했습니다.”
특유의 말을 더듬는 그의 버릇이 나왔으나, 그의 심중에 담긴 사안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그 실수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측으로는 기사 조이와 베르융.
좌측으로는 기지어와 폴란이 나란히 앉아 모두 할리의 입에 시선을 집중한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할리.”
그에게 격려의 말을 전한 나는 바로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정찰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할리는 땀에 젖은 금발을 찰랑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은 막 집중했을 때 나오는 그것과 같았다.
“우선 이것을 좀 보십시오.”
담담하게, 말을 절지 않고 즉답한 할리는 품에서 낡은 양피지를 꺼내 모두에게 보이도록 펼쳤다.
그것은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려진 양측 진형도였다.
그런 진형 위로는 깃발이 굉장히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제가 목격한 1차전에서 휘날렸던 깃발들과 그 대치 상황을 그대로 그려온 것입니다.”
기지어는 그것을 보자마자 눈에 힘을 주었고, 폴란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조이는,
“허.”
턱밑까지 무언가가 차오른 것처럼 한숨을 턱 내쉬었다.
“베르융,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그래, 론바즈의 깃발이 틀림없다.”
이어 베르융은 내게 시선을 맞춰왔고, 나는 그런 그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 계속하십시오.”
“벌어진 1차전은 전투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발기지르 측의 압승이었습니다. 켄타나의 방진은 선봉 기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지요.”
할리의 보고에 조이와 베르융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2차전에선 상황이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할리는,
당시의 그 순간을 회상하며 우리에게 본 것, 느낀 것을 모두 늘여놓기 시작했다.
* * *
켄타나의 2중 방진이 한 기사에 의해 유린당했다.
그것만으로도 테티르 론바즈가 이끄는 병사들의 사기는 고취될 대로 고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사기가 오히려 그들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방진을 구축한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퇴각하는 과정에서, 론바즈 측 병사들이 그들에게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분명 테티르의 추격 섬멸하란 호승심 넘치는 명령 때문일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진작에 알아차리고 있었던 가르웨는 척후병을 론바즈 측에 보냄과 동시에 피리를 불어 복귀 신호를 날리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론바즈의 병력 가운데 그 누구도 피리 소리에 반응하는 이가 없었다.
뒤늦게 가르웨는,
그것이 인챈트 때문이란 것을 알아차리고 본대를 이끌고 진형을 전진 배치하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27년, 프리스모스]
[흘러버린 고산의 고인 바람]
“벌써 일대를 장악해버렸단 말인가?! 대체 무슨 인챈트기에…!”
먹먹해지는 양쪽 귀를 느끼며 경악을 금치 못한 가르웨가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소리쳐 보지만.
“기수는 방향을 틀어 부대를 후방으로 이동시켜라!”
아뿔싸.
이젠 그의 입 밖에 나오는 목소리조차 본인에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같은 장악형 가운데서도 그 장악력이 손에 꼽을 만큼 대단한 그 인챈트는,
테티르 론바즈와 같이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장악한 일대 내 감각 하나를 차단함으로써, 진형전으론 압도적인 우위를 강제하는 무시무시한 인챈트였다.
그리고,
이제 그 주인이 평지를 가로지르는 우측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두두두─── !
땅을 울리는 매서운 기병대의 발굽 소리.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목표물은 땅의 미약한 진동만을 느낄 뿐, 기병이 내는 묵직한 소리는 듣지 못한다.
진작에 우측 병력을 발견한 가르웨는 부대의 시선을 그쪽으로 집결시키기 위해 소리쳐봤지만,
“우측 선봉으로 진형을 구축하라!”
역시 들리지 않는 아우성에 불과할 뿐.
갑자기 감각 하나를 차단당해 혼란에 빠진 병력은 우왕좌왕하기에 바쁠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기병은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 끝내는 그들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곧이어 우측으로 쇄도한 기병의 선두.
켄타나의 기사이자,
또 다른 이름으로는 무언의 기사.
가버트 로셀란이 인챈트가 깃든 창대를 내리깔며 제일 먼저 발기지르의 병사 하나의 목을 꿰뚫었다.
공포.
발기지르의 병사들은 분명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무언 속에서 말에 짓밟히고 워해머에 골통이 부서지며 창에 꿰어 허공에 날아다녔으니까.
부서지는 소리 없이 부서지는 것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큼 인지에 부조화를 느끼게 하는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가르웨와 그의 기수를 포함한 정예 기병은 차단당한 감각 속에서도 송곳처럼 맹렬히 솟구쳐 쇄도하는 기병 사이를 역류했다.
[33년, 메느레프]
[가벼운 구름의 마지막 비명]
가르웨의 아밍소드, 그 폼멜에 새겨진 인챈트는 대표적인 군림의 종류인 벼락.
그중에서도 메느레프는 특히 속도에 치중되어있어,
달려가는 말 위에서 엄청난 신체의 움직임을 보이며 대번에 마주 오는 기병 다섯의 허리를 끊어버렸다.
옆으로 허리를 숙여 극단적으로 사거리를 늘리는, 동선이 매우 긴 동작이었음에도 동시에 쇄도하는 양방 병사를 동시에 베어내는 신기를 발휘하는 그의 뒤로.
아직 펄펄 끓는 호승심을 자랑하는 정예 기병이 결사를 다짐하며 저항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창 퇴각하는 보병을 쫓아 섬멸하던 테티르가 끝내 뒤쪽에 벌어진 상황을 직시했다.
“본대가 위험하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전군의 뇌리를 일깨운 테티르가 일거에 고삐를 틀어 후방으로 달려나가자, 뒤늦게 병사들이 그 뒤를 쫓아 움직였다.
그렇게 후방에 진입하는 동시에 테티르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메이스를 허공에 휘둘러 쳐.
팍──── !
일대를 장악한 고산의 공기를 걷어버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속속들이 들려오는,
파박!
캉!
퍼억!
생생한 충돌음들.
그러나 빼앗긴 일대의 감각이 되돌아오는 그 순간, 이미 가버트는 창을 높이 올려 기수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높게 치켜세워져 휘날리는, 회색 배경의 그레이트 헬름 문양이 그려진 그 깃발 아래.
가늘게 울려 퍼지는 뿔피리 소리를 반주 삼아 가버트가 이끄는 기병들이 퇴각을 시작한다.
쏜살같이 치고 빠져버린 그들 뒤로 남은 것은,
처참하게 유린당해 절단된 병사들뿐이었다.
* * *
할리가 보고한 그 내용은 듣는 것만으로도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베르융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가 잠깐 끓었는지, 주먹을 꽉 쥔 채였다.
할리의 말을 끝으로 이어진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기지어였다.
“결국엔 1, 2차 연전을 통해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지만 서로의 피해는 극심히 누적됐다는 말이군요.”
그러면서도 그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그들 아래 모든 깃발이 한 장소에서 휘날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뻔했습니다. 단 몇 개의 깃발이 모여 만든 전투가 그 정도라니…,”
옆에 있던 폴란도 멍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과연…, 제아무리 중원에서 벗어난 서쪽 땅이라고 해도 그 실권자들이 가진 힘은 무시무시하군요.”
이제 그 둘과 반대로 비교적 초연한 반응을 보인 조이와 베르융은 벌써 머릿속으로 여러 수 싸움을 하는 듯 보였다.
이윽고 조이가 굳게 닫고 있던 말문을 열었다.
“영주님, 흰색 사자 머리 깃발의 주인인 테티르 론바즈는 기사왕의 선봉 칠 기사 중 하나였습니다. 그 역시 아이베리아의 살아있는 전설 중 하나지요.”
그 말에 폴란은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이어서 베르융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색을 표했다.
“그런데 그런 테티르를 농락하는 자가 있다니, 투구가 그려진 깃발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동의하네, 베르융. 할리의 말을 들어보면 그 깃발의 주인은 장악형 인챈트를 가지고 있을 거야. 그것도 진형 전에 아주 위력적인.”
생생한 할리의 증언을 토대로,
순식간에 적을 상정하기 시작하는 두 기사의 날카로움에 주위 공기가 긴장감에 젖어 들었다.
기지어는 그 긴장감을 꿰뚫고 두 기사에게 물었다.
“이들의 연전이 얼마나 이어질 것 같습니까?”
그러자 조이는 할리를 보며 되물었다.
“분명 테티르가 방진을 깨고 난 직후, 켄타나 측에 세워진 깃발 하나가 내려갔다고 했었지. 할리.”
“그렇습니다.”
대답을 들은 조이는 일말의 고민 없이 기지어에게 답했다.
“지금까지의 전투 결과로만 놓고 본다면 발기지르가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우위가 점해지기 시작하면 그 간극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벌어지지요.”
“그렇다는 건 결착까지의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조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게로 집중되었다.
그 집중에 화답하듯 나는 머릿속으로 정돈한 명령들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베르융, 내일부터 군을 재편해 조이와 양분하도록 하십시오. 티히트라의 원군은 우리 군과 명확한 훈련량의 차이를 보일 것이니 따로 별동대로 빼야 할 겁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폴란, 기사 몰룬을 리케니엔으로 불러들이십시오. 그는 베르융의 임시 부관으로 그가 지휘하는 합동 훈련을 치러야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기지어, 빌비온 동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보급로를 설계할 수 있습니까?”
기지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그것을 기꺼이 수행할 인재가 하나 있습니다.”
“그럼, 맡기겠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내 계획을 말할 차례다.
“베나즈의 깃발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는 지금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난 그들 상호 간에 일어난 출혈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할 생각입니다. 이 깃발이 가진 명분에 저들이 수긍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겠지만.”
말투를 확 바꿔 단호함을 곁들인 나는 무정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저는 아주 철저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그들을 수긍시킬 생각입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힘이 될 수도,
서쪽 숲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만난 귀 큰 자들로 만들어진 패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둘 모두가 될 수도 있겠지.
“할리, 내일부터는 잠시 베나즈 가문을 위한 사냥꾼으로 되돌아오셔야 할 겁니다.”
“전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영주님.”
“그럼 소집 회의는 이쯤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모두가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들의 눈빛은 내 바람대로,
충만한 기운이 감돌아 있어서 금세 가슴이 뻐근히 벅차올랐다.
* * *
창가에 줄줄이 부서진 햇살을 오선지 삼아,
새들이 지저귐으로 음표를 수놓는다.
제법 청명하고 시끄러운 아침, 눈을 뜬 나는 서쪽 숲을 출발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저택 1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엔,
만전의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던 귀 큰 자 세 명과 리케니엔의 사냥꾼 할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출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