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그물과 작살 (27)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이끼에 반쯤 좀먹힌 이정표가 보인다.
길이라 부르기도 뭣한 수풀을 가로질러 이동하기를 몇 시간, 드디어 마주한 이정표는 이 길에 참으로 걸맞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이정표 안에 적힌 글귀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기에, 할리는 그것을 대신해 우리 앞에 나서서 모두가 들리게 말했다.
“이 너머부터 서쪽 숲 ‘빌비니스’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빌리를 포함한 귀 큰 자들은 모두 귀를 곧추세우며 눈 앞에 펼쳐진 숲 일대를 살폈다.
“아무런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군요.”
베빌리의 말을 시작으로,
“숲에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짙어요.”
세멜레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날 선 경계심을 드러냈다.
반면 소여는 실눈 사이 드러난 시선으로 어딘가를 진득하게 주시하고는 다시 눈꺼풀 속에 그 시선의 방향을 감출 뿐이었다.
이제 할리는 말머리를 돌려 나와 마주하곤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가본 곳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영주님. 이 너머로는 저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마음 같아선 영주님과 동행하고 싶지만…,”
“할리, 분명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다음에 있는 위험까지 부담할 필요는 없어요.”
할리는 내심 아쉬운 기색을 표정으로 드러냈지만,
“무엇보다 할리, 그대가 베나즈의 깃발을 위해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에게 기대를 드러낸 내 눈빛을 읽고는 금세 담담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당장 발기지르와 켄타나가 치루는 전쟁의 정보를 얻는 데엔 할리 만한 인재가 없었으니까.
“이미 그것만으로도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잖습니까.”
“멜르아의 이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 할리…,”
“부디 몸조심하시기를, 또 사냥에 성공하시기를.”
“그대도 빛나는 눈동자 안에 원하는 것을 유감없이 담아 무사히 복귀하기를.”
버릇처럼 튀어나온, 어느 노래를 인용한 내 말에 할리는 전신에 기합이 확 들어간 모습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다가.
이윽고 고삐를 치대 리케니엔 쪽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그렇게 떠난 할리의 말발굽 소리가 완전히 멎자, 베빌리는 내게 시선을 맞추며 말에서 내렸다.
“베빌리, 길이 보입니까.”
“바깥쪽에선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숲의 나무들은 그리 이타적이지 않아 보이는군요.”
베빌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집어쓴 갈색 후드를 벗은 세멜레아가 끼어들었다.
“마치 외력에 의해 함구령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함구령? 어디에 말입니까?”
“숲을 이루는 모든 나무에.”
세멜레아는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귀를 움찔거리며 숲 입구 쪽을 주시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우선 다들 모여주시겠습니까?”
베빌리는 숲의 입구를 등진 채 우리 모두를 모이게 했다.
그리곤 캐룸 원정대의 길잡이로서 그 진면목을 엿보는 듯한 카리스마를 드러낸 그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는 과정에서 할리님이 제게 이 숲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래, 이동하는 내내 할리와 베빌리가 선두에 나란히 서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었지.
“이 숲은 할리님이 말한 대로 굉장한 규모의 ‘갈리키’ 무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말에 소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반응했다.
“갈리키라…, 그 무시무시한 군체 놈들 말입니까?”
“그래, 소여.”
“규모는 어느 정도죠?”
이어지는 세멜레아의 물음에 베빌리는 살짝 뒤돌아 숲의 입구를 살펴보곤,
“글쎄요, 이 정도 규모의 숲이라면 갈리키 군체가 다수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침착한 표정이나 그렇지 못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어 자연스럽게 말미를 이어받은 내가 베빌리에게 질문했다.
“갈리키라는 게 정확히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겁니까?”
일전에 할리에게서 얼핏 들은 기억이 있긴 있다.
그가 내게 말해주기를 갈리키는 동물의 사체라고 했었지, 정확히는 사체에 기생하는 균류로 일어난 ‘현상’이라 했던가?
베빌리는 낮은 목소리로 내게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갈리키는 괴물의 명칭보단 특정 현상에 붙은 이름입니다. 숲에 자생하는 버섯 가운데 갈리라는 종이 있는데, 이 버섯은 특이하게도 자신의 바탕이 될 거름으로 생명체의 사념을 갈구하지요.”
“이쯤 되면 식물과는 거리가 아주 멀게 느껴지는군요.”
“당연하지요, 버섯은 식물이 아니라 균이니까요. 우리 귀 큰 자들조차 정복하지 못한 게 바로 버섯입니다. 갈리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지요.”
식물의 이야기를 듣는 그들이 왜 버섯을 정복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념을 흡수한 갈리는 충분한 번식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거름으로 쓴 껍데기들을 이용합니다. 그 껍데기가 바로 갈리키라 불리죠. 그것들은 버섯이 흘린 포자처럼 끔찍이도 움직이며 숲을 활보합니다.”
설명을 마친 베빌리는 덧붙여 갈리키와 관련된 정보를 설명해주었다.
“본디 갈리키는 웬만하면 발생하지 않는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갈리는 거름으로 취할 사념을 섭취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도 멸종하지 않고 남아있군요.”
내 말에 잠자코 있던 세멜레아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야 갈리키는 귀 큰 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성벽 중 하나니까요. 갈리는 우리 귀 큰 자들의 손에 자발적으로 키워지는 대표적인 버섯 중 하나입니다.”
숲의 자원이 곧,
귀 큰 자들의 성벽이 된다니.
여러모로 인간의 성채와는 다르나 그 견고함은 똑같이 느껴지는 것만 같구나.
심지어 그 갈리키라는 실체를 확인해 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그럼, 이러한 정보들을 토대로 하나의 답을 내려보자면.
이 숲에 만연한 갈리키는 아마도, 그 너머에 있을 귀 큰 자를 위한 성벽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성벽은 분명 인간을 위해…,
아니, 이런 내 생각에 베빌리는 정면으로 반박하듯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할리에게 들었습니다, 솔직히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이 숲에 반드라가 있다는 것과 심지어 그 반드라를 할리 본인이 직접 목격했다고 하더군요.”
이에 세멜레아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에…,”
지금까지 무표정을 유지해왔던 소여도 이번만큼은,
“씨벌, 그게 진짭니까?”
두 눈을 크게 뜨며 넋 나간 표정으로 베빌리에게 되물었다.
“아마도 갈리키는 반드라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누군가가 구축해놓은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 반드라는…,”
베빌리는 슬쩍, 숲의 눈치를 보다가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엔트로피 급에 해당하는 존재입니다.”
일찍이 베빌리와 함께 숲의 읍소를 퇴치하면서 각 괴물의 종류에 따라 트로피가 걸려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걸린 트로피의 수가 높을수록 해당하는 목표물의 위험도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해서 베빌리가 말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베빌리를 위시한 캐룸 원정대에게 요청한 내 도움은,
그들에게 극복하지 못할 사지를 강요하는 꼴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그러나 당황도 잠시, 그들은 능숙하게 사지가 될지도 모르는 숲속에서 길 찾는 것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반드라를 피해 갈리키 무리가 있는 쪽으로 강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베빌리는 냉철한 목소리로 길의 방향성을 제시했고,
그런 그의 제시에 세멜레아는 자신의 투헨디드 소드 자루를 어루만지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소여 역시 천으로 가려 두었던 등짐을 풀어 그 안에서 두 자루의 손 쇠뇌를 꺼내 들었다.
“지금 우리 구성원으로는 충분히 갈리키 무리를 관통할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베빌리는 확고한 신뢰를 담은 눈빛으로 날 보며 미소지었다.
그런 그의 신뢰에 부응하듯,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와중에 소여의 끈적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나를 보며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숲의 침묵 때문에 가는 길마다 난관에 부딪히겠지만…, 결국 그 난관도 부딪혀야 깨지는 것이니…, 출발합시다!”
이내 기합을 잔뜩 넣은 베빌리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빌비온의 서쪽 숲,
빌비니스의 품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 *
분명 늪이 아니었건만,
바닥에 깔린 어둠에 발을 디딜 때마다 그것이 엉겨 붙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베빌리는 구월의 석양이 담긴 유리병을 내세워 선두에서 우리가 갈 길을 밝혀주었지만,
그 강력한 빛도 열 걸음 정도 되는 거리밖에 밝히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갈리키의 규모가 더 거대한 것 같습니다.”
상당한 기세로 깔린 어둠에, 베빌리는 당혹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뒤따르는 세멜라아도 식은땀을 흘리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단 한 그루도 이야기하는 나무가 없어…,”
수가 조금이라도 틀릴 조짐이 보인다면, 이들의 안전부터 챙기리라 마음먹은 나는 베빌리에게 물었다.
“베빌리, 괜찮은 겁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대로 계속 전진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숲에 휘둘려 방향을 잃어버릴 겁니다. 한 그루의 나무라도 우리에게 속삭여 주기만 한다면…, 방향의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텐데…,”
그의 탄식에 차분히 즉답했다.
“원한다면 원정을 이대로 마쳐도 좋습니다, 굳이 미지를 파헤치기 위해 무지 위를 걸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 말이 전달되기 무섭게,
더 깊은 숲속으로부터 스멀스멀 썩은 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뒤로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쉭!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소여?”
곧바로 뒤를 돌아보자 막 소여가 손에 들린 쇠뇌의 방아쇠를 당긴 참이었다.
“놈들이 옵니다. 거품 잔뜩 문 파도처럼…!”
그 말이 끝나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두두두─── !
온갖 것들의 달음박질 소리.
이윽고 베빌리의 손에 들린 구월의 석양빛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무리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사체의 모습을 한 온갖 짐승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중엔,
결손 된 사지로 잘도 우리에게 뛰어오는 두 발 걷는 자들 역시 보였다.
“베빌리, 뒤로!”
세멜레아의 외침에 베빌리가 한 손 검을 뽑아 들며 그녀 뒤에 서고, 그에 맞춰 내가 전방으로 달려나 그녀의 왼쪽 공간을 채웠다.
그 와중에,
쉭! 쉭!
손 쇠뇌를 나란히 펼친 채 사격을 개시하는 소여에 의해, 갈리키 몇이 그대로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그 사격술이 딱 보아도 보통 것이 아니다.
“놈들이 임박합니다!”
이어지는 베빌리의 경고를 마지막으로,
검은 파도가 우리를 덮쳤다.
크게 은빛 반원을 그리며 휘둘려진 세멜레아의 검이 갈리키 넷을 가로질러 그대로 양단하고,
곳곳에 쇄도하는 갈리키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볼트를 맞고 저지당한다.
그렇게 세멜레아와 소여가 내 공간을 열어주면, 나는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가 베빌리의 양 측면을 감싸듯 검을 휘둘렀다.
갈리키들의 들이닥치는 순서를 동체 시력으로 간파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들을 연결해 급소만을 절단한다.
피범벅이 된 숫양,
반쯤 갈비뼈가 드러난 곰,
주둥이가 갈라진 늑대.
유스티아를 이용해 그 벼락으로 놈들을 상대할까 생각했지만, 타격은 베는 것에 비해 그 동선의 낭비가 너무 심하다.
더군다나 갈리키의 쇄도가 얼마나 오래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힘을 벼락에 낭비할 수도 없어.
그렇기에 낡은 검을 힘으로 꾸역꾸역 휘둘러 놈들을 가죽째 양단해 나갈 뿐…!
이윽고 서른을 넘게 베고서야 한차례 몰아쳤던 검은 파도가 완전히 끝이 났다.
상황은,
그리 여의치 못하다.
재정비하는 와중에도 사방에선,
두두두─── !
갈리키의 달음박질 소리가 진동했으니까.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역전시킬 필요가 있어.
중요한 순간을 위해 감춰두었던 패를, 아직 가늠하지 못한 탓에 뒤집어 두었던 그 패를.
이제 드러낼 때가 되었다.
중요한 순간에 쓸 수 없다면, 그 순간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에 쓰리라.
가늠하지 못했다면 지금 당장 가늠하기 위한 성장의 단서로 쓰리라.
내 의지에 맞춰,
하늘에 제3의 눈이 떠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