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그물과 작살 (28)
들린다.
숲의 가장 여린 잎사귀 소리마저도.
보인다.
어스름에 죽어가는 작은 이끼마저도.
느껴진다.
적이라 상정할 수 있는 것들의 모든 동향이.
하늘에 피어난 태풍의 눈은 그 아래 숲을 관통하고,
내 몸속 오감 위로 초감각이 덧칠된다.
이건,
마법사의 탑에서 겪었던 것과는 또 다르다.
내게 마그나베노스는 그저 감당할 수 없어 쏟는 것에 불과했었다.
처음, 산적으로부터 리케니엔을 구해냈을 때도 그러했고.
마법사의 탑에서 테론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둘 사이에 숙련의 차이는 있었을지 몰라도, 결국 태풍의 눈에 담긴 기압을 떨어트려 상대를 짓누른다는 것은 똑같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어.
비로소 마그나베노스가 제대로 전개되었다는 걸.
두 번째, 마법사의 탑에서 쓸 수밖에 없었던 분노라는 거름 덕을 톡톡히 본 대목이기도 하다.
그럼 지금부터는,
마그나베노스의 진가를 엿볼 시간이다.
“세멜레아, 위치를 바꿉시다.”
내 말에 그녀는 경직된 표정으로 말없이 뒷걸음질 쳤다.
그에 맞춰 앞쪽에선 막 한 무리의 갈리키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에 맞서,
나는 맥레인, 당신으로서 완성된 비전.
‘운명의 노래’를 시작하리라.
이름 모를 짐승의 사체가 제일 먼저 엄습하자, 나는 자루를 든 손을 틀어 그것을 그대로 올려 베었다.
그렇게 양단된 사체 사이 너머로,
나는 눈앞의 적이 아닌 일대 적들의 움직임을 내려다보았다.
차원이 다르다.
하늘에 박힌 눈으로 일대를 장악한 시야를 본다는 것은.
손목을 틀어 검 끝으로 기류를 희롱해 궤적을 그리면,
뒤이어 오는 갈리키들이 그 궤적에 모조리 꿰어 양단된다.
마치 자성을 띤 금속에 들러붙는 쇳가루처럼, 갈리키는 내 압도적인 시야 아래서 차근차근 철저하게 베였다.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또 다른 감각에 나는 등줄기로 한 줄기 소름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이런 방식이었구나.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거미줄에 휘감기듯 내 몸에 들어차기 시작하는 묵직한 바람 줄기.
그에 맞춰 하늘에 뜬 태풍의 눈 주위로 허연 바람 줄기가 겉돌기 시작한다.
시작은 태풍의 눈이었으나,
그것을 거대한 태풍으로 번지게 하는 것은 인챈트의 주인이라는 소리겠지.
마흔을 넘게 베었을까.
직감적으로 더는 신체에 바람을 들일 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예전에 내둘러 쳤던,
셀레어 때의 감각을 되살려 자세를 다잡고 검을 내리쳤다.
───── !
귓전을 울리는 굉음, 하얗게 질린 바람 줄기로부터 터져 나온 섬광.
검 끝으로부터 터져 나온 바람 줄기는 전방을 관통해 거목 몇을 쓰러트렸다.
* * *
세멜레아도, 소여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을 잇지 못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디안님이 앞으로 나서기 무섭게 어둠에 젖은 숲이 순간 밝아졌고, 동시에 다시 어둑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으니까.
디안님의 검술은 일전에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병장기에 조예가 깊지 못한 나조차 감탄에 감탄을 이을 수밖에 없는 대단한 것이었고.
그래서 방금까지 펼쳐진 디안님의 검술에 넋을 놓고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방금 그 굉음으로 정신이 퍼뜩 차려졌어.
디안님의 검 끝으로부터 뛰쳐나온 바람 줄기는 전방 일부를 그대로 갈아엎어 버렸다.
그 위력이 어찌나 드센지 아직도 채 떨어지지 못한 갈리키의 파편이 듬성듬성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몇몇 거목은 뿌리를 드러낼 정도로 들렸고, 아예 꺾인 나무는 그루터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
“디안님…!”
침묵을 깨고 간신히 굳은 턱을 움직여 디안님을 부르자,
그는 뒤돌아 내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가 이상하다.
깊고 어두운 동공 테두리가 마치 개기일식의 그것처럼 허옇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동요하는 심중 위로 차가운 침착을 쏟은 나는 그에게 또박또박 내 의사를 전달했다.
“들립니다…!”
이어지는 내 말에 그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방금 그 일격으로 숲의 침묵이 깨졌어요!”
이에 덩달아 정신을 차린 소여도 뾰족한 귀 끝을 움찔거리며 사방을 둘러 보았다.
이내 소여 역시 사방에 들려오는 숲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변을 알아차린 우리 앞에 선 디안님은.
“길을 안내해주십시오, 제가 그 틈을 열겠습니다.”
담담하게 검을 고쳐 잡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세멜레아, 소여. 계속해서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디안의 부탁에 소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 울 일이 있을까 모르겠슴다.”
“소여, 정신 차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들긴 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껏 재해라는 걸 망각하고 살아온 오만한 나무들의 두려운 목소리를.
들이닥친 태풍을 대비해 뿌리에 힘을 주고 소리 지르는 나무들의 목소리를.
그 사이에서 입이 가벼운 나뭇잎들이 숲의 숨겨진 길 사이로 흐르는 바람에 자백하듯 나부끼는 걸 놓치지 않은 나는.
“저쪽으로…!”
손가락으로 해당하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디안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가리킨 방향 쪽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생각났다.
베나즈라는 이름.
아주 어렸을 적, 어른들에게 스치듯 들었던 그 이름은 분명 또 다른 이명을 갖고 있었어.
그리고 그 이명은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에서 검의 최강이라는 수식어 한정으로 가장 드높은 칭호였지.
글라디옴.
저자가 바로, 그 글라디옴의 후계였다니…!
방금 벌어진 일을 내 눈으로 톡톡히 보았음에도, 진정 내가 본 것이 사실인지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다.
베나즈의 비전이란 게 바로 저런 것인가?
터져 나온 굉음이야 깃발의 주인인 그가 마땅히 가졌을 인챈트겠지.
문제는 그 앞에 있었던 검술이다.
난…,
내가 살았던 뿌리에서도 저런 걸 본 적이 없어.
가지고 있는 비전과 비교해보고 싶어도, 내 상상력이 그 동작들을 받아들이질 못한다.
조금,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디안님….”
앞으로 나서서 그의 옆에 나란히 선 나는 염치를 무릅쓰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전에 보여왔던 고압적인 내 모습이 부끄러워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정신 차려, 세멜레아 로메르.
사실 너에겐 지금 차릴 수 있는 체면조차 없잖아?
“허락해 주신다면 일선에서 같이 싸우겠습니다.”
디안 베나즈, 그는 나를 담담히 바라보다가 이내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어 고개를 돌려 베빌리와 눈을 마주친 나는 곧바로 소여를 바라보며.
“소여, 뒤를 부탁….”
떨리는 목소리로 소여에게 말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거, 우리 길잡이님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됨다.”
* * *
양쪽 쇠뇌에 각각 볼트 스무 발씩을 먹여 놨지만, 그들이 다시 배고파질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다.
예상은 했었는데,
내가 상정한 예상의 천장까지 박살 내버릴 줄은 몰랐어.
디안 베나즈.
무시무시한 자다.
내가 가진 사격술, ‘드고리드’의 모든 것을 발휘해봐도…,
세 발…, 아니 네 발째 쏘는 시점에 저 검이 내 심장에 박히겠지.
이렇게 따져보니까 더 무섭네,
화약이 판치던 용의 시대에서도 통할 검술이라는 거잖아?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냐,
하늘에 뭔가가 떴어.
순간 숲의 어둠이 걷혔을 정도로 큰 무언가가 말이야.
나무들이 재해를 들먹이며 겁에 질린 것을 보면, 그의 인챈트 역시 범상치 않은 것이겠군.
두근두근,
심장이 금방이라도 갈빗대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올 기세로 뛴다.
저 남자는 두 발 걷는 자를 홀리는 매력이 있다.
당장 저 콧대 높은 세멜레아조차 마음을 고쳐먹게 할 정도로.
귀 큰 자들의 사회에서 명예라는 건 때깔만 좋은 과실 같은 것에 불과하다.
이미 뿌리로 모든 것이 정해지는 사회였으니까.
하여 잔가지 같은 볼품없는 뿌리에서 태어난 나는 그 사회에서 제아무리 명예를 좇아봤자 위대한 뿌리와 같아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인간들의 사회는 달라.
나는 명예로 드높아질 수 있는 그들의 인식에 막연한 동경을 느껴 용병 일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없을 세계수의 줄기를 발견한 걸지도 모르겠다.
좀 더, 저 남자에 대해 알고 싶다.
* * *
육체적 고갈보단, 내적인 고갈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
태풍의 눈을 지속하기 위한 유지 비용을 설명하려면 말이야.
베빌리의 안내를 따라 이동하며 다섯이 넘는 갈리키 무리를 거쳤다.
확실히,
태풍의 눈이 발휘된 그 아래서 나는 가히 절대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잠깐이지만 재해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명확한 한계를 느꼈다.
태풍의 눈, 마그나베노스를 발동하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어림잡아 4분 남짓.
품을 수 있는 바람에도 그 한계가 분명하다.
이는 분명 검의 품질에도 연관이 있겠지만, 신체적 능력에 비하면 그 영향력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로, 지금부터가 진정한 숙련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어.
정리해보자.
마그나베노스를 발동함으로써 내게 주어지는 이점들을.
처음은 역시 막대한 범위의 시야라고 할 수 있겠지.
감각 외적으로 기관처럼 더해진 그 눈은, 내 시야적 한계를 아예 없애주었다.
눈앞의 적을 상대하면서,
최 후미에 있는 적의 동태를 동시에 살필 수 있다.
토르킨님이 가르쳐주신 야전 술을 곁들인다면, 이 시야적 이점은 전장에서 그 위력이 가장 극대화될 것이다.
둘째는 태풍을 만드는 주체가 바로 나라는 것.
비단 검을 휘두르는 행위만이 아닌, 여러 부수적인 행위로도 신체에 바람이 축적된다.
이미 이는 셀레어를 통해 겪어본 적이 있어 익숙하다.
다만 다른 점은 신체에 바람을 축적하면, 동시에 하늘에 뜬 태풍의 눈 마그나베노스 주위에도 바람이 겉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혹시 숙련을 거듭하다 보면, 그래서 지금보다 더 많은 양의 바람을 신체에 축적 시킬 수 있다면.
그럼 하늘에 뜬 마그나베노스도 태풍으로 번지게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규모의 바람을 축적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다.
그저 내 행위에 맞춰 바람이 겉도는 모습을 하는 건 태풍의 눈이 그만큼 내 신체와 밀접히 체결되어 있다는 뜻일 거야.
그 눈을 태풍으로 번지게 하는 것은,
아마도 다른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고.
이제 본 상황으로 되돌아와서,
직면한 가장 큰 문제에 집중해보자.
우리가 이 숲을 이동한 지 어언 4분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앞서 상기한 대로, 그 4분이라는 시간이 지나기 무섭게 마그나베노스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을 감았다.
내적으로 심한 고갈을 남긴 채.
그것은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허무함이 느껴질 정도로 힘이 빠지는 것이어서,
육체적인 힘까지 죄다 빨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제 이 상태에서,
다시 갈리키 무리를 거쳐야 한다는 건데.
“베빌리,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내 물음에 베빌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떨어진 잎사귀가 말하기를, 더 깊은 길이 남아있다고 하는군요…,”
지금보다 더 많은 갈리키를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그러나 세멜레아와 소여는 오히려 더욱 고취된 모습으로 자신의 장비를 고쳐잡고 있었다.
그래, 못할 것은 없지.
그대로 돌파하면 될 일이다.
두두두──── !
앞에서 다시 몰려오는 갈리키들의 발소리에 맞춰,
막 자세를 다잡고 충돌을 준비하는 그 순간에.
서쪽에서,
해가 떴다.
아니,
뜰 일이 없는 해를 대신 한 맹렬한 빛에 우리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갈리키는 빛에 달아나는 그림자처럼 역겨운 부패와 비명을 쏟으며 일거에 흩어졌다.
그렇게,
맹렬한 빛이 서서히 멎고.
그 사이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마리의 사슴.
한 그루의 고목에 달려있을 만한, 엄청난 크기의 뿔을 이고 있는 그 사슴은,
마치 두 발 걷는 자들과 같은 눈을 갖고 있었고,
네 발은 굽이라 부를 수 없는, 두 발 걷는 자의 손 모양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경이로운 생명체를 목격한 나는,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반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