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61화 (161/365)

161화. 그물과 작살 (29)

하마터면 넋이 증발해버릴 뻔했다.

귀 큰 자들의 사회에서 ‘사슴 신’이라 불리는 그 반드라를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솔직히 사냥꾼 할리가 이곳에서 반드라를 목격했다 말했을 때,

나는 그저 그가 착각한 거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드라라는 존재는 그렇게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귀 큰 자인 나조차 평생토록 마주쳐 본 적이 없을 정도니 말 다 했지.

하긴, 평생을 안야 숲에서 살아왔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반드라는 위대한 뿌리가 자리 잡은 숲에서만 목격된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모르겠어.

내가 살던 사회에서 반드라는 신으로 추대될 만큼 대단한 존재잖아.

그런데 막상 그 목격담을 인간인 할리에게 들었으니 그 괴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하지.

귀 큰 자들의 사회에선 신과 같은 존재가,

인간들의 사회에선 환상의 사냥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베빌리, 너는 길잡이잖아.

* * *

영험, 신비, 미지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느껴지는 그 이질감을 설명하기가 힘들 정도로.

그것은 괴물이라는 개념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 같았으며,

동시에 내가 모르는 하나의 또렷한 현상처럼 보였다.

“베빌리…,”

떨리는 목소리로 베빌리를 부르자,

“네, 반드라입니다.”

그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문헌이나 그림으로만 접해 본 존재이기에, 모든 걸 알진 못하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잇기 시작한 베빌리는 목 뒤로 식은땀 한 줄기를 흘려보내며 작게 중얼거린다.

“적혀 있는 정보에 따르면 숲 자체를 조종할 수 있다고 하니 섣부른 행동은 금물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니 마른 침이 절로 넘어갔다.

반드라,

사슴과 같은 모습의 그 존재는 저 멀리 서서 우리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대치가 이어져가던 중, 제일 먼저 균형을 깬 것은 세멜레아였다.

“베빌리, 아무래도 우리 쪽에서 먼저 행동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러자 소여가 고개를 살살 가로젓는다.

“우릴 어떻게 조질까 관찰하고 있는 거 아님까?”

“그랬다면 우린 이미 이 숲의 거름이 되고도 남았을 거야, 소여.”

침착하게 소여를 진정시킨 베빌리는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무언의 동의를 구하는 바람이 담겨 있어서, 나는 그에게 고개를 찬찬히 끄덕여주었다.

식은땀으로 반짝거리는 목덜미를 한 차례 훔친 베빌리는 이제,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반드라 앞에 담대히 섰다.

곧이어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베빌리는 주위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살펴보다가 그중 몇 개를 골라 반드라 앞에 제시하듯 내밀었다.

하지만 반드라는 그것을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을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 발 걷는 자의 눈을 가진 사슴의 얼굴은 정말이지 오묘함의 결정체 같구나.

다시 한번,

베빌리가 다른 나뭇잎을 주워 그의 앞에 제시하자.

드디어 반드라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보였다.

그 작은 동작 하나만으로도 거목 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순간 위압감에 짓눌렸다.

그만큼,

반드라의 머리에 돋아난 뿔은 간단히 고개를 젖힌다 해서 그 길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입니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세멜레아가 속삭이듯 묻자, 베빌리는 뻣뻣하게 굳은 그 상태로 대답했다.

“의심하는 나뭇잎에 반응했습니다…, 반드라는 우리를 의심하고 있어요.”

이윽고 베빌리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들이 우리 주위로 쏟아져 내렸다.

베빌리는 그러한 현상을 놓치지 않고,

쏟아진 나뭇잎 중 하나를 집어 들고는 내게 그것을 보이며 말했다.

“진실이라는 뜻을 가진 나뭇잎입니다.”

진실을 요구하는 것이로군.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이자, 나는 그들을 차례로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이 숲 너머, 왕관을 가진 귀 큰 자를 만나러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이에 그들 모두가 놀란 눈치다.

아니, 베빌리는 퍼뜩 침착함을 유지하며 얼른 고개를 돌려 반드라에게 내 말을 전달했다.

여러 나뭇잎을 뭉쳐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댄 베빌리의 모습에, 반드라는 고개를 살짝 틀어 내게 시선을 옮겼다.

초롱초롱한 그 눈은 찬찬히 움직이며 내 전신을 훑다가,

이내 손에 들린 낡은 검에 한 번, 그리고 내 주위에 귀 큰 자들에게 한 번씩 시선을 멈추곤.

살짝 고개를 숙인다.

그렇게 숙인 고개에 맞춰 다시 우리 주위로 나부끼는 바람.

그리고 쏟아진 나뭇잎들.

하나같이 똑같은 모양을 한 그 나뭇잎들을 내려다본 베빌리는, 놀람을 금치 못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그게 뭠까?”

긴장한 소여의 닦달에 베빌리는 날 보며 대답했다.

“안내라는 뜻을 가진 나뭇잎이에요.”

그 말에 이어,

반드라는 고개를 크게 틀었다.

한 폭의 숲이 움직이는 듯한 그 모습에 우리의 시선은 절로 그 틀어진 고개가 가리킨 방향을 따랐다.

그러자,

곧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음에도, 눈에 들어온 풍경이 스스로 구도를 바꾸듯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마치 막대 망원경의 길이를 늘였다 줄였다 했을 때 이뤄지는 시야의 변화처럼 말이야.

그렇게 우리 시선 상 바뀐 숲의 구도는,

정말이지 마차 하나가 지나가도 될 정도로 잘 닦인 길이 길게 뻗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재해와는 또 다른 신기의 목격에,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반드라가 있었던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겨봤지만.

언제 떠났을까.

반드라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 * *

가지런히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곧게 뻗은 길을 걷는 내내 우리는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할 수 없었다.

아직 경이로움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대관절 우리가 지금까지 봐 왔던 숲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일대에 극적인 변화가 이뤄졌으니까.

세상이라는 책의 다음 페이지를 훔쳐본 것 같은 기분이야.

슬슬 뻗은 길이 말미에 접어들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는지, 베빌리는 굳게 닫아왔던 입을 열었다.

“디안님께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물음에 하나하나 다 답해드릴 수 있다면 저야말로 좋겠습니다, 베빌리.”

직전까지 두근거렸던 심장이 팍 가라앉았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피식거렸다.

“베빌리, 당신이 아니었다면 반드라와 소통해 볼 시도조차 못 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라는…, 결정적으로 디안님을 보고 안내를 결심했으니까요.”

결정적인 건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그래, 나와 동행하는 자들이 모두 귀 큰 자였던 것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거야.

말 그대로 운도 절묘하게 작용한 셈인가.

노래 가사 중 하나가 떠오르는군.

우연은 소금과 같아서 어디다 갖다 붙여도 설득력이 있다지.

딱 이럴 때 쓰는 말이네.

길은 점점 좁아져, 어느새 내리막길로 바뀌어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대열이 좁아지자, 자연스럽게 세멜레아가 내 옆에 붙어왔다.

“왕관을 가진 귀 큰 자를 만난다고 하셨지요.”

그녀는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그렇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그들을 만나려고 하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내외적으로는 베나즈의 깃발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지요.”

내포적으론 동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서쪽의 진의를 떠보기 위함이기도 하고.

만약 그들의 진의에 공감할 수 있기만 하면,

도리어 베나즈의 깃발에 굉장한 힘이 되어줄 수도 있겠지.

물론 이 모든 일은 위험한 도박판 안에서 벌어지고 있어, 언제 어디서 낭패를 볼지 모른다.

그 낭패마저도 0이라는 인챈트를 수련할 기회로 상정했을 뿐이지만.

결국엔 이 서쪽 진출은 그에 대한 위험 부담까지 결과적으로 내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조율한 것이다.

그에 따른 위험 부담을 다른 이에게 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부담을 진 이들을 지킬 수 있다는 내 자신감만큼은 진실이었기에 감행할 수 있었다.

이 앞으로 다시 반드라와 같은 상정 외의 현상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능히 해낼 수 있어.

이러한 포부마저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없다면,

베나즈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지.

안 그렇습니까, 맥레인?

“디안님…?”

생각에 빠져 있던 나를 건져 올리는 세멜레아의 부름에,

퍼뜩 반응해 시선을 맞추자 그녀는 내게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단 말입니까?”

“저 역시 그들과 같은 위대한 뿌리 출신이니까요.”

* * *

세멜레아 ‘고라드’ 로메르.

자신의 뿌리를 뒤늦게 알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서쪽 숲을 장악한 귀 큰 자들을 ‘맨드’라 일러 주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위대한 뿌리는 총 세 분파로 나뉘어 있다고 했다.

그 세 분파의 이름은 각각,

맨드, 라, 고라드.

그 중 맨드는 세 분파 가운데 가장 자유분방한 탓에 같은 위대한 뿌리 가운데서도 서열이 낮은 축이란다.

물론 그 서열이라는 것은 단지 직책에 따른 높낮이를 말하는 것일 뿐.

실질적인 뿌리의 세력을 나누는 기준은 아니라고 했다.

인간들의 땅인 아이베리아에 그 뿌리 일부를 내린 것만 봐도 위대한 뿌리 맨드가 얼마나 자유분방한 것인지를,

그녀는 설명 내내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만큼 주의도 반복했는데,

맨드들은 개척자 정신이 강해 대부분이 앞뒤가 꽉 막힌 전사들이고 수가 틀리면 무력을 행사하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내게 이렇게 설명을 보태가며 도움을 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그녀는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

고라드의 잔뿌리가 되기 위해선 그 위 뿌리에 인정을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그녀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고라드는 맨드와는 달리 그 전통에 목숨까지 거는 족속들이라고.

이 이상 자세한 내막을 캘 명분은 없다.

그저 그녀가 도움을 준 만큼,

나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얼추 위대한 뿌리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니 그들의 사회 속에서 기본적인 실수는 하지 않을 수 있겠어.

곧,

점점 좁아지던 숲길이 자취를 감췄다.

뒤를 돌아보면,

언제 길이 있었냐는 듯 숲은 우거진 모습으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물론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왜냐면 바로 우리 앞에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펼쳐져 있었으니까.

형형색색의 반딧불이가 듬성듬성 별처럼 빛나고.

구름 닮은 뭉글한 날개를 가진 홀씨가 유유자적 사방에 날아다니는 그곳은,

거대한 고목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베빌리를 처음 만났던,

그 조촐한 귀 큰 자들의 사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 사회와는 동떨어진, 진정 귀 큰 자들의 세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비경.

그런 그곳에서,

이미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중무장한 한 무리의 귀 큰 자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내 우리 바로 앞까지 도열 한 그들 사이로, 호리호리한 장신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세멜레아의 말대로 그 인상이 굉장히 호전적이었지만, 웬걸.

그는 대뜸 나를 끌어안았다.

“환영하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내 등을 퍽퍽 소리 나게 두들기던 그 남자는 내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에르보르 ‘맨드’ 갈링 이라고 하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크나큰 환대에 나는 의문을 집어먹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환대를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그는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우리의 선조께서 당신들에게 이곳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주셨지 않소? 그럼 후손인 우리가 당연히 환대해야지!”

“그러니까 그게 무슨…?”

에르보르는 잘생긴 얼굴을 활짝 피며 말했다.

“반드라는 위대한 뿌리 식 장례로 나타나는, 몇 안 되는 거룩한 현상 중 하나요. 선조의 시신을 세계수의 씨앗과 함께 매장하는데, 그것이 특별한 방향으로 꽃피게 되면 반드라라는 존재로 재탄생 된다오.”

그 범접할 수 없는 존재 뒤편으로 이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왕릉이 움직인다면 이해가 더 빠르겠소? 갈리키를 숲에 풀어놓은 것도, 숲을 침묵에 붙인 것도 다 우리의 왕릉을 지키기 위해서였소.”

그래, 이제 이해가 확 되는구나.

그렇다면 그가 왜 이렇게 우리를 환영하는지도 알겠어.

형식상으론,

그들의 선조가 직접 우리를 초대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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