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물과 작살 (30)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금발, 눈꽃을 심은 듯 새하얀 피부.
입고 있는 예복은 그 소재나 양식이 낯선 것이었지만, 동시에 나풀거리는 소매나 밑단을 보면 부정하기 힘든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에르보르 ‘맨드’ 갈링.
빌비온의 서쪽 숲, 귀 큰 자들의 실권자인 그는 막 시종의 안내를 받고 자리에 앉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리 친절하지 못한 숲이었을 텐데, 고생 좀 하셨겠소?”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안부를 묻던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기다란 시미터를 검집째 풀어 시종에게 건네곤 합석했다.
“그래서, 그대의 이름은 언제 알려주실 거요?”
참, 아직 그에게 내 이름조차 말해 주지 못했구나.
경황 잃은 줄 모르고 잘도 안내를 받았군.
“리케니엔의 디안 베나즈라고 합니다.”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정식으로 일어나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자.
그는,
“하하하!”
주위 새들이 놀라 다 날아갈 정도로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시달린 웃음에 채 헤어나오지 못한 붉어진 얼굴로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결국엔 인연이라는 것도 뿌리처럼 이어지기 마련인가 보오.”
살짝 그리움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덩달아 그 내민 손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강하다.
마치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내 손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가진 악력이 호리호리한 신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다.
“왜 우리 선조의 넋이 외지에서 들어온 홀씨를 받아들였는지 이제야 알겠군.”
에르보르는 짙은 녹색 눈을 반짝이며 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래, 역시 그 뿌리에 그 과실이라고 그대에게서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느껴지는 것 같소.”
그 말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만 그대는 참으로 축복받은 거요, 어머니가 서운하지 말라고 그대에게 아름다움을 잔뜩 물려줬으니까.”
그렇게 보이십니까, 메리안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샜다.
기나긴 악수를 마친 에르보르는 조각 같은 입술을 다시며 내게 너스레를 떨었다.
“맥레인 그자가 똑똑하긴 해, 자신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준 게 아닌 그 재능으로 비전을 만들어 준 걸 보면.”
그리고 그 너스레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해서 이런 과실이 안전히 장성할 수 있도록 그 오랜 시간을 숨어 지냈던 거겠지.”
궁금한 게 많다.
그런데 이런 내 궁금증만큼이나, 에르보르 역시 궁금한 것이 많은가 보다.
“자! 이제 다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저의가 무엇인지 들어나 볼까! 베나즈의 핏줄이여!”
“시계도 서로의 태엽이 맞물려야만 움직이는 법입니다. 애석하게도 제 태엽은 에르보르님에 비하면 느려서요.”
내 말의 저의를 파악한 에르보르는 차분히 가라앉은 금발을 찰랑거리며 또 크게 웃었다.
“이거야 원, 초침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분침이 먼저 움직인 꼴이로군! 미안하게 됐소. 내가 예절이니 예법이니 하는 것과 거리가 멀어서 말이오.”
덕분에 더 편합니다.
세멜레아가 한 말이 빈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가을에 유감없이 떨어져 내리는 낙엽처럼 자유분방하다.
심지어 그들의 실권자까지도.
비단 성향만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그 자유분방함에 자신만만한 여유가 만연해 있다.
이런 걸 강자의 여유라고 표현하지 아마.
“긴 시간 동안 제 가문은 내외적으로 많은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가문의 일원으로서 창피할 정도로 과한 무지를 겪는 중이지요.”
“제 입으로 말하는 무지는 부끄러운 게 아니오, 곧 극복할 것임을 다짐하는 것이니까.”
느긋한 목소리로 돌아온 에르보르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에르보르님, 알려주시겠습니까? 이 사이에 있는 인연의 시작 말입니다.”
* * *
막 홀씨 무리가 된 우리 ‘맨드’들은 정착할 땅으로 아이베리아를 선택했소.
왜 홀씨가 되었는지부터 설명하자면 귀 큰 자들의 역사를 들먹여야 하니 기회가 닿는다면 다음에 하지.
막 다가오는 봄, 주체할 수 없는 설렘에 나무들이 지껄이는 만담같이 지리멸렬한 이야기거든.
그저 간단하게만 설명하자면 우리는 위대한 뿌리 가운데 전사 계층에 속하오,
줄기로 치면 가시고 뿌리로 치면 독인, 그런 치명적인 부분이었기에 같은 위대한 뿌리 사이에선 상종하지 않으려 하는 부류로 취급받기도 하여…,
어느샌가 맨드는 하나의 고립된 사회가 되었소.
그것을 타파하고자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려 맨드 만을 위한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과연 기사들의 땅이라 불리는 곳답게 이곳에 정착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
깃발을 위시한 세력들이 보낸 토벌대에 많은 맨드들이 스러져 갔소.
그렇게 아이베리아 공통의 적 취급을 받으며 배타적인 삶을 강요받던 우리에게.
어느 날 빛나는 자가 나타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더군.
그자의 이름은,
기사왕 에르앵.
에르앵 르도리아.
그가 이끄는 기사들은 말 그대로 무적의 군대였으며, 이미 그 시점부터 중앙 땅의 가장 큰 세력을 거머쥐고 있었지.
그렇게 내 선조께선 그의 손을 잡아 이 땅에 뿌리내렸고,
우린 기꺼이 동료가 되어준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소.
그 과정에서 기사왕 휘하 위대한 깃발을 휘날리던 기사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할 기회가 있었기에…,
베나즈 가문과 소중한 인연을 시작할 수 있었다오.
시간이 흘러,
내 선조께서 지난 전투의 부상이 화근이 되어 돌아가셨을 때.
거의 동시에 기사왕이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었지.
아직도 그 작은 두루마리에 적힌 글이 생각나는군.
‘씨앗은 도태될 환경에 뿌리내리지 않는다.’
난 그 글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차렸소, 그것은 그의 세력이 사방으로 분열될 것이란 뜻이었지.
하여 우리는 중앙으로부터 떨어진 이곳, 빌비니스를 거점 삼아 숨어들듯 세력을 보존했소.
그리고 막연히,
정말 막연히 기다렸지.
무엇을 기다렸냐고?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소.
그런데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소.
* * *
말을 마친 에르보르는 사족을 붙였다.
굵직한 가지만을 골라 설명했다고, 그에 딸린 곁가지까지 모두 파고들자면 맨드와 베나즈 사이에 인연이라는 관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충분히,
그가 해준 이야기만으로도 이해하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으니까.
되려 이에 대한 내 생각을 보태자면.
그래, 조금은 절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비베오에서 맥레인이 내게 말해 주었던, 기사왕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으니까.
‘퍼져라, 살아라. 종래에 다시 돌아와 장성하라. 실패한 나를 반면교사 삼아 그 위에 깃발을 꽂아라.’
기사왕은 그 유지를 지키려는 자를 위한 무대로,
아주 오래전부터 지리를 설계한 것이 아닐까?
“자, 젊은 베나즈여. 그럼 이제 이곳에 온 목적을 시원하게 풀어보시오.”
눈썹을 치켜뜨며 묻는 에르보르의 말에,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빌비온을 통합시키고자 합니다.”
그러자 그는 다른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뜻을 내게 전했다.
아니,
그는 또 한 번 나를 꿰뚫었다.
“그것이 시작이로군?”
“그렇습니다.”
“베나즈의 이름으로 기사왕이 되려는가.”
둘러 말하지 않고 핵심만을 찔러대는 그의 말에.
아까부터 옆에서 숨까지 참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빌리와 세멜레아, 그리고 소여가 동시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게 해서 깃발에 묻은 오점이 지워질 수 있다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되려 합니다.”
맥레인의 염원이었으니까.
이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르보르가 일어나 화답했다.
“함께하지.”
* * *
시작은 막연했으나,
끝에 가선 내가 모르던 과거의 흔적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에르보르는 오랫동안 멈춰 있던 시계에서 자명종 소리를 들은 것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조만간 내 리케니엔에 ‘교류단’을 보내겠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참, 이건 새롭게 맺어진 협약을 기념하여 주는 선물이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에르보르는 투박한 나무 상자를 내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내가 슬쩍 눈치를 살피자,
“열어보시오.”
그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권했다.
그렇게 은빛 경첩이 달린 상자 뚜껑을 열어 그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그 안엔 특이한 모양의 권총 한 자루와 총구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한 발의 총알이 있다.
“이건…?”
“루거백의 작품 중 하나인 ‘벌집’이오. 내가 직접 그를 찾아가 주문한 물건이지.”
에르보르는 상자 안에 든 권총을 집어 들어 총신 한가운데 있는 둥근 벌통 같은 부품을 옆으로 젖혔다.
그 안엔 여섯 개의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그래서 더더욱 상자 안에 있는 단 한 발의 총알이 대비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르보르는 상자 안에 있는 한 발의 총알을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중요한 건 총이 아니라 저 한발의 총알이오, 우리 숲의 교배 나무로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것인데…,”
내 손에 들린 상자 안에 다시 권총을 가지런히 넣어 놓은 에르보르는 손수 상자 뚜껑을 닫아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 총알을 하늘에 겨냥해 쏘시오.”
“해서 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대를 위한 소나기가 내릴 거요.”
에르보르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떠날 때가 임박했다는 걸 직감한 우리는 숲을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맨드의 도시는 그런 우릴 배웅할 준비를 하듯,
형형색색의 반딧불이 밖으로 향하는 길 쪽으로 몰려들어 알록달록함을 쏟아냈다.
이런 풍경과 달리,
저 멀리 보이는 가지 위로는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귀 큰 자들이 정적을 지키며 거닐고 있고,
근처엔 바위처럼 중무장한 귀 큰 자들이 경계에만 몰두하며 무심함을 내비치고 있었지만.
우리가 안장 위에 올라타고 떠날 채비를 끝마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옮겨 열렬한 관심을 주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에르보르가 서 있다.
“잘 가시오, 젊은 베나즈. 숲을 열어 놓았으니 그대로 쭉 달리면 어렵지 않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요.”
짧게 인사를 마친 그는 이어서 시선을 세멜레아 쪽으로 옮겼다.
“그대도 잘 가시오, 고라드. 베나즈의 깃발이라면 그대를 압박하고 있는 숙원쯤은 시원스레 해결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이어진 에르보르의 말에 세멜레아는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사시나무 떨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급히 내 눈치를 살폈다.
곧이어,
베빌리가 선두를 자처하여 고삐를 놀리고 내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 * *
“기지어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학술관에 파묻히다시피 한 몰골임에도 그 눈빛만큼은 한밤중에 별처럼 반짝이는 조엘의 물음에.
기지어는 책에 파묻혀 있던 시선을 얼른 거두었다.
“무엇이 궁금하지?”
“기사왕의 역사는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럼 그 사라진 역사는 누구에게서 배워야 하는 겁니까?”
“좋은 질문이로군, 그럼 내가 문제를 하나 내주지.”
그 말에 조엘이 대뜸 호승심을 부리며 책더미 속에서 뛰쳐나왔다.
“어떤 남자가 밭을 하나 샀다네, 그 밭은 화전을 통해 일군 것이었지.”
“그러니까 기존의 초목을 다 불태워 일군 밭을 샀단 말입니까?”
“그래.”
“네, 그래서요?”
“그 남자가 사들인 밭은 원래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지어의 물음에 조엘은 바로 난색을 지었다.
“그걸 대체 어찌 압니까…?”
“그럼 그 남자는 자신이 산 밭이 화전으로 일군 땅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기지어님이 내신 문제의 내용이 그것이었으니까요.”
“그럼 그 밭의 원래 모습을 알고 있는 이도 나 하나뿐이겠군?”
“… 그야…, 그렇겠죠.”
“그럼 자네는 왜 내게 밭의 원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묻지 않았는가?”
조엘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어안이벙벙해져서 그 자리에 멀뚱멀뚱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실된 역사란 건 그런 거야, 조엘. 그 역사를 소실시킨 자에게서 알아낼 수밖에 없지.”
“소실시킨 자가 순순히 알려주지 않는다면요?”
“정확히는 그로부터 알아내는 게 아니야, 그로부터 승리하며 알게 되는 것이지.”
이내 기지어는 흥얼거리며 다시 시선을 책 속에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