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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163화 (163/365)

163화. 사냥 임박

베르긴 오르테는 방금까지 휘둘렀던 연습용 검을 서둘러 등 뒤로 거두어야만 했다.

의외의 손님이 이곳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땀에 젖은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느슨해진 꽁지 머리를 고쳐 묶은 그는 찾아온 손님에게 예를 갖췄다.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인사에 찾아온 손님은 한쪽 손을 들어 그가 건넨 예를 덜었다.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는 없네, 누군가의 예를 달게 먹을 만큼 내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투덜투덜,

무거워질 수도 있을 뻔한 분위기를 한없이 가볍게 만든 그의 투정에 베르긴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엔 어쩐 일로…? 기지어님?”

베르긴의 물음에,

기지어 도는 짚고 있던 짝다리를 풀고 한 걸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베르융 공과 급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 이렇게 찾아왔네.”

“아버지께선 합동 훈련소에 계십니다.”

“그래, 알고 있네.”

“하면, 어찌…?”

기지어는 수염 속에 감추어진 입을 움찔거리다가, 이내 그에게 한쪽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내가 미리 베르융 공께 기별을 준 것도 아니고, 대뜸 찾아가기가 뭣해서 말이야. 자네가 징검다리 역할을 좀 해줄 수 있겠나?”

베르긴은 털털한 미소를 지었다.

“제 아버지께선 그리 어려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거야 자네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진지한 표정으로 베르긴을 반문한 기지어는, 사람만 한 대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베르융을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내 입장을 생각해보게.”

표현은 장난스럽지만, 그렇기에 더 받아들이기 쉬운 그의 진중한 언행에 베르긴은 얼른 목검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가시죠,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 *

리케니엔의 북쪽, 합동 훈련소.

그곳은 막 티히트라의 아모랑 가문과 그 휘하 병사들의 합류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물론 그 어수선함은 베르융 오르테의 등장으로 일축되었지만.

“잘 오셨소, 몰룬 아모랑.”

짧은 갈색 머리카락, 듬성듬성 거칠게 난 턱수염.

날카로운 콧대 속에 감추어진 부리부리한 눈.

그가 아모랑 가문의 가주 몰룬에게 손을 내밀자, 몰룬은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 손을 잡았다.

“아직도 그대에게 잃은 한쪽 팔이 시큰거리는 것 같구먼!”

“덕분에 이렇게 우리가 다시 마주 설 수 있게 됐지, 그 팔은 당신이 발휘한 기지의 증거이기도 하니까.”

두 기사의 대화에 애먼 병사들만 마른 침을 삼켜가며 긴장했지만, 그들의 고조된 긴장과는 달리.

두 기사 사이에선 호탕한 웃음만이 계속해서 오갔다.

“그저 기사로서 휘하 병사를 보존하기 위해 행동했을 뿐! 그리고 이런 나를 기사로서 대해준 건 당신이었소! 덕분에 알았지, 당신 같은 기사를 움직이게 할 정도로 베나즈의 깃발에 명분이 있다는 걸.”

“그 명분에 가장 먼저 죽게 될 수도 있단 걸 명심하시오.”

“기사로서 최고의 영광이 아닙니까!”

“터무니없기는.”

“전쟁이라는 게 9할은 땅 넣고 땅 먹기인 걸 생각하면, 애초에 터무니없는 건 이 세상이 아니겠소!”

몰룬의 간단하기 짝이 없는 기사도가 싫진 않았는지, 베르융은 제법 크게 웃으며 그를 환대해주었다.

“훈련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됩니까, 베르융 공?”

몰룬의 말에 베르융은 담담한 표정으로 즉답했다.

“우선 아모랑 휘하 병사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게 먼저이겠지, 우리 군과 모의전을 해보는 건 어떻소?”

이에 몰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나즈 휘하의 병사들은 그 규모가 자신이 데려온 것보다 배는 적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군과 군의 모의전 만큼 부상자가 속출하는 훈련도 없습니다. 합동 훈련 첫날부터 그들의 사기가 꺾이지는 않을까 걱정되는데…,”

몰룬의 걱정에 베르융은 묘한 웃음과 함께 되물었다.

“전투 양상은 몰룬, 그대가 선택하시오. 회전이든 산악전이든 무엇이 됐건 받아줄 테니.”

도발적인 그 말에 몰룬은 호승심을 가득 베어 문 표정으로 불같이 달려들었다.

“난 내게 주어진 유리함을 피하지 않소, 회전으로 합시다.”

모의전이다.

선두 기사가 배제된 군과 군끼리만의 대결이라면,

베르융이라는, 흉기나 다름없는 괴물이 제외된 전투라면 충분히 승산을 찾을 수 있다.

그 생각에 몰룬은 자신의 군에게 명을 하달했다.

반면 베르융은 그저 턱짓 하나로 그가 이끄는 군사들을 대번에 이동시켰다.

“뒤쪽 언덕에 전망대가 있으니 어디 흐르는 양상을 좀 봅시다.”

내심 티히트라 측 군의 실력이 기대됐는지, 베르융은 들뜬 목소리로 몰룬에게 전망대를 안내해주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아버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부름에 베르융은 두 발을 멈춰야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몰룬은 베르융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곤 먼저 전망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베르융은 막 자신의 앞에 달려온 청년을 바라보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베르긴, 여긴 어쩐 일이냐.”

“아버지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혹시 영주님이 아닐까? 베르융은 급히 옷매무새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물론 베르긴의 입에서 영주님이 아닌 손님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걸 알아차린 후엔 멈췄지만.

“찾아오셨다는 손님이 누구…?”

베르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쑥 베르긴의 뒤에서 튀어나오는 한 사람.

“반갑소, 베르융 공!”

“기지어?”

“하하, 나도 보고 싶었습니다.”

* * *

훈련장 인근, 제법 짙은 그늘을 빚은 나무에 나란히 기대어 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베르융 공, 아드님을 굉장히 바르게 키우셨더군요.”

“내 안사람 덕이 컸지.”

“베르긴 정도 되는 인물이면 일찍이 리케니엔의 기사로 서임 받아야 하는 게 마땅한 일이 아닙니까?”

“아직.”

베르융은 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깊은숨을 내쉰 후에야 말을 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네.”

기지어는 그런 베르융을 보며 묘한 눈빛을 보냈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으신 거겠지요.”

“말조심하게.”

베르융은 자신의 민낯을 들여다본 기지어를 향해 놀란 듯이 반문했지만, 이내 자신의 드러난 행동 앞에 고개 숙여야만 했다.

“기사 베르융으로서는 베나즈의 부흥에 한 치 의심도 없다지만, 아버지 베르융으로서는 무엇보다 걱정만이 앞서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기지어의 말에 베르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자네도 자식이 있는가?”

그러자 기지어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런데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원래 겪지도 않고 배우기만 한 자들이 제일 아는 채를 잘합니다.”

“허허…,”

당당한 기지어의 말에 베르융은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확신이 서게 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그것도 아는 채인가?”

베르융의 물음에 기지어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베르융 오르테가 전쟁에서 질 리가 없잖습니까.”

“하지만 힘든 싸움이 될 거란 건 분명해. 테티르 론바즈는 그리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성가신 장악을 두른 이름 모를 기사는 더더욱.”

두 눈을 반짝이며 진지함을 쏟는 베르융을 넌지시 바라보던 기지어는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고찰을 보아하니 더욱이 내 머릿속에서 패배가 연상되지 않는다는 말을 목구멍 뒤로 넘기면서.

이윽고 문득,

베르융이 뭔가가 생각났는지 그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그런데…, 자네 날 찾아온 이유가…?”

“아!”

기지어는 토끼 눈을 뜨며 손뼉을 쳤다.

베르융은 순간 그의 모습을 고깝게 보았지만, 그런 그의 생뚱맞은 매력엔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내 항상 책을 쓸 때도 두서가 없어 문제였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편히 말하게.”

“베르융 공, 베나즈 깃발 휘하엔 병력이 몇이나 됩니까?”

기지어의 물음에 베르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종자 시절을 겪지 못한 견습 기사가 둘, 제법 탄막을 형성할 수 있는 장궁병이 사십, 이백의 보병들과 재편 받지 못한 병사가 백오십이네.”

“수적으로만 따진다면 우리의 총 군이 발기지르의 제1군보다 적은 상황이로군요.”

“막 합류한 티히트라의 병력 사백을 합치면 그보다는 크다고 할 수 있지. 물론 양이 많다고 질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해서 그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의전을 통해 알아보시려는 겁니까?”

“그래.”

“굉장히 자신 있는 표정이십니다?”

베르융은 살짝 아쉬움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기지어를 바라보았다.

“티히트라의 군은 기반이 농민병이라 오합지졸이야, 정규군인 우리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네. 난 단지 모의전의 패배로 그들의 피가 끓기를 바랄 뿐이지.”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는 듯한 그의 모습에, 기지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모의전의 양상은 무엇입니까?”

“회전이네.”

“말 그대로 전면전이로군요, 그렇다면 그 전술은…?”

“사선 대형.”

기지어는 눈을 반짝였다.

베르융 오르테를 위시한 사선 대형을 상대할 군대가 이 땅에 몇이나 될까.

사선 대형은 군을 나눠 대각으로 배치한 뒤 먼저 적과 맞닥뜨리게 될 선두 군에 가장 큰 힘을 실어 충돌시키는 전술이다.

그렇게 해서 선두가 적의 대형을 무너트리게 되면 그 무너진 대형을 파고들어 뒤따라 들이닥친 후속 아군과 함께 양방으로 적 진형을 갉아먹는, 통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걸출한 파괴력을 가진 전술이기도 하다.

물론 이에 대한 파훼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되려 선두 군의 역량이 드러나는 순간 가장 불리해지는 전술이기도 하고, 작전이 미리 간파당하기라도 하면 그 의도가 제일 쉽게 무너지는 전술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라,

앞서 말했듯 그 선두 군이 베르융 오르테라면.

사선 대형이 이룰 수 있는 전투적 성과의 확정성을 보장받는 거나 다름이 없다.

기지어는 머릿속으로 전장을 날뛰는 베르융과 그 군사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벅찬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상상에서 벗어날 때쯤.

인근에서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베르융 공, 이 함성은…?”

“아무래도 모의전이 끝난 것 같군.”

기지어는 궁금증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베르융의 표정을 보곤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픽 웃었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자 베르융은 조용히 기대던 나무에서 떨어지며 물었다.

“할 이야기는 다 끝났는가, 기지어?”

그의 물음에 기지어는 털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군사적 자문을 교류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이제 후방 보급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여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네.”

마찬가지로 픽하는 웃음으로 화답한 베르융의 인사말에 기지어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그에게 고개 숙인 뒤 절뚝절뚝 사라졌다.

* * *

해가 완전히 산 뒤로 떨어질 때쯤에야 우리는 리케니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들려온 것은 발굽 소리뿐이었지만.

이윽고 저택에 들어서서 말에 내리기 무섭게, 우리는 마치 참아온 숨을 내뱉듯 서로 말문을 텄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디안님.”

“수고 많았습니다, 베빌리.”

물론 이후엔 세멜레아와 소여, 그들과 눈빛을 주고받는 것으로 열 마디 말을 대신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각자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누구라도 먼저 말문을 뗄 기세였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빌리가 먼저 선수를 쳤다.

“오늘은 몸에 엉겨 붙은 여독을 푸는 데 집중합시다. 세멜레아, 소여.”

그 말에 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도, 퍼뜩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챘는지 머쓱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베빌리가 나를 위해 배려해 준 것이었기에, 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감사를 전했다.

아마도 첫날부터 공무에 시달리던 내 모습을 떠올려 준 것이겠지.

사실 그들과 함께 한자리에 모여 여독을 풀면서 못다 풀린 이야기의 실타래를 찬찬히 풀어보고도 싶었는데,

아까부터 문밖에서 나를 애타기 기다리는 듯한 바돈의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러질 못하겠다.

그렇게 베빌리가 세멜레아와 소여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먼저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바돈이 내게 다가왔다.

“영주님.”

“바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바돈은 내 물음에 저택을 바라보며 답했다.

“포개어진 손 조합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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