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사냥 임박 (2)
포개어진 손 조합에서 리케니엔에 두 발 걷는 자를 보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베나즈 가문의 부채,
그리고 계약의 이행.
다만 가문의 부채와 관련한 이유로 찾아왔다기엔 그 시기가 매우 일러.
그렇다면 티히트라와의 전쟁으로 얻은 토지의 2할을 분배받기 위해서 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지.
생각해보니까,
언제 한번 기지어를 통해 조합과 관련된 서적을 구해봐야겠다.
비록 탐독할 시간은 없겠지만, 위위키를 통해서라면 대략적인 줄기 정도는 알 수 있을 테니.
각설하고 이번 기회에 관련된 문제를 다시 상기해도 나쁠 건 없겠어.
포개어진 손 조합에서 빌린 돈은 총 얼마인가?
일찍이 해당 문제는 조이에게 일임했지만, 마지막으로 내가 기억하는 액수는…,
리케니엔의 공사 비용을 제외한 순수액만 금화 180만 개.
그중 8할 가까이 되는 액수가 정규군 창설에 쏟아 부어졌지.
군사체계가 형성되지 못한 이 리케니엔에서 부대 창설은 비용적으로 상당한 부담이다.
그걸 생각했을 때 어쩌면 이 액수도 적게 먹힌 걸지도 몰라.
결국엔 베르융이라는 든든한 기둥 덕분에 정규군 창설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그나저나 만만치 않은 액수다.
당장 티히트라로부터 받은 배상금조차 소비하기 급급할 정도인데.
이 물질적 갈증은 언제쯤 해갈시킬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갈증을 끝까지 명분으로 삼지 않을 수 있을까?
“영주님…?”
바돈의 부름에 깊은 줄 모르고 뛰어들었던 생각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고작 포개어진 손 조합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 한마디로, 이렇게 전신이 생각으로 흠뻑 젖어버리다니.
“아닙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바돈은 얼버무리듯 대답한 내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걱정을 지우기 위해 나는 다시 차분하고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와 질문했다.
“조합의 손님으로는 누가 왔습니까?”
조합장인 스페라 본인이 직접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다.
바돈은 내 물음에 고개 숙여 답했다.
“영주님, 그 전에…,”
그는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쪽 손을 뒤로 빼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저택 입구 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세라가 튀어나온다.
그녀의 손엔 새것 냄새 물씬 풍기는 옷 한 벌이 들려 있었는데, 싱글벙글 미소 꽃이 핀 그 얼굴만 봐도 본인이 만든 옷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내 앞에 멈춰선 세라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주님,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손님을 응대하실 준비를 하셔야 하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내 행색을 살펴보니,
음…,
케케묵은 흙냄새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게 누가 봐도 가려운 곳 긁으려 한바탕 구른 짐승 꼴이네.
* * *
바돈은 11월 찬 공기를 먹인 물로 내 손을 정성껏 닦고,
세라는 본인이 만든 멋들어진 검은색 재킷을 내 앞에 펼쳐 보인다.
“디안님! 보이시나요? 유행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서방 제국 니플리엔의 재킷을 한 번 만들어봤답니다!”
들뜬 그녀의 말에 내 손을 닦아주던 바돈이 핀잔을 준다.
“세라, 우리밖에 없다고 해도 그렇지 영주님을 그렇게 부르면 어떻게 해?!”
이에 나는 웃으며 세라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불러주시니 더 좋군요, 적어도 누군가 한 명쯤은 제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들었지요, 바돈? 디안님께서 나를 임명하신걸?”
의기양양한 세라의 말에 바돈이 하던 것을 멈추고 멍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본다.
“임명을 하다니…?”
“베나즈 가문의 이름을 사적으로 부를 수 있는 공직에!”
그녀의 말에 바돈은 입맛을 다시다가, 끝내 부러운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이들 사이에서 은은히 퍼지는 유쾌한 기류가 너무나 좋아 좀 더 장난을 보태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한술 더 뜰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엥킬로 가문이라면 몇 명이 되었든 모두 그 공직에 앉히고 싶군요.”
내 말에 바돈은 미묘하게 피는 미소를 애써 감추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일을 마무리했다.
이제 세라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본인이 직접 만든 옷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녀가 만든 재킷은 아이베리아의 것 치곤 매우 동떨어진 형태를 하고 있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뒷자락, 살짝 들어간 허리 부분.
특히 소매에 자수 된 불길 모양의 금실이 정말 인상적이로구나.
이러한 형태의 성격은 마치 중립지역에 만연했던 자유분방함 쪽에 더 가까워서,
내심 궁금증이 일었다.
서방 제국 니플리엔은 어떤 곳이기에, 같은 아이베리아의 땅 안에서도 이렇게 다른 문화와 양식이 나타나는지 말이야.
“오랫동안 잘 입겠습니다, 세라.”
세라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 인사를 전하자, 그녀는 내게 다가와 직접 재킷을 입혀주었다.
재킷은,
정말이지 내 몸과 절묘하게 맞아 마치 한 몸처럼 느껴졌다.
“바돈, 갑시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앞장선 바돈에게 말하자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디안님’ 출발하시지요.”
* * *
“리케니엔의 영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살짝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저 너머에서 바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곧 뒤따르던 저택 관리인들이 문을 활짝 열면, 나는 그 열린 문 사이를 가르듯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곧이어 바돈이 내게 고개 숙인 뒤 자리를 떠나고, 이제 접견실에 남은 것은 단둘뿐인데.
왜,
조합에서 왔다는 손님은 내 눈에 보이질 않는 걸까?
“반갑습니다.”
아니, 내 시점부터가 잘못됐었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곳엔,
“이렇게 또 뵙게 되어 기쁘군요.”
멀끔한 차림에 양 갈래로 수염을 땋은 난쟁이 라자딜르가 한쪽 손을 번쩍 들고서 내게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저도 이렇게 또 뵙게 되어 기쁩니다, 라자딜르님.”
제법 반가운 얼굴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앉으시지요.”
악수를 마치고 자리를 권하자 그는 바깥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리 예를 갖춰 내게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살짝 까치발을 들어 의자에 올라가듯 앉은 그는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품에서 단안경을 꺼내 썼다.
그 모습이 참으로 사무적이어서, 방금 그에게 느꼈던 반가움이 무안해질 정도였지만.
금방 이해했다.
상황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재킷 단추를 풀고 라자딜르와 마주 안자, 그는 매우 고급스러운 종이 하나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저게 뭘까,
공식적으로 리케니엔에 전달하는 고지서?
아니면 영토 분배에 관한 조합의 공문서?
“그럼 영주님, 찬찬히 읽어보시고 서명해주시길 바랍니다.”
라자딜르는 고급스러운 펜과 함께 내게 용지를 밀어 넣었다.
그렇게 나는 내 턱밑으로 들어온 용지의 내용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안에 담긴 내용은,
그러니까.
[사양 및 인증서]
그 말머리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말머리를 읽자마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자, 못 보고 놓쳤던 것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라자딜르 뒤편,
천막에 가려진 무언가가 있었군.
“궁금하신 내용은 제가 전부 다 답변해드리겠습니다.”
그의 친절한 안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용지에 적힌 내용에 시선을 쏟았다.
[사양 및 인증서]
외 갑 - 엘페조르 산의 낙석 식 제련 30번 합금강
곁 갑 - 알진 로우의 베그나 합금 사슬.
안감 – 울라사크의 가죽 (리디굴람 공인 1급)
머리 형식 – 아멧 헬름 (개조).
몸통 형식 – 합금 퀴레스
팔 형식 – 합금 스파울더 (베사규 없음)
손 형식 - 5지 건틀릿 (높은 산 주문 제작)
다리 형식 – 겉감 이식형 그리브
발 형식 – 사바톤 (높은 산 식 바위칠)
보증자 – 높은 숲 에시스 대장간, 백색 모루 다부진 주먹, 알카라이즈 원정대, 포개어진 손 조합, 리디굴람 원정 연합회.
형형색색의 잉크,
각각 다른 글씨체.
마치 그림 그리듯 써진 내용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것들이었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이 안에 담긴 내용이 말하는 게 바로 갑옷이라는 것.
그제야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티히트라와의 전투를 통해 승리를 쟁취했던 그 날, 막 리케니엔에 복귀하기 무섭게 조합에서 나온 세 난쟁이가 내 몸의 치수를 재고 갔었지.
아니, 일단 그것은 둘째 치고…,
주르륵 나열되어있는 사양 부분 아래 보증자라고 적힌 부분은 그 명단 위에 각기 다른 인장이 빼곡히 찍혀 있어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압도감이 느껴졌다.
저 보증자에 적혀 있는 것들의, 그 위에 찍힌 인장에 깃들어 있는 자부심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이게 대체…, 뭡니까?”
내 물음에 라자딜르는 단안경을 고쳐 쓰며 답했다.
“보시다시피, 갑옷의 사양 및 인증서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왜 제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그야 영주님께 드릴 갑옷이니까요.”
어안이벙벙하다.
해를 몇 시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야.
“이 증여와 관련해선 그 어떤 의도도 없음을 미리 말씀드려야겠군요.”
라자딜르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한다는 듯, 애써 설득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의도라는 것은 돈과 관련된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 말은 다른 것과 관련해선 의도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까?”
“아무래도 베나즈의 깃발이 개진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 조합에 이득이니까요. 갑옷은 그러한 일에 박차를 가해줄 아주 중요한 물건이지 않습니까? 특히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라면 더더욱.”
그의 말이 맞아.
갑옷은 이 아이베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
포개어진 손 조합도 그것을 알기에 이렇게 투자를 하는 거겠지, 그런데 이렇게 과감한 것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
대체 뭘 믿고?
뭘 보고?
어디까지 얻으려고?
스페라.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속으로 되뇌어봤자 들려오는 메아리는 없다.
그녀 역시 토르킨 선생님의 제자였으니까.
통찰이 깊으면 깊었지 나보다 얕을 인간은 결코 아니잖아.
“자 그럼 열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나을 테니 직접 보시지요.”
여러 교차하는 생각들 틈바귀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경종을 울리듯 라자딜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덩달아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그렇게 라자딜르를 따라 의자 뒤편, 뒤덮인 천막 쪽으로 다가가자 그는 대뜸 뒷걸음질 치며 내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천막을 걷는 건 오롯이 영주님의 몫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천막을 잡아당겼다.
스르륵,
벗겨지는 천막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거치대.
그 위에 나란히 진열되어있는.
잿빛 갑옷.
부분부분 가지와 나뭇잎 문양만이 희미하게 각인 된 그 갑옷은 장식보단 갑옷 자체의 외적인 모습이 더욱 강조되었다.
솔직히,
아름다웠다.
매끈한 윤곽과 그로 인해 상상할 수 있는 맵시가 떠올랐으니까.
이런 내 감상을 대변하듯,
라자딜르의 설명이 이어졌다.
“방호력은 방호력대로 끌어올리면서, 플레이트 아머가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인 육체적 제약을 대부분 거세시킨 신식 갑옷입니다.”
이러한 설명이 곁들어지니 문득 갑옷을 보면 느껴지는 투박함이 눈앞의 갑옷에선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러한 사안들을 모두 적용하기 위해서 대표적인 난쟁이 제 합금인 ‘몰리아드’를 사용해야 했지요. 다방면으로 만능인 몰리아드는 그 무거운 무게가 유일한 흠이지만, 이러한 몰리아드강 중에서도 한계까지 제련을 유도한 ‘30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30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물음에 라자딜르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답했다.
“건네드린 사양서에도 적혀 있듯, 낙석 식 제련을 30번 거친 강을 의미합니다. 높이 기준에 맞는 산 정상에서 골렘이 떨어트린 바위로 강재를 때려 제련하는 것이죠.”
그래서 낙석 식이라는 건가?
상상을 초월하는 제련법이네.
“원래 낙석 식 제련은 귀 큰 자들 고유의 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술로 난쟁이 제 합금을 제련했군요?”
라자딜르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챈트라는 엄청난 물건이 세 종족 간의 ‘협의’로만 만들어질 수 있듯이, 어느 물건의 궁극적인 품질 역시 세 종족 간의 ‘협력’으로만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