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사냥 임박 (3)
눈앞에 진열되어있는 갑옷을 쓰다듬어 보면,
이내 손끝으로부터 느껴진 감촉에 여러 감상이 떠오른다.
사슬 갑옷은 마치 직조된 옷감처럼 촘촘하고 부드러웠으며, 판금 표면은 유리구슬처럼 매끈하지만 동시에 포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멧 헬름은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 모양을 본떠 만든 듯 그 인상이 날카로웠고, 다섯 손가락이 따로 움직이는 건틀릿은 압도적인 기술의 결정적인 증거품 같았다.
허벅지에 입는 갑옷, 퀴스 겉에는 검은 옷감이 덧대어져 있어 미형의 자태를 뽐냈다.
그 옷감의 촉감은 마치 내 손가락을 잡아당기는 듯 꺼끌꺼끌함 느낌이 강해서,
아마도 안장 위에서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퀴스 아래로 진열된 정강이 갑옷, 그리브 역시 그 모양새가 만만치 않은 미형이었다.
다만 이렇다 할 장신구가 달려있진 않아서 어떻게 보면 투박한 느낌이 나기도 했다.
개인적으론 그런 부분이 마음에 들었지만 말이야.
그래, 이것이 바로 기사의 갑옷이라는 거구나.
토르킨 선생님께 레슬링을 배웠을 때 입어본 깡통과는 정말 차원이 다르다.
베르융, 조이.
두 기사가 입었던 그런 진짜배기 갑옷.
갑옷에 빼앗긴 시선을 겨우 거둔 나는, 슬쩍 라자딜르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는 흡족해하는 내 표정에 활짝 웃고 있었다.
곧이어 내 시선을 느낀 라자딜르는 목을 가다듬더니,
“크흠.”
나를 올려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지금은 베나즈라는 이름이 아이베리아에서 배반자, 찬탈자 따위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그의 그 말은 마치 개인적으로 전하는 응원처럼 느껴져,
“이 갑옷을 발판으로 대업을 꾸려나가신다면 누구든 감히 영주님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내겐 진심으로 힘이 되어주었다.
“그것을 위해 조합의 기술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루 위에서 고심을 휘둘렀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라자딜르.”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자 덩달아 북받치는 감정을 느꼈는지 라자딜르는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이 났는지 다시 시선을 맞추며 내게 묻는다.
“문득 상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말이 하나 떠오르는군요.”
“그게 뭡니까?”
그는 추억을 회상하듯 멍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곧 수염을 실룩였다.
“마주친 인연만큼 매력적인 시장은 없다.”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단순하게 받아들여도 충분히 멋진 말이네.
이후,
감성에 젖은 듯 보이던 라자딜르는 버릇처럼 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다시 차분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아쉽지만, 영주님. 지금부터는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난쟁이 라자딜르가 아닌, 포개어진 손 조합의 대변인으로 변모한 그의 앞에 나는 얼른 덮고 있던 감상을 벗어야만 했다.
* * *
늦은 밤.
영토 분배를 끝마치고 막 저택을 빠져나온 나온 라자딜르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영토 문제는 다행히도 매우 수월하게 진행되었는데,
조합이 목표한 바대로 북쪽 기슭 일대를 성공적으로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라자딜르는 이미 영토에 관한 문제보다 다른 쪽에 더 마음이 가 있는지 오래다.
다음 영토 분배가 이뤄질 시점엔,
베나즈의 깃발은 얼마나 더 커져 있을까, 아니면 이내 일어서지 못하고 꺾여있을까.
다만 후자가 될 확률이 희박할 것이라는 상인의 직감만이 있을 뿐.
마주친 인연만큼 매력적인 시장은 없다.
명색이 상업의 길을 걷는다는 자들이라면 한 번쯤 들었을 어느 거상의 명언.
동시에 경제학의 대표적인 이상이기도 한 그 말 속엔,
상인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낭만도 있었다.
숫자는 대표적인 이윤의 한 종류일 뿐.
두 발 걷는 자를 남기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윤이 될 수 있다.
요즘의 조합과 기업 사이에선 빛바래다 못해 녹슬었을 개념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다.
오래된 낭만을 좇는 조합과 기업이.
포개어진 손이 그런 조합이라곤 단정 지어 말할 순 없겠지만, 글쎄.
조합의 최대 이윤이 그 조합의 장인 스페라인 걸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는 좇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당장 라자딜르 본인만 하더라도 마주한 인연이라는 시장에 과감히 투자했으니까.
주섬주섬.
라자딜르는 입고 있던 정장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내 구겨진 종이를 펼치고 안에 적힌 내용을 찬찬히 훑은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걸로 얼음과자 값은 갚은 겁니다, 리케니엔의 영주.”
[추가 주문 제작 영수증]
-외형 변경
-안감 교체
-겉감 이식 추가
-신형 공법
최종 청구 비용, 공통 금화 2,640,000개.
원래라면 리케니엔에 투자 명목으로 지급될 갑옷의 가격은 금화 120만 개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다이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인연이라는 시장에서, 디안 베나즈를 이윤으로 남겨보고 싶었다는 것만이 중요한 거지.
포개어진 손 조합의 실질적 서열 2위, 라자딜르.
난쟁이치곤 감성적이고 유순한 성격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기한 내용이 달라지진 않는다.
그런 그에게 있어 140만여 개의 금화는 기회비용으론 매우 검소한 금액.
어쩌면 장사꾼답게 이 검소한 금액으로 곧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을 미리 점유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위기를 잡고 영수증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라자딜르는 다시 특유의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와선,
“잊지 말고 지금 태워야 해.”
허겁지겁 반대 주머니에서 연초 태우는 작은 손 화덕을 꺼내 영수증을 태워버렸다.
이 투자는 스페라에겐 절대 비밀이었으니까.
영수증이 완전히 재가 되어 흩어진 것을 확인한 라자딜르는, 이윽고 마차에 올라 리케니엔을 빠져나갔다.
* * *
이른 새벽.
폴란은 별안간 창문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야만 했다.
“뭐야…?”
눈꺼풀에 내려앉은 잠을 애써 손으로 비벼 벗기던 그가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창문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마주한 창문 앞에서.
그는 멍한 표정으로 하던 동작을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새 한 마리가, 연신 부리로 창문을 쪼아대고 있었으니까.
연한 녹색 꽁지깃을 가진 그 새는,
“티히트라의 전서구다.”
폴란에겐 아주 익숙한 것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부랴부랴 창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온 새는 익숙한 모습을 폴란의 팔 위에 올라탔고, 폴란은 그런 새 다리에 묶인 작은 두루마리를 얼른 빼 들었다.
그 두루마리 속 내용은,
[블로사가 티히트라를 번복했다.]
“허…!”
내용을 확인한 폴란은 잠옷 바람으로 문을 박차고 밖을 나섰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가 달려간 곳은 아직 햇빛을 흘리고 있는 학술관.
“기지어님! 기지어님!”
득달같이 달려들어 학술관 안으로 들어선 그의 앞엔,
책더미를 이불 삼아 태평하게 자고 있던 기지어가 있다.
“기지어님!”
폴란이 얼른 다가가 기지어를 흔들어 깨우려는 찰나.
“건들지 마.”
어느새 기지어는 두 눈을 부릅뜨고 폴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 책더미는 그저 이불을 대신한 것이 아니야, 자료 조사를 위해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이지.”
그러면서 어기적어기적 등으로 바닥을 기어 책더미 속에서 탈출한 그가 안심한 표정으로 폴란을 맞이했다.
“폴란, 이 시간엔 어쩐 일인가?”
방금 그 차갑게 경고하던 이는 어디로 가고, 상의를 벌거벗고 있는 평상시의 괴인으로 돌아온 기지어에게 폴란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얼른 말했다.
“티히트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왔는데?”
“블로사가 티히트라를 번복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기지어는 떪은 진지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영주님을 뵐 준비를 하게.”
기지어의 즉답에 폴란은 휘청이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맨발로 학술관 밖을 뛰쳐나갔다.
* * *
“기지어, 이 시간엔 무슨 일인가?”
막 저택 문을 열어 두 사람을 맞이한 바돈이 하품을 하며 묻자, 기지어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급히 영주님께 전할 말이 있어서 왔네, 바돈. 알현을 허락해 주시겠나.”
이런 기지어의 행동과 표정을 본 바돈은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잠에서 깨어 덜덜 떨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서 잠시 기다리게.”
호롱불을 손에 쥐고 바쁜 걸음으로 홀 뒤편 복도를 가로지른 기지어는,
안에서 잠에 빠진 관리인들을 급히 깨웠다.
“벼락이든 햇빛이든 저택 전체를 밝혀 놓아라, 영주님의 접견실엔 3월의 햇살을 준비하도록.”
일사불란하게 내려진 지시에도 관리인들은 묵묵히 저택 곳곳을 수놓으며 미리 비치해놓은 유리병들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저택 내부가 밝은 빛으로 서서히 번져갔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덩달아 일어나 복도 밖으로 나온 세라에게 바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나즈 가문에 급한 일이 생겼어.”
“어머, 저도 빨리 준비할게요.”
“괜찮아, 아직 대외적인 일은 아니니까. 기지어와 폴란이 급히 찾아온 것뿐이야. 세라, 당신은 발 빠른 아이들을 시켜 미리 베르융 공과 조이 공께 언질을 넣어줘.”
바돈의 말에 세라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 반대편으로 뛰었다.
이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2층을 복도로 접어든 그는 잠들었을 손님들이 깨지 않게 까치발을 들고 영주에게 향했다.
혹시 업무를 보시느라 깨어있지 않을까 하여,
똑똑.
문을 두드려보지만, 안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바돈이 침대 옆에 놓인 종을 울리며 가져온 3월의 햇살을 조금 흘렸다.
“영주님.”
작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침대에서 인기척이 일어난다.
“바돈, 무슨 일입니까.”
막 일어났음에도 부스스함 없이 반짝이는 얼굴로 묻는 디안 베나즈에게,
바돈이 허리를 숙였다.
“기지어와 폴란이 영주님을 찾아뵙길 원합니다. 급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들을 올려보내세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바돈이 다시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미끄러지듯 방 밖을 나섰다.
* * *
바돈의 안내를 받아 접견실 안으로 들어가면,
미리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지어와 폴란이 동시에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인다.
“기지어, 폴란.”
“영주님.”
일어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하고 곧이어 나도 자리에 앉았다.
둘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니 무거운 사안이로군.
“무슨 일입니까.”
내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기지어가 말을 이었다.
“폴란, 영주님께 말씀드리게.”
“영주님, 블로사가 티히트라를 번복했다고 합니다.”
기지어는 이에 덧붙여 설명했다.
“번복은 충성 관계에선 최악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블로사 가문이 티히트라와 맺었던 충성 관계를 번복했다.
이유는 많다.
리케니엔과의 전투로 가문의 기사인 이슨 블로사가 죽었고, 티히트라는 항복을 선언했으며.
그로 인해 가문의 발언권이 자연스레 묵살되었을 테니 쌓인 앙금이 산처럼 높았을 거다.
이 문제를 티히트라 자체적으로 해결하길 바랐지만,
결국엔 실패했다는 소리로군.
“기지어, 당신의 생각을 말해보십시오.”
계속해서 기지어에게 질문하자 그는 내 복잡한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듯 말을 이었다.
“티히타르는 본디 빌비온의 서쪽을 꽉 붙잡고 발기지르의 휘하로 들어가려 했던 깃발입니다. 폴란? 그러한 분위기를 팽배하게 만든 가문이 어디지?”
“블로사 가문입니다.”
“들었다시피 티히트라의 진출 욕망을 팽배하게 만든 건 블로사 가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욕망이 좌절되고 심지어 가문의 기사마저 잃은 상황이니 자신들의 위세가 축소될 걸 염려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들이 티히트라를 번복하길 결정했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하여 그들이 얻는 것은?”
기지어는,
두 눈을 번뜩였다.
“그들은 발기지르로 향할 겁니다, 새로운 위신을 얻기 위해서요. 그리고 등잔 밑이었던 빌비온 서쪽의 일을 고할 것입니다. 그 핵심 내용에는 베나즈의 깃발이 속해 있겠지요.”
“그렇다는건…,”
“네, 영주님. 이제 움직이실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