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사냥 임박 (4)
베르긴 오르테는 아침 일찍 일어나기 무섭게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 소식을 전한 아네즈 오르테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아들의 준비를 묵묵히 도와주다가,
“어머니, 무엇을 그리 걱정하시는 겁니까.”
이내 베르긴이 건넨 다정한 목소리에 애써 미소 지었다.
“영주님께서 두 기사를 소집하셨단다.”
이어지는 아네즈의 말에 베르긴은 살짝 커진 눈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끔한 리넨 셔츠를 입고, 선반 위에 고이 보관해놓던 가죽 구두를 신은 베르긴은 어머니를 꼭 안아준 뒤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아버지 베르융이 있는 방문 앞에 도달한 베르긴이 조심스레 문을 두들긴다.
“아버님, 베르긴입니다.”
“들어와라.”
안에서 들려오는 근엄한 목소리에 베르긴은 지체 않고 문을 열었다.
넓은 방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의자.
그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있던 베르융은 막 들어온 베르긴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주위 거치대에 걸려 있는 갑옷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베르긴은 익숙한 모습으로 베르융에게 다가갔다.
“소집이 있으셨다 들었습니다.”
담담하게 말문을 연 베르긴은 곧바로 왼편 거치대에 걸려 있던 그리브를 집어 들었다.
“그래, 새벽에 영주님께서 보낸 전갈이 도착했었다. 날이 밝는 대로 베나즈 깃발 아래 모이라는 명령이었지.”
그리브를 들고 다가오는 베르긴의 행동에 맞춰 다리를 살짝 벌리고 허리를 숙인 베르융은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때가 된 것입니까?”
질문과 동시에 베르긴이 아버지의 다리에 그리브를 체결시키면, 베르융은 그것을 이어받아 능숙하게 가죽끈을 묶어 고정했다.
“때가 임박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거다.”
그 말에 베르긴의 두 귀가 쫑긋 움직였다.
물론 그러한 움직임을 놓칠 리 없는 베르융이 조금은 너그럽게 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쉬운 것이냐, 베르긴?”
“아버지.”
“너에게도 때는 올 것이다. 그리 멀지 않았다고 확신하마.”
높은 숲에서 만들어진 베르융의 검은 갑옷, 인테그라.
그것은 과거를 주름잡던 명품이자 수많은 전장을 지배했던 베르융의 전신.
그 건틀릿이 막 베르융의 양손에 끼워 맞춰졌다.
“아쉬운 마음은 없습니다. 오히려 때가 되었을 때 제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걱정일 뿐.”
“너는 이미 자격이 충분하다.”
베르융은 건틀릿 낀 손을 아들의 어깨 위에 올리며 말했다.
“나를 지금의 자리에 앉힌 것도 너였어. 그렇기에 너는 나보다 더욱 훌륭한 기사가 될 것이야.”
베르긴은,
아버지의 말에 심장이 달아올랐는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사슬 갑을 껴입고, 몸통 갑옷을 결합하는 것까지 마치자 베르융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들아, 임박한 때가 되면 너는 리케니엔을 지켜라. 네 어미와 이곳의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의 집과 재산을.”
“명 받들겠습니다.”
높은 숲 특유의 얇은 재질로 만들어진 갑옷이었건만, 다부진 베르융의 육체가 그것을 두꺼운 흉갑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 앞에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는 베르긴의 모습은,
아들로서가 아닌 한 기사의 종자로서 보이는 충의였다.
베르융은 이제 그레이트 헬름을 옆구리에 끼고, 남은 손으로는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높은 숲에서 만들어진 갑옷과는 달리,
백색 모루에서 만들어진 그의 검은 수많은 대장장이의 가십거리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검은 아이베리아 전역에 있는 네 개의 중검 중 하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거대한 대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검의 이름은 프리슬.
그리고 그러한 프리슬 자루에 귀 큰 자들이 새겨 넣은 인챈트는,
19년 바렌투스.
* * *
말을 타고 리케니엔으로 향하는 베르융 앞에, 은빛 기사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조이, 왔는가.”
“그래, 베르융.”
짤막하게 인사를 마친 두 기사는 늘 그렇듯 고삐를 잡아 어깨를 나란히 정렬했다.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던데.”
베르융의 물음에 조이는 콧방귀를 꼈다.
“내가 할 소리를.”
그 반응에 베르융은 기다렸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재무관이 군인과 직접 대면할 일이 잘 없긴 하지.”
“오히려 대면하면 큰일이 아닌가? 보통 재무관이 군인들과 대면할 일은 비리 적발 외엔 없으니까.”
물론 조이의 유창함에 비할 바는 못됐지만.
남이 듣기엔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그들은 그 대화 속에서 어떤 재미를 느꼈는지 서로 끌끌 한참을 웃었다.
이윽고 웃음이 슬쩍 멎어갈 때,
베르융이 낮은 목소리로 무거운 본론을 던졌다.
“아모랑 가문이 티히트라를 빠져나가기 무섭게 블로사 가문이 행동을 개시했어.”
“굳이 아모랑 가문이 아니었어도 그들은 풀무 앞 잔불처럼 적절한 시기만 맞물리면 행동을 개시했을 거야.”
“결국엔 발기지르와 켄타나 모두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되겠군.”
“문제는…,”
말끝을 흐린 조이를 대신해,
베르융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테티르 론바즈겠지.”
“과거 칠기사 가운데서도 선봉 기사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이런 외지에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우리만 하겠는가, 눈보라가 중간 땅을 휩쓰는 바람에 기사왕 휘하의 깃발이 뿔뿔이 흩어졌잖나.”
조이는 진심으로 궁금증을 담아 베르융에게 물었다.
“그가 베나즈의 깃발에 설득될까?”
그 물음에 베르융은 아주 간결하게 즉답했다.
“설득되게끔 만들어야겠지.”
이제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가는 리케니엔으로 바뀌었다.
“베르융, 군은 어떠한가?”
“정규라곤 하나 창립부대라 아직 어설픈 게 많아.”
“티히트라의 원군은?”
“형편없지.”
“그래서, 이번 전투에서 패배할 것 같은가?”
조이의 물음에 이번엔 베르융이 코웃음을 쳤다.
“어림없지. 리케니엔의 정규군은 패배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야.”
“자네다운 답변이군.”
베르융은 저 멀리 보이는 베나즈의 깃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야 베나즈 휘하의 기사라 부를 수 있지 않겠어?”
완만한 언덕을 지나자 이젠 육안으로도 베나즈 저택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지만, 베르융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이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재정상태는 어떤가?”
“자네가 걱정할 일은 아닐 텐데.”
“우리 군에 들어간 비용이 한두 푼이 아니잖나, 그게 걱정되어 물어보는 거야.”
조이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재무관의 역할은 다른 관리자들에게 돈 문제라는 근심을 배제 시키는 것일세.”
“또 이상론이구먼.”
“과거에 우리가 이상 속에서 살았으니까.”
물질이 아닌, 서 있는 자리에서 우러나오는 충만함과 자신감만을 좇는다면.
부정이라는 단어가 끼어들 여지조차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절대로 정직하기 어려운 돈의 흐름이 정직해진다.
물질의 정직함.
말 그대로 이상에 가까운 것이리라.
베르융은 내심 조이가 아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 걱정했지만.
이어지는 조이의 말에 오히려 뒤통수를 맞아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조이의 턱짓이 가리킨 그곳엔 베나즈의 저택이 있었다.
그랬지.
피식, 베르융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지.
디안 베나즈란 이상은 아직 젊고, 다 여물지 못했으니까.
그만큼 지금 휘하에 있는 두 기사가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되어줘야 하니까.
“그럼 친구로서 말해주게, 재정상태는 어떤가?”
“그리 좋진 않아.”
예상했던 것과 같은 대답을 들은 베르융은 그제야 막연했던 걱정의 실체를 껴안을 수 있었다.
“빌비온 동쪽을 교두보로 삼지 않는 이상 재정이 좋아질 일은 없을 거야.”
기업과 조합의 관심을 끌기 위해선 드높은 깃발만 한 게 없다.
결국엔 이 임박한 때를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가 베나즈 깃발의 분기점이리라.
“오셨습니까.”
어느덧 둘은 베나즈 저택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미리 마중 나온 바돈은 그런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말에서 내린 두 기사는 발을 맞춰 활짝 열린 저택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홀에 임시로 마련된 회의장.
어울리지 않게 잘 차려입은 기지어와 정숙한 복장의 폴란.
그리고 처음 보는 젊은 청년이 제일 먼저 도착한 두 기사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 인사에 화답한 두 기사는 끝에.
밤 조각과 같은 갑옷을 두르고 앉아 있는,
디안 베나즈에게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 * *
발기지르의 주성으로 향하는 다리 위, 흐트러진 꽃잎이 자수 된 깃발 하나가 격하게 휘날린다.
그런 깃발을 등에 짊어진 채 말을 타고 달리는 이는 얇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치고 있었다.
굳게 잠겨 있던 성문은 그가 가까워지자 육중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고, 병사들은 막 들이닥치는 그의 길을 터주기 위해 양옆으로 걸음을 물렸다.
그렇게 내성에 도달한 그는 말에서 내려 태연히 경비병을 지나쳐 입궁하기까지 했는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것은,
펑퍼짐한 비단옷을 입은 시종이었다.
“블로사 가문의 기사여, 그대가 보낸 전서구는 어제 받았네.”
“성문에 내성까지 입궁을 허락한 걸 보면 발기지르의 영주님께서 날 빨리 만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말이 짧구나, 젊은 가주여.”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시종이 위압감을 쏟아내자, 기사는 잠시 주춤한 모습을 보였지만.
곧 기사는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풀 헬름을 벗어 그 얼굴을 시종 앞에 드러냈다.
“언제까지 길을 막고 서 있을 거지?”
“자네의 성질이 죽어 영주님께 범할 무례가 없어질 때까지.”
검은 머리, 날카로운 코.
얄팍한 눈매를 가진 기사는 턱이 갈라지도록 이를 깨물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급한 일입니다, 동시에 제 가문의 운명이 걸린 일이기도 하지요.”
아직 목소리 속에 날카로운 울분이 담겨 있었지만, 시종은 그걸로 만족했다.
설령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연기였다 하더라도, 순순히 순응하며 연기를 각오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공사를 구분할 줄 안다는 뜻이었으니까.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시종의 말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그를 지나쳐 길게 이어진 복도로 향했다.
그런 그에게,
“기스 블로사, 영주님이 흡족해할 만한 이야기여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가문은 이곳에서 무너지게 될 테니.”
시종은 마지막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그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알 게 뭐냐는 듯, 기사는 시종의 말을 들은 채도 안 하고 접견실로 향했다.
“자네가 이슨의 아들인가.”
안으로 들어선 기스는 중후한 목소리에 덜컥 놀라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맞습니다, 영주님. 기스 블로사라고 합니다.”
“티히트라의 깃발과 함께 이곳에 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가져왔군그래?”
기스는 슬쩍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상석에 앉아 있는 한 남자.
저자가 바로 빌비온의 사자.
그런데 생각보다 체격이 호리호리한 게 사자와는 거리가 아주 먼 인상이다.
뱀의 눈에 햇빛을 받아본 적 없어 보이는 뽀얀 살결.
기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갑옷을 걸쳐 본 적도, 무기를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자라는걸.
“그래, 이번에 빌비온 서쪽에서 일어난 깃발이 베나즈의 깃발이라고?”
찢어진 눈 속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인 발기지르의 영주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그 일어난 베나즈의 깃발에 베르융 오르테와 조이 크레비디가 있었다?”
살짝, 마른 입술을 뱀 같은 혀로 적신 그는.
“아이베리아 역사상 최악의 찬탈자 깃발 아래 전설적인 두 기사가 붙었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일이긴 해.”
대뜸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테티르 론바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내게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 벌어지게 될 테지.”
“곤혹스러운 일이라니요…!”
기스가 호소하듯 따져보지만, 발기지르의 영주는 재차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켄타나와의 전투를 뿌리치고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깽판을 칠 게 분명하잖아?”
그의 태도에 기스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얼른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저놈은 사자가 아니다.
그저 우리에 가둔 사자가 빠져나오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일개 조련사에 불과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