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67화 (167/365)

167화. 사냥 임박 (5)

“조엘, 시작해.”

기지어의 말에 벌떡 일어난 조엘은 먼저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영주님.”

가슴에 손을 얹어 예를 보였지만 그 모습이 한참이나 어색한, 그렇기에 더욱 순수해 보이는 자였다.

그는 아랫입술을 달달 떨며 고개를 들고는 이번엔 뒤돌아 두 기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베나즈의 두 기사님.”

그러자 당황한 기지어가 일어나 조엘의 어깨를 두들기며 속삭인다.

“쪼엘 그냥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쪼엘은 일종의 애칭 같은 건가?

어쨌든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조엘은 품에 안고 있던 종이를 우리 앞에 펼쳐 보였다.

“현 리케니엔의 영토에 뻗쳐 있는 모든 길을 그린 지도입니다.”

그의 손에 펼쳐진 종이 속 내용은,

모두의 감탄을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린 것 같은 리케니엔의 적나라한 일대.

그것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으니까.

“이걸…, 혼자서?”

조이가 혀를 내두르며 말을 잇자, 조엘은 손사래를 쳤다.

“기지어님과 할리님, 두 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시작조차 못 했을 겁니다.”

이어서 기다렸다는 듯, 기지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본격적인 회의의 서막을 열었다.

“이미 블로사 가문에 관한 일을 모두 다 들으셨을 겁니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들었다.

“블로사는 번복하기를 결심했고.”

곧이어 그의 말 한마디가 끝나자 동시에 접히는 손가락 하나.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당연히 발기지르로 향했으며.”

마지막 하나 남은 손가락,

기지어는 그 손가락을 유심히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발기지르는 저희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손가락이 모두 접힌 손을 내려놓은 그는 곧 쏟아질 것 같은 총명을 반짝였다.

“아이베리아에 무려 베나즈란 깃발이 일어서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깃발 휘하에 베르융 오르테와 조이 크레비디가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이베리아의 중앙이 크게 들썩일 일이지요.”

이에 탄식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조이.

“흩어진 에르앵님 휘하의 기사들이 감춰 왔던 오해와 분노를 드러내기에 딱 좋은 대상이 나타난 셈이기도 하고.”

그 말을 씁쓸한 표정으로 곱씹은 기지어는 가차 없이 말을 이어갔다.

“하여 저 기지어는 영주님께 정식으로 건의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때 묻은 검지로 펼쳐진 지도의 한 부분을 찍었다.

“우리는 발기지르를 맞이하여 동쪽 숲에 보급로 및 거점을 신설, 구축해야 합니다.”

“그럴 시간이 있겠나?”

이러한 건의에 베르융이 반문했지만,

그런 반문에 기지어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시간은 촉박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로선 갖은 노력으로 그것을 벌어야 합니다.”

“어떻게?”

마치 연속타처럼 이어지는 조이의 물음에 기지어는 손가락으로 지도의 동쪽 부분을 훑었다.

“티히트라의 군사와 리케니엔의 정규군 150을 끌고 통상 보급로를 가로지르는 겁니다.”

“눈속임하자는 거군?”

베르융의 간파에 기지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만든 지도가 아무리 최신의 것이라 해도, 발기지르 역시 새 따위를 통해 오래전부터 이곳 일대를 간파했을 겁니다. 따라서 그들이 상정할 수 없는 보급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상기한 병력을 눈속임용으로 쓰고 본대를 우회시켜 공사와 진출을 진행 시키는 것이지요.”

베르융은 난색을 지었다.

“그렇게 되면 병사들의 피로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누적될 걸세.”

조이 역시,

“그렇다고 포개어진 손 조합을 개입시키면, 그들에게 더 큰 명분을 줘버리게 돼. 시작부터 주객이 전도된다 이 말이야.”

같은 반응을 내비치며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기지어는 기죽지 않았다.

숱한 전장을 오가던 두 기사 앞에서 그는 오히려 당당했다.

“제 스승이신 토르킨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사 둘을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이 병법의 시작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지어는 품에서 작은 나무 조각 두 개를 꺼내 지도 위에 말처럼 올려놓았다.

“하나는 우회한 리케니엔의 본대, 다른 하나는 차출한 눈속임용 부대라고 칩시다.”

그는 차근차근 설명하며 눈속임용 부대라 지칭한 말을 뒤로 살짝 물렸다.

“통상 보급로를 가로지르는 이 병력을 발기지르는 절대 놓치려 하지 않을 겁니다. 하여 마주치는 족족 기만을 펼칩니다.”

몇 차례 더 물리기를 반복한 기지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비어있는 반대쪽 손으로 멈춰 있는 다른 말을 앞으로 움직였다.

“눈속임용 부대의 기만이 이어지는 동안, 우회한 본대는 계속해서 앞을 개척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두 말이 교차하듯 점점 떨어트리던 기지어가 두 손을 우뚝 멈춘다.

“자, 본대가 보급로를 신설하며 목표한 지점에 다다랐습니다. 보이십니까? 펼쳐진 형국이?”

“적 병력의 후방을 가져왔군.”

“그냥 후방이 아니죠, 그들이 상정하지 못한 새로운 보급로를 뒷배로 낀 본대지요.”

조이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결론을 내놓았다.

“이거 완전 모험에 가까운 전술이군.”

그러나 기지어는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조이 경께선 기만에 최적화된 인챈트를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생각보다 기지어는 전반적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베르융 경, 경께서 따로 배치하지 않으신 그 150명의 정규군은 본래 조이 경의 부대로 편찬될 계획이었지요?”

베르융의 표정이 바로 그것을 증명했으리라.

“그것을 어찌 알았지?”

“비록 실전을 치러본 적은 없으나, 사선 대형이 다른 대형보다 부대의 합을 요구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대형을 연습하는 부대에 어느 곳에도 편찬되지 않은 병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지어는 강한 어조로 눈속임용 부대라 지칭한 말을 짚으며 단언하듯 말했다.

“조이 경을 위시한 기만 부대라면 발기지르의 어떤 기사라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니, 없습니다.”

조이는 베르융과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기지어에게 납득 당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들의 눈빛은 한 점이 되어 내게 집중되었다.

“기지어.”

내 부름에 기지어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예를 갖췄다.

“예, 영주님.”

“기만을 능히 깨트릴 수 있는 기사가 발기지르에 있다면?”

나는,

그의 확언에 정을 대고 망치질을 하듯 되물었다.

“그래서 기만을 꿰뚫고 바로 리케니엔을 향해 돌격한다면 어쩔 생각입니까.”

하지만 정을 대고 망치질을 해봤자,

“그들은 결코 리케니엔으로 진입하지 못합니다.”

그는 되려 더욱 강철같은 확답을 늘어놓을 뿐이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최후방엔 영주님이 배치되어 있을 테니까요.”

* * *

“소여, 지금 뭐라고 했어?”

놀란 눈으로 재차 묻는 베빌리에게, 소여는 미안과 바람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힘겹게 대답했다.

“말씀드린 대롬다, 저 깃발 아래서 일 해보고 싶슴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제가 길잡이님께 언제 실없는 소리 한 적 있슴까.”

“많잖아.”

“아…,”

소여는 슬쩍 눈을 흘기며 베빌리의 시선을 피하다가도, 이내 당당히 맞서듯 눈을 마주쳐왔다.

“소여, 무엇이 너를 움직이게 했지?”

베빌리는 침착을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

소여에게 떨어진 기로는 예전 자신에게 주어졌던 것과 아주 비슷한 것이었으니까.

그러자 소여는 턱을 살살 긁으며 꽤 깊숙이 들어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귀는 안 잘렸어도 출신은 드러난 뿌림다.”

드러난 뿌리.

그것은 귀 큰 자들의 신분 계급 가운데 최하층을 의미했다.

그 위로는 곧은 뿌리가 있으며,

이 위로는 핏줄로만 계승되는 위대한 뿌리가 존재한다.

이렇듯 가장 낮은 신분인 드러난 뿌리 출신들은 숲 사회 내에서 쉽게 분류할 목적으로 증거를 남겼는데,

바로 한쪽 귀의 끝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물론 소여와 같이 어렸을 때부터 숲 밖을 벗어나 살았다면 드러난 뿌리 출신임에도 귀가 잘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수가 극히 적은 게 문제지만.

“제가 어렸을 적부터 용병 일을 해왔는데 말임다.”

소여는 그때 느꼈던 기분을 회상하듯 들뜬 표정을 지었다.

“거기서 마주쳤던 깃발 가진 인간들은 명예란 걸 갖고 있었슴다.”

그러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꿈을 꾸듯 말을 잇는다.

“명예란 건 말임다, 돈과는 다르게 쓰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위 모두가 우러러 봐줌다.”

“그래서?”

“저는 명예라는 걸 벌어 보고 싶슴다.”

“캐룸 원정대에선 네가 원하는 명예를 벌 수 없었던 거야?”

“다름다.”

소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듯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도 금화가 있고 공용 금화가 있듯이, 이 아이베리아에 있는 명예는 다른 명예하고 다름다.”

베빌리는 소여의 눈 속에 짙게 밴 동경을 읽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감춰야만 했다.

그가 가진 동경에 하마터면 감화될 뻔했으니까.

“대장이 그랬슴다, 이 깃발의 주인이 대장의 이정표였다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슴다. 길잡이인 대장이 그 이정표로 나를 안내했다고.”

못내 아쉬움이 들면서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대감을 느낀 베빌리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현듯 나타난 기로 앞에,

선택 내릴 수 있는 건 오롯이 본인뿐이란 걸.

베빌리 본인이 걸어오며 증명했었으니까.

“무엇보다 여기 깃발의 주인님은 편견이 없어 보임다. 개인적으로 생기신 것도 별 대가리 후려칠 정도여서 맘에도 들고…,”

“나라도 디안님을 골랐을 거야, 소여. 아직 나는 그분에 비하면 덜 매력적인 선택지이니까.”

자조적인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베빌리에게,

소여는 진지한 얼굴로 반박했다.

“대장은 선택지가 아님다.”

“그럼?”

“대장은 길잡이지 않슴까, 내가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길로서 늘 있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슴다.”

“소여, 요 얍삽한 놈! 나를 보험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다시 능글맞은 모습으로 돌아온 소여는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생각보다 명예 버는 게 빡시면 돌아갈 길도 있어야 하지 않겠슴까.”

“아니, 쉽게 돌아오진 마.”

베빌리는, 그런 소여를 단호하게 꾸짖었다.

“적어도 너의 가치를 알아내기 전까진 말이야. 디안님이라면 네가 걸으려는 길의 종착역까진 데려가 주실 거다.”

“아쉽지 않슴까?”

“아쉬워.”

“미안함다.”

“하지만 그만큼 기대돼.”

“대장…,”

“여기서 네가 명예 한 바가지 벌면, 나중에 너를 통해서 캐룸 원정대 파견 사업 같은 걸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도 대장의 보험이 돼버린 검까?”

소여의 반문에 베빌리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잠시 후 둘은 서로 뭐가 그렇게 웃긴지 배를 잡고 한참이나 박장대소했다.

* * *

복도를 서성이다가,

소여의 방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와 웃음소리를 듣던 세멜레아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서 품속에 고이 접어 가지고 있던,

작은 편지 하나를 매만지다가.

비어있는 베빌리의 방문 틈에 끼워 넣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어떻게 되었습니까?”

배불뚝이 종자의 물음에,

기스 블로사는 이마에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핏대를 일으켜 세우며 씩씩거렸다.

“볼품없는 뱀 새끼, 기회가 된다면 혀를 따서 술로 담가주마.”

아이베리아에서 금지어나 다름없는,

그 불경한 이름을 듣고서도 심드렁한 반응으로 무시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배불뚝이 종자의 도움을 받아 말 위로 단숨에 오른 기스는 막 다가오는 두 견습 기사를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앞길을 틀어막은 견습 기사 둘 가운데 하나가 적대적인 뉘앙스로 묻자, 기스는 무시로 일관했다.

그러자 다른 하나가 창대를 들이밀며 으르렁거린다.

“어디로 가는 거냐 물었습니다.”

“건방진 휘장닦이 새끼들이…!”

“영주님께서 네놈을 이곳에 체류시키라 명하셨다.”

기스의 욕설에도 흐트러짐 없는 기세로 다가오는 견습 기사의 불호령에,

“좆까, 씨발.”

그는 더욱 신랄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삐를 잡았다.

“저놈 잡아!”

말머리를 돌려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가는 그를 향해 소리치는 견습 기사의 말에,

어디선가 날아든 볼트 하나.

픽── !

그것이 기스의 왼쪽 갑옷 틈새에 정확히 박혔다.

“크윽…!”

그러나 자세가 잠시 흐트러졌을 뿐, 기스는 이를 악물고 발기지르의 내성을 가로질러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갔다.

“그놈의 테티르 론바즈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고? 그럼 내 친히 그에게 가서 직접 알려주겠다!”

주성 밖을 빠져나가며 다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치는 그 뒤로 다섯의 추격이 붙었지만,

그런 그들을 희롱하듯 기스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베나즈의 깃발이 일어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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