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68화 (168/365)

168화. 돌발

오찬을 대접받고 방으로 돌아오면, 못 보던 쪽지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쪽지는 향초를 먹인 고급스러운 종이여서 집어 드는 것만으로도 은은한 향기가 퍼졌는데,

그 향기는 내겐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세멜레아.

그녀가 남긴 것이 틀림없다.

소박한 침대 끝에 걸터앉아, 맞물린 쪽지를 펼쳐보자 춤추듯 유려하게 써진 글귀들이 이내 눈을 가득 채웠다.

길잡이 베빌리에게.

본디 나무는 한 뿌리 위로 솟아나는 것이지만,

한 나무 아래 뿌리는 서로를 갈라치기 바쁘니.

이보다 귀 큰 자들의 사회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은 없다.

‘라’의 시인 아가코쉬의 시문 중 하나지요.

숲에 살 때는 이 시가 와 닿지 않았는데,

지금은 유독 이 시가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우습지요,

이런 걸 써 내려갔을 나를 생각하면.

저도 요즘 제가 우습습니다.

숲 밖에선 뿌리를 볼 수 없음에도, 지금껏 아둔한 뿌리를 들먹이며 행세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요.

어쩌면 이 편지는 대면할 용기가 없는 제 창피함의 증거일 수도 있겠습니다.

베빌리,

당신의 안내 끝에 저는 교차점 앞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도 결정했지요.

저는 맨드들의 숲에 발을 들일 생각입니다.

이곳 깃발에 도움을 간청해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제 근원적 고민을 해결해볼 생각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원정을 떠날 수 있다면 좋겠군요.

세멜레아가

갈수록 담담해지는 필체 끝, 마침표에 시선이 다다르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펼쳐 든 종이를 다시 고이 접어 짐가방 속에 넣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와 그리 가깝게 지내지 못해 그사이가 아직도 서먹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섭섭한 기분에 괜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만 섭섭함마저 가시고 난 뒤엔,

그녀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들었을 뿐.

숲 사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많이 없지만, 적어도 고라드의 그 지독한 전통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다.

자세한 건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 전통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만약 내가 그녀의 그 무거운 심중에 이해 한 방울 정도만 떨어트릴 수 있었다면,

그렇다면 좀 더 따듯하게 그녀를 대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괜찮다.

그녀가 끝에 여지를 남겼듯이.

나도 후에 그녀를 맞이할 여지를 마련하면 될 일이니까.

이제 묵묵히 펼쳐놓았던 물건들을 짐가방 안에 차곡차곡 쌓으며 떠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떠나십니까.”

디안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문틀에 살짝 기대어 서서 은은한 미소를 흘리던 디안님은 곧 등 뒤에 감췄던 술잔을 내밀어 보였다.

“그 전에 식후주 한잔 정도는 괜찮겠지요.”

나도 모르게 광대가 입꼬리를 당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짐 정리를 멈추고 디안님께 술잔을 건네받은 나는 쭈뼛쭈뼛 침대에 똑바로 앉아 눈치를 살폈다.

“시간을 담아야 할 광주리가 이렇게 많은데, 당장 쏟아지는 시간으론 광주리 하나 채우기도 벅차니 애석하군요.”

꽤 그리웠다.

디안님의 노랫소리 같은 말이.

어머니와 셋이 도란도란 식탁에 앉았던,

내게 기회를 제시했던,

그 따스했던 순간이 떠오르네.

“디안님이라면 광주리가 아니라 한 컵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그걸 알고 식후주를 준비하신 거 아닙니까?”

“이게 그렇게 끼워 맞춰지는군요.”

아까의 긴장은 어디 갔는지, 나도 모르게 털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만남의 끝맺음이라는 게 생각 외로 어렵군요.”

디안님의 한탄에 나는 술잔을 들어 올려 한마디 보탰다.

“저마다의 상황이란 게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동감했다.

방금까지 나도 만남의 끝맺음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베빌리, 당신과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여지는 있지 않겠습니까.”

“여지?”

“우리의 만남이 이걸로 완전히 끝난 건 아니잖습니까.”

내 말에 디안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술잔을 살짝 기울였다.

“맞는 말입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아직 많은 만남이 남아있으니, 구태여 이 만남에 조바심을 느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살라엑스의 노래, 종장이군요.”

디안님이 내 말의 기원을 알아봐 주시니 순간 기분이 날아갈 것같이 좋았다.

“그게 좋겠습니다, 이야기는 잠시 뒤로 물립시다. 만남은 계속될 테니.”

부담감을 덜었는지, 한껏 홀가분한 모습으로 웃는 디안님이 마지막 한 모금을 남긴 잔을 내밀었다.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그 잔을 부딪쳤다.

“베빌리, 이 땅을 떠나는 길까지 베나즈의 깃발이 당신을 지켜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잔을 비움으로써 두 번째 만남을 끝마쳤다.

* * *

“잘 부탁드림다, 소여라고 함다!”

투박하고 엉성한 언행으로 인사를 올리는 소여에게,

“당신은…?”

할리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소심히 대꾸했다.

“쓰임을 받고 싶다 간청드리니, 바돈 어르신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셨슴다.”

말을 마친 소여는 막 생각났다는 듯 서둘러 품속에 가지고 있던 종이를 꺼내 할리에게 내밀어 보였다.

그 안에 적힌 것은,

“추천서…? 오르테…?”

“그렇슴다, 바돈 어르신이 기사 어르신께 제 요청을 전달했더니 기사 어르신이 이걸 적어 주셨슴다.”

소여의 말을 들은 할리는 찬찬히 종이에 적힌 내용을 훑었다.

“귀 큰 자 소여는…, 숲길에 능통한 인재이니 정찰대 휘하로 들이길…, 추천하는 바이다. 베르융…, 오르테.”

할리는 오르테 가문의 인장을 보자마자 버릇처럼 머리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묘한지,

입을 떡하니 벌리며 종이에 적힌 내용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반복해 읽어내려갔다.

리케니엔에는 아직 명확한 군사체계가 없지만,

어쨌든 따지고 보면 직속인 사령부에서 정찰대에 내려진 첫 공문이지 않은가?

“쓰임에 맞는다고 판단되시면 적극적으로 저를 써주십쇼.”

“그…, 잘 부탁드립니다. 소여.”

“예, 대장.”

대장이란 말에 할리는 저도 모르게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소여, 애석하게도 좋지 못한 시기에 오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임까?”

할리는 본인이 아끼는 가죽 손목 보호대를 소여에게 건네며 경고하듯 말을 이었다.

“곧 출정이 시작될 겁니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지럽혀진 학술원 안,

세 남자가 머리를 맞대고 고심을 나누고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 담긴 것들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 바깥으로 뜨거운 기류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 중 기지어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조엘, 말해 보게.”

“개척될 보급로는 소형 마차가 한계입니다. 중형 마차를 이용하려면 길이 커져 공사에 시일이 더 소비될뿐더러 적들의 정찰에 걸릴 위험도 있으니까요.”

그 말에 폴란이 반론한다.

“소형 마차로는 본대를 유지 시킬 수 없습니다, 기만에 딸려 들어온 적들의 섬멸에 시간이 걸리기라도 한다면 뒤이어 진입하는 적병의 부담을 오롯이 본대 홀로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기지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폴란의 말이 맞아.”

그러면서도 끝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조엘의 말도 맞지. 결론적으로 우리가 아무리 고심해봤자 적들을 싸매고 있는 베일이 벗겨지지 않는 이상 이 모든 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네.”

기지어,

그의 눈빛이 통찰로 반짝인다.

“정찰로 얻은 적들의 정보는 모두 세 가지, 하나 과거 기사왕의 선봉 칠기사 중 하나인 테티르 론바즈.”

이어 폴란이 맞받아 잇는다.

“둘, 발기지르 측에 속한 떠 있는 눈.”

마지막으로 둘의 시선을 한몸에 담은 조엘이 서둘러 마무리 짓는다.

“셋, 켄타나 측에 있는 의문의 기사…?”

곧, 기지어가 투박한 손으로 조엘의 얼굴을 가렸다.

“이 중 접점이 없는 켄타나는 제외.”

그러더니 갑자기 남은 손으로 폴란의 얼굴까지 가린다.

“떠 있는 눈도 제외.”

그러자 폴란이 펄쩍 뛰어올랐다.

“기지어님, 어찌 그들의 가장 강력한 정찰력을 배제하시는 겁니까?”

기지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당장 떠오르는 연결 고리가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성껏 준비한 기만에 누가 빠질 것 인가지.”

이어지는 침묵.

폴란과 조엘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고심하는 기지어로부터 굉장한 위압감이 흘러나왔으니까.

“테티르 론바즈, 그가 제일 먼저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어찌 그리 단언하십니까?”

폴란의 질문에 기지어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즉답했다.

“과거 기사왕의 선봉 칠기사나 되는 위인이 변방 깃발 휘하로 들어가 있다, 그 말인즉슨 발기지르의 깃발이 그를 붙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해왔다는 뜻이겠지. 바꿔 말하면 발기지르의 깃발은 위세가 그리 크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너무 비약적인 해석입니다.”

냉정히 반문하는 폴란에게 기지어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더한 의문을 제시했다.

“발기지르의 깃발 휘하에 테티르 론바즈가 있다는 것만큼 비약적인 게 또 있을까?”

이러한 제시에 폴란은 결국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또 기사왕의 선봉이었던 그가 베나즈라는 이름에 가졌을 증오와 원한을 생각하면 블로사가 물고 온 소식에 가장 극렬하게 반응할 것이야.”

잠자코 식은땀을 흘리며 경청하던 조엘이 기지어의 생각에 파문을 일으킬 질문 한 방울을 흘렸다.

“그렇기에, 그러한 관계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발기지르의 영주가 블로사를 틀어막지 않을까요?”

기지어는 살짝 놀란 눈치였으나,

“조엘, 물과 소문은 손에 담는다고 담아지는 게 아니야.”

담담하게 답변하고는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한 그의 모습에 폴란은 대번에 눈을 반짝였다.

“기지어님,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발기지르와 켄타나 간의 전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테티르의 부재로 발기지르 쪽에 큰 공백이 생기겠지.”

조엘은 이미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대국을 보고 있는 기지어와 폴란을 번갈아 보며 감탄을 삼켰다.

“우린 먼저 테티르 론바즈를 감당한다, 그 후에 도모할 지점은 바로 발기지르와 켄타나의 교착 점.”

기지어는 손가락으로 펼쳐진 지도의 한 부분을 찍었다.

“바로 이곳이야.”

* * *

야전에 차려진 거대한 천막,

그 밖에서 고통에 신음하던 기스 블로사는 연신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기대에 찬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허울뿐인 우리가 아닌, 그 안에 있는 사자에게 당도했으니까.

곧 천막 밖으로 장대한 기사 둘이 걸어 나왔다.

기스 블로사는 그런 그들의 등장에 퍼뜩 긴장을 주워 삼켜야만 했다.

둘 중 누구든 단신으로 붙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자들이었으니 말이다.

“들어와라, 테티르님께서 부르신다.”

둘 중 한 기사의 말에 기스는 피 흐르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천막 안으로 향했다.

그곳엔,

말 그대로 산과 같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분명 서 있는 쪽은 기스였건만, 그의 고개는 마주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올라가야만 했다.

“쫓기던 사냥감 주제에 제법 흥미로운 소식을 들고 있다지?”

과거, 기사 에르앵의 선봉 칠기사.

‘벽’

테티르 론바즈.

이 남자라면, 필시 가문의 수모는 물론 빌비온 자체를 백지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겠다.

기스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것을 말했다.

“위대한 기사, 테티르님이시여. 빌비온의 서쪽은 지금 때아닌 한 깃발의 기상으로 질서가 어지럽혀졌습니다.”

“이 땅에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거늘, 그런 일로 피를 흘리면서까지 내게 찾아온 것이냐.”

“그 깃발이 아이베리아에선 절대로 거론해선 안 될 이름이라면요?”

기스의 얼굴에 비열함이 덧대어지자,

테티르의 굳건한 사각 턱이 움찔거렸다.

“그 깃발의 이름이 베나즈라면요, 그 배신자의 이름 아래 과거의 기사들이 함께 라면요!”

퍽!

엄청난 타격음.

그것은 순간 천막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기스 블로사.

그의 머리는 테티르의 주먹에 골째로 짓이겨져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베나즈가…, 일어섰다?”

이내 테티르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분노를 곱씹었다.

* * *

차분함이 가라앉은 거리엔,

마중 나온 자들의 바람이 나부끼고.

재잘 대신 침묵 한입 베어 문 아이들은,

어른 눈치 살피다가 꺾어온 하얀 꽃 뿌리고.

그 위를 조심스레 즈려 밟고 나아가는 육중한 행렬은,

가슴께에 같은 깃발을 매고 있으니.

리케니엔의 베나즈가 이제 막 거국적 출병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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