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돌발 (2)
나의 방향, 나의 꿈이었다.
기사왕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그분의 휘장 아래 유감없이 깃발을 휘날렸고, 오롯이 승리만을 맛보았다.
그런 꿈같은 날들이 계속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꿈은 내 의지완 상관없이 불현듯 깨어지는 법.
기사들의 정점이라 불리는 남자.
내가 바라는 궁극적 목표 그 자체였던…,
맥레인 베나즈가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
나의 방향이 사라져 버렸다.
나의 꿈이 사라져 버렸다.
찬탈자, 배반자로 거듭난 맥레인이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거다.
깃발은 휘날려 줄 바람을 잃었고, 나는 승리해야 하는 이유를 잃었다.
이 배신감을 어떠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정처 없이 떠돌던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사로서 싸울 명분이 없지 않은가?
아니,
있다.
내겐 아직 기사로서 해내지 못한 업이 있다.
찬탈자 베나즈의 이름을 이 아이베리아에서 지우는 것.
배반자 베나즈의 이름을 이 빌비온 안에 격리하는 것.
복수는 살아있는 것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내 복수는…,
이제 시작되었다.
나는 말머리를 틀어 빌비온 동쪽 국경으로 향했다.
누구의 휘하로 들어가든 상관없었다.
그저 빌비온 동쪽 파수꾼이 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게 동쪽에 당도한 나를 발기지르의 영주는 버선발로 달려 나와 반겨주었다.
비록 볼품없는 바람이었지만, 결국엔 내 깃발이 다시 휘날릴 수 있었다.
발기지르의 영주는 야망이 큰 자였다.
그는 빌비온 서쪽 일대 세력을 흡수해 동쪽 너머, 아이베리아의 중원에 진출을 계획했다.
이러한 계획의 첫 발판으로 티히트라를 흡수하려고 했으나,
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누구도,
베나즈의 흔적이 묻은 빌비온 서쪽을 넘볼 수 없다.
그곳은 영원히 격리되어 야생에 잡아먹혀야 하는 곳.
설령 빌비온 서쪽의 어느 이름 모를 깃발이 일어선다 한들, 내가 그들의 영원한 벽으로서 군림할 것이리라.
물론 티히트라와 관련한 일로 나는 발기지르의 영주와 거래를 해야만 했다.
그 거래란 것은,
진출로.
내 직접 그것을 마련해 주겠다 약조해 주었지.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그 약조로 인해 자연히 발기지르의 기사들과 같은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제 내게 가장 소중한 동료가 되어버렸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은 곧 내가 원하는 방향이 되었다.
빌비온 서쪽을 등지고, 진출이라는 야망을 품고서 달려나가는 한낱 평범한 기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슴 뛰는 일이었어.
하지만 바로 오늘,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게 되어버렸다.
잊고 있던 내 원론적 목표가 다시 일깨워졌기 때문이다.
베나즈,
평생 죽어 엎드려 있을 줄 알았던 그 깃발이 일어났다.
심지어 그 일어선 깃발 아래엔,
기사왕의 검 중 하나인 베르융과, 서기관인 조이가 함께하고 있다.
이 무슨,
이 무슨 불경하기 짝이 없는 일인가!
절대로 거론해선 안 되는 그 이름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해 일어섰는가!
내 직접,
그것을 꺾어주겠다.
그토록 기다려 왔던 복수의 시간이 내게 주어졌음에 감사하며!
* * *
끓는 용암을 삼키듯, 간신히 분을 삭인 테티르는 손에 묻은 피와 뇌수를 닦았다.
기스 블로사,
그를 죽인 건 단순히 그의 입에서 베나즈의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기사도의 맹세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
본인의 안위를 위해 동료 기사들을 저버린 것.
그것이 기스 블로사가 죽은 가장 큰 이유.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곧 베나즈에게도 엄벌을 물을 생각인 테티르는,
곧장 천막을 박차고 나섰다.
그러자 천막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기사가 테티르에게 고개를 숙인다.
그들은 줄곧 테티르의 깃발 아래 충성을 맹세하며 전선을 넘어왔던 충직한 수하이자 동료.
테티르는 그 둘에게 근엄한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지금 그토록 바라왔던 숙원을 이루기 위해 말머리를 돌리려 한다, 이런 내 뒤를 따르겠는가?”
두 기사는, 테티르의 물음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무언의 맹세를 보였다.
“부관!”
그들의 충성을 엿본 테티르는 이제 부관을 불러 지시했다.
“지금 즉시 빌비온 서쪽 숲으로 향할 것이다.”
“고작 기사 둘을 데리고 말입니까?”
“병사 모두를 대동한다면 전선에 있을 동료들의 부담이 커진다. 내 숙원 하나 때문에 다른 것들을 그르칠 수는 없지.”
“하지만 테티르 경…!”
테티르는 부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가르웨가 그러한 공백을 충분히 매울 것이다. 그는 아주 훌륭한 기사니까.”
확신에 찬 테티르의 표정을 본 부관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정상적인 것들마저 품을 정도로 둘 사이에 세워진 신뢰의 벽은 매우 굳건했으니까.
그렇게 테티르는 두 기사를 대동해 서쪽으로 향했다.
* * *
막 날아든 노란 꽁지깃 새를 보자마자 깃펜을 들어 종이 위로 전달받은 현황을 휘갈겨 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엘은 지도를 측량하던 것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기지어님, 공사에 돌입한 것입니까?”
“그래, 조엘. 빠르면 이틀, 늦어도 사흘 안에는 우리가 원하던 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 거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다.
블로사가 가져온 소식을 듣고 발기지르가 군사적 행동을 취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니까.
그래, 군사적 시간으론 우리가 한참이나 우위에 있어.
다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나는 테티르 론바즈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그리고 그것 하나 때문에 지금 막연한 불안감에 떨고 있다.
그만큼,
테티르 론바즈는 내가 상정한 모든 일의 돌발 그 자체야.
그저 이런 막연한 불안감을 출정한 두 기사에게 짊어지는 것밖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나도 모르게 분함이 느껴져 주먹으로 책상을 후려쳤다.
잠자코 있던 조엘의 놀란 모습이 안 봐도 선했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아,
나는 아직 너무 작다.
과거, 거대했던 자들 속에 끼어들기엔 난 아직 너무 작은 사람이야!
그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한탄에 빠져 있는데,
불쑥 폴란이 달려들었다.
“기지어님!”
결국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인가!
내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폴란은 되려 당황한 눈치로 작게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영주님께서 곧 출발하신다고 합니다.”
아차,
잊고 있었다.
내 앞에 가장 거대한 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과거의 말판 위에 가장 거대한 현재의 말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곧 가지.”
* * *
잉걸불 묻은 향초가 몸을 일그러트리며 하얗게 늘어진 향을 흘린다.
막 가죽 안감을 입은 내 어깨 위로는 세라가 흘린 봄바람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 내 몸이 봄바람으로 완전히 젖길 기다리던 바돈은 이내 사슬이 딸린 흉갑을 내 몸에 체결시켰다.
이윽고 부부가 머리를 맞대며 체결된 흉갑의 가죽끈을 매듭짓고 있으면, 나는 그 위에서 손에 딱 달라붙는 가죽 장갑을 끼운다.
끝내 부부의 손으로 내 발등에 사바톤까지 덧씌워지면,
나는 물러나는 그 둘의 움직임에 맞추어 건틀릿을 착용했다.
기사 둘을 소집해 회의에 임했을 때 한 번 입어보긴 했지만, 다시 입어보아도 이 갑옷은 참으로 놀라운 물건이었다.
신체의 가동성은 물론이고, 무게의 제약마저 거의 거세되어서 마음만 먹는다면 이 상태로 며칠은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갑옷이 가진 방호력은 얼마나 뛰어날까,
궁금증이 일긴 했지만.
곧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 되려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그러나 주저함 같은 건 없다.
이 땅에 발을 들이기로 한 그 시점부터 각오했던 일이었으니까.
저택 지하에, 비로소 함께하게 된 두 사람을 위해서.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해내려 노력할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바돈과 세라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단단하게 고정된 갑주만큼이나, 그 둘에게서 느껴지는 굳건한 신뢰는 내게 있어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바돈…, 세라.”
내 말에 무릎을 꿇었던 그들이 일어나 내 어깨와 등을 매만진다.
갑옷을 입어 그 감촉이 투박했으나, 그들의 온기는 내 몸에 온전히 느껴졌다.
이어 앞으로 나아가 거치대에 올라와 있는 투구를 옆에 끼고, 낡은 아밍 소드와 워 해머를 허리에 무장한 채 나는 저택 밖으로 걸어나갔다.
밖에는 이미 마중을 나온 베르긴이 벤투스의 고삐를 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긴.”
“영주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와 짤막하게 인사를 한 뒤 안장 위에 올라타니, 낯선 무게감에 고개를 휘젓던 벤투스는 이내.
갑자기 흥분하여 허옇게 질린 김을 내뱉기 시작했다.
나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나침반이,
내가 나아갈 방향의 냄새를 맡은 것일까.
“영주님.”
막 고삐를 치대어 출발하려는 찰나, 헐레벌떡 뛰어온 기지어와 그를 따르는 두 사람이 보였다.
“본대 측에서 막 공사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이후 전방 소식은 정찰대가 교대로 직접 영주님께 전달 드릴 겁니다. 그럼…, 건투를.”
“건투를.”
그들의 인사에 같은 인사로 화답한 나는 베르긴과 눈빛을 나눈 직후 고삐를 잡았다.
목적지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쪽 언덕 능선.
명목상으론 리케니엔 최후의 보루가 되기 위함이었지만, 그저 그 역할에 충실할 때가 다가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 *
난데없이 부는 바람에, 공사를 진행하던 몇몇 병사들이 기구를 놓쳐 탄식을 내뱉는 와중.
베르융은 난데없이 그레이트 헬름을 뒤집어쓰고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베르융 경,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런 그의 모습에 견습 기사가 황급히 붙잡고 묻자,
“앞쪽에 방진을 구축해 놓아라.”
그는 투구 속 울림 가득한 목소리로 견습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견습 기사는 군말 없이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의문보다 떨어진 명령이 우선이었으니까.
“최악의 충돌을 상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다.”
이어지는 베르융의 말에 견습 기사는 저도 모르게 얼른 투구를 뒤집어쓰고 걸친 갬비슨의 가죽끈을 조여야 했다.
그렇게 본능적인 행동들이 끝나니 그제야 떠오른 의문 하나가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 시점에 적병이 들이닥친단 말씀입니까?”
“이미 그들은 근처에까지 왔네.”
그 말에 베르융은 담담히 대답하곤 말을 몰아 쏜살같이 나아갔다.
* * *
테티르,
그는 야성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직감으로 어느 순간부터 말머리를 돌렸다.
“테티르 경, 이쪽은 지도에서 설명하는 길과는 동떨어진 곳입니다!”
이에 뒤따르는 기사가 황급히 말려보지만,
테티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한다.
“리케니엔의 군이 저곳에 있다.”
그가 이렇게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거리에서 드러낸 기척에 누군가가 극렬히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향하는 방향에 그 누군가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흘린 기척이라는 건 인챈트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가진 재해를 마치 그물처럼, 주위에 연하게 흩뿌려 다른 인챈트를 가진 자가 반응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숨죽여 반응하지 않아도 될 것을 상대방은 오히려 극렬히 반응해 나선 것이다.
그렇다는 건 상대방은 본인을 보내선 안 된다는 판단이 들어서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겠고,
그런 판단이 바로 설 만큼 본인의 재량까지 알아봤다는 말이리라.
“나와라, 배반의 기사여!”
이윽고 기슭을 관통해 눅눅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평지에 도달하자,
테티르는 일순간 표정을 굳혔다.
“두 기사는 이대로 서쪽으로 이동하라. 다른 적들이 있을지 모르니 서로 다른 방향으로 리케니엔에 진입하도록.”
담담히 내려오는 명령에 두 기사는 서둘러 말 머리를 돌려 테티르로부터 멀어진다.
곧,
테티르의 앞에 나타난 한 기사.
“베르융 오르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