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70화 (170/365)

170화. 저돌적인 바람

과거의 두 재해가,

현재를 판가름하기 위해 불기 시작한다.

“변명은…,”

테티르는 난쟁이제 메이스로 베르융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의 눈감음으로 대신 듣겠다.”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두 기사가 동시에 고삐를 당기면,

말은 앞발을 쏟아내며 나아가고.

곧 서로에게 쇄도해,

가진 무기를 유감없이 휘둘렀다.

거목의 뿌리와 같은 메이스와 어느 유적의 기둥과 같은 대검이 잔상을 그리며 맞물리자,

───── !

아지랑이가 보일 정도의 굉음이 터졌다.

부딪힘의 근원으로부터 뻗어 나온 풍압은 땅을 솎아냈고, 푸른 나무엔 가을을 강요했다.

이내,

쏴아 ── !

두 기사 위로 싱그러운 나뭇잎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그런 빗발치는 이른 가을 속에서,

두 기사는 다시 부딪쳤다.

그들이 이루는 합 속엔 기술적 소양을 나누는 경의 따윈 없었다.

그저 쓰러트리기 위한 행위들의 연속과 충돌만 있을 뿐.

대검이 밤을 그리며 휘둘려지면, 메이스는 달을 그리며 솟구쳤다.

그 사이에 비산하는 불똥은 밤하늘의 별이었고,

뒤늦게 몰아치는 바람은 그 하늘의 풍류였다.

둘 사이에 합이 몇 번이나 오갔는가?

알 길은 없다.

그것을 지켜봐 줄 숲속 증인들이 모두 다 달아났으니까.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귀 큰 자를 통해 나무의 목격담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다행이리라.

이윽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충돌 사이에 소강이 찾아왔다.

갑옷 곳곳이 일그러진 두 기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 파편에 찢긴 것인지, 그들이 탄 군마는 군데군데 피를 흘린 채 한껏 상기된 상태였다.

이제,

둘의 대결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처음을 알리는 신호탄은…, 테티르로부터.

[22년, 훌리가트]

[열 개 산을 정형한 바람]

테티르 론바즈,

그의 메이스가 푸른 빛으로 반짝인다.

동시에 일대가 급격히 어두워지고, 스산한 바람이 그의 등 뒤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과거 지도의 일부분을 일그러트렸던 장대한 바람이,

그의 의지에 따라 이 숲을 장악한 것이다.

이에,

베르융 오르테는 안장 위를 두 다리로 딛고선 쭈그려 앉았다.

그 모습이 아슬아슬하여 위태롭게만 보였으나,

그의 경이로운 균형감각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락하지 않았다.

곧,

[19년, 바렌투스]

[대륙을 난타한 바람]

그의 먹색 대검에서도 푸른 빛이 일렁였다.

갑옷 곳곳에 휘감기기 시작한 바람결은 베르융 자체를 희미하게 만들 정도로 사나워서,

이내 장막 너머로 보이는 촛불의 형태와 같이, 베르융은 바람 앞에 춤추는 검은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모습이 되었다.

과거 한 문명에 선사했던 자연의 일방적인 폭력이,

그의 의지에 따라 신체에 재림한 것이다.

이것은,

진심으로 드러낸 그들 인챈트의 실체.

과거를 주름잡았던 그들이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

이윽고 이 영겁 같던 대치를 먼저 깬 것은,

베르융 오르테.

그가,

안장 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테티르는 초연한 모습으로 말에서 뛰어내려 자세를 다잡았다.

“베르융, 와라!”

그의 말에 화답하듯,

곧 하늘에서부터 검은 무언가가 떨어졌다.

* * *

조이 크레비디는 순간 놀란 눈으로 어느 한 방향을 주시했다.

그리고 곧, 주시한 방향에서 날아든 충격파가 조이와 그 일대를 덮쳤다.

급작스레 들이닥친 바람에 몇몇 병사들이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충격파에 이어,

──────── !

뒤따라온 무시무시한 굉음이 일대를 때린다.

“으아악!”

“뭐야!”

티히트라측 병사들이 귀를 막은 채 아우성을 내지르는 와중에도, 조이는 부릅뜬 눈으로 이를 씹었다.

그리곤 자신의 뒤에 있던 기수를 시켜 깃발을 번쩍 들어 올리게 했다.

“임박에 대비하라!”

한바탕 굉음이 휩쓸고 지나가 그 후유증이 남아있는 현장이었건만, 그것을 꿰뚫고 나오는 조이의 우렁찬 목소리에 병사들은 행동으로 답했다.

리케니엔의 정규군들이 전방에 오목한 형태로 방진을 구축하면, 그 뒤에 티히트라의 병사들이 장대와 파이크를 내세워 이빨을 구축한다.

곧,

저 멀리서 거친 편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조이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하나란 말인가?”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소리의 주인.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기사다.

그는 드러난 방진에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오히려 저돌적으로 맹진을 계속했다.

조이는 그런 기사 왼 가슴 판갑에 새겨진 문양을 포착하고는 고심에 빠졌다.

왼 판갑에 문양이 새겨졌다는 건 기사들 가운데서도 정예를 뜻하는 것.

마치 벼를 탈곡하는 것처럼, 저들은 일개 병사들을 상대론 무적에 가까운 존재다.

일당백이라는 말이 당연한 인간 흉기.

조이는 찰나의 순간까지도 머리를 굴리며 판단을 내렸다.

본인이 나서서 그를 제압해 향후 상황을 대비한 시간을 벌 것인가, 아니면 혹시 모를 충돌의 위험을 감수하고 진형으로 저 기사를 제압하는가.

답은 후자다.

시간보단 실전 경험의 축적이 더 중요해.

“충돌을 피하고 장대와 파이크로 철저히 무력화시킨다!”

조이의 명령에 타워 실드 방진 위로 장대와 파이크가 이를 드러내듯 앞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진형에 조이의 인챈트가 가미된다면,

말 그대로 전장 한복판에 누구도 극복 못 할 함정이 설치된 것과 다름이 없겠지만,

그마저도 조이는 일부러 배제했다.

그렇게 기사가 오목한 방진 안으로 들어서자, 양 끝 대열에 있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뒷길을 틀어막았다.

기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

안면을 향해 솟구쳐 있는 장대와 파이크를 쳐내 가면서.

그렇게 타워 실드와 말의 가슴팍이 맞부딪히자, 역시나 힘에 밀린 병사들 일부가 쓰러지며 방패 벽이 무너져 내렸다.

기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너진 방진 틈에서 병사 둘의 목을 귀신같이 베어 버렸다.

그러나 기사의 활약은 거기까지였다.

전신에 쇄도하는 긴 창대들을 모두 막는 건 무리였으니까.

곧바로 수십 개의 창살에 밀린 기사는 안장 위에서 굴러떨어져야만 했다.

리케니엔의 정규군과 티히트라의 지원군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마치 땅에 그를 박제하듯, 창살로 그의 전신을 짓눌러버렸다.

이는 분명 베르융이 그들에게 뼛속까지 스며들도록 교육한 결과물.

기사를 잡는 방법은 관절과 타박, 그리고 압박뿐이라는 주입식의 결과였다.

조이는 문 열리듯 전개된 방진 틈에서 말을 타고 나와, 세이버의 자루 끝으로 속박된 기사의 턱주가리를 날려 기절시켰다.

제법, 훌륭한 성과라 할 수 있겠다.

병사 몇의 희생으로 전쟁의 수표라 불리는 기사를 잡아냈으니까.

누군가는 이 말에 분을 삭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전쟁 자체가 염세적인 것 인걸.

직면한 상황 하나를 해결한 조이는 이제 당면하게 될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발기지르에서 보낸 군이 고작 기사 하나,

그러나 그 기사가 정예 중의 정예.

그렇다는 건,

대대적인 명령 하에 이뤄진 군사 활동이 아닌 한 깃발의 자발적인 행위.

간단하게 판단을 내린 조이의 눈이 통찰로 반짝인다.

테티르 론바즈,

기사 몇을 대동하고 이곳에 그대로 들이박은 것이로구나.

“베르융, 무사한 것이냐.”

조이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굉음이 들려온 방향을 주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간간이, 바라본 방향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묵직한 진동에 그의 갑옷이 달달 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퍼뜩 정신을 차린 조이가 병사들에게 명령한다.

“분대로 흩어져 일대를 수색하라, 이와 같은 기사가 최소 하나 이상은 더 있을 것이다.”

* * *

“소여…!”

사력을 다해 말을 몰던 할리가 뒤돌아 소여를 부르짖는다.

그 뒤로는,

소여가 묵묵히 말을 타고 할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물론, 할리 뒤를 따르는 건 소여 뿐만이 아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기사 하나가 엄청난 기세로 그 둘을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장, 이거 못 따돌리겠지 말임다. 저 새끼 엄청 빡셈다!”

“소여, 멈추면 죽음뿐이야!”

“어차피 이대로 가면 다아아 죽지 않겠슴까!”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야?!”

교대로 현지 상황을 리케니엔에 전달하려고 했건만, 할리를 위시한 두 명의 정찰대는 연속적으로 발생한 이변 끝에 쫓기듯 도망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직 할리에겐 소여가 낯설게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걸 가릴 때인가,

“혹시라도 혼자서 뭘 어떻게 해보겠다면 당장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소여! 명령이야!”

할리는 특유의 집중할 때나 급할 때 나오는 속사포 같은 말을 소여에게 내뱉었다.

“걱정마시지 말임다!”

“소여!”

할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따르던 소여는 말머리를 틀었다.

기사는 그런 소여를 따라 같이 말머리를 틀어 추격을 계속했다.

“이런…, 씨발!”

할리는 속으로 품고 있던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갈등했다.

이대로 리케니엔으로 돌아가 영주님께 상황을 전파해야 할까, 아니면 어떻게 되었든 소여를 도와야 할까.

정찰대의 본분을 다해야 하는가,

첫 동료의 생사를 지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해야 하는가.

몇 번 고민 끝에 할리는,

이를 악문 채 말머리를 돌렸다.

그 방향은 소여가 향한 쪽이었다.

“라베르, 이 방향 그대로 쭉 가줄 수 있겠지?!”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말의 목을 두들기며 귓속말을 하던 할리는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자신의 두 동공에 밤을 먹이기 위해서.

그렇게 한참 눈 감고 있던 할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엔 보랏빛 별이 떠올랐다.

그 반짝이는 눈동자로 주위 일대를 몇 번 흘기던 할리는, 대번에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정확하게 알아내곤 고삐를 틀었다.

* * *

고삐를 치대며 앞으로 나아가던 소여는,

안장 위에서 그대로 몸을 뒤로 돌려 뒤따라오는 기사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품에서 손 쇠뇌 두 정을 꺼내, 가공할만한 동체시력을 이용한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기사는 이미 소여가 쇠뇌를 꺼낸 그 순간부터 등에 메고 있던 카이트 실드를 전방에 내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소여의 손에서 발사된 네 발의 볼트는 기사의 카이트 실드에 불똥과 기스만을 남기며 흩날려졌다.

“단단한 놈….”

소여는 씁쓸한 얼굴로 혀를 찼다.

기본적으로 전신이 플레이트 아머로 뒤덮여 있으며,

그중에도 절반은 카이트 실드에 완전히 가로막혀 있다.

말의 눈을 노려 쏠까 하면, 마찬가지로 그 눈치를 동체시력으로 잡아낸 기사가 말 머리 위로 방패를 얹어 놓는다.

혹여나 말의 가슴이나 다리를 노려 쏜다고 해도,

이렇게나 바짝 붙어 있는 상태에선 쓰러진 말을 발판삼아 이쪽으로 충분히 날아들 수 있다.

일개 용병이라면 앞에서 한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겠지만,

저놈은 기사잖아.

이 거리에선,

저 기사를 무력화할 방법이 보이질 않는다.

소여는 초연한 표정으로 이내 거리가 완전히 좁혀지는 것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떼,

옆으로 쏟아지듯 치달은 말 한 마리.

그 위에는,

“대장?!”

강렬한 보랏빛 눈으로 기사와 소여를 번갈아 보는 할리가 있다.

기사는 즉시 팔을 뻗어 아밍 소드로 할리의 옆구리를 베었지만,

할리는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소여와 기사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고는,

이내 소여에게 눈짓했다.

그 시선의 방향은,

볼트와,

기사가 쓴 투구의 눈구멍.

소여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회심의 일격을 노리는 눈빛으로 쇠뇌를 들어,

첫발은 말 머리를 향해 쏘았다.

이에 기민하게 반응한 기사가 방패로 말 머리를 가려 막으면, 동시에 소여의 다른 쇠뇌에서 발사된 볼트가 기사의 투구에 날아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사가 쓴 투구의 눈구멍.

볼트는 정말이지 아슬아슬한 차이로,

그 눈구멍을 통과해.

팍 ─── !

기사가 그대로 바닥에 굴러떨어지고, 기수를 잃은 말이 흥분하여 그 자리에서 멈춘다.

찰나의 순간,

할리는 소여의 볼트와 기사가 쓴 투구 눈구멍의 규격을 육안으로 가름한 것이었다.

“허억… 허억…!”

절체절명을 빗겨나간 소여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다가도, 할리의 초인적인 능력에 감탄을 거듭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대장!”

소여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안장 위에서 상체를 숙인 할리에게 달려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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