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71화 (171/365)

171화. 저돌적인 바람 (2)

인챈트는 종류의 구분이 확실한 것과 달리, 해당 재해가 가진 힘의 실체는 모호한 것이 많다.

그저 거센 바람이었다, 지진이었다, 산사태였다.

그것이 어떻게 불고, 어떻게 진동했고, 어떻게 쏟아졌는지는 해당 인챈트의 주인조차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리라.

그렇기에 반대로 말하면, 소유한 인챈트의 실체를 전부 파악하고 있는 자들도 있다는 소리다.

이는,

해당 재해의 기록물을 직접 찾아본 자들 가운데서도,

그 실체를 자신의 재량으로 구현해낸 소수가 그러했으며.

아이베리아에선 그런 자들을,

전설이라 불렀다.

그리고 지금, 두 전설이 빌비온 동쪽에서 열렬히 맞부딪히고 있었다.

* * *

움직일 때마다 폭력적인 바람 소리가 귀청을 찢고,

움직임 속에 공격을 내지를 때마다 폭풍 한 올이 불어 숲 일부를 찢는다.

나무 밑동은 잔가지처럼 힘없이 부서졌으며,

이끼는 증발해버리고 땅속은 새로운 숲의 표면이 되었다.

그 모든 일련의 일들은 베르융, 그의 대검이 고작 다섯 번 휘둘려졌을 때 일어난 결과였다.

하지만 이러한 다섯 번의 공격에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테티르 론바즈.

그는 꼿꼿이 맞선 채로 방금까지 휘두른 메이스를 묵묵히 고쳐잡을 뿐이다.

그런 그의 등 뒤로는 갑자기 불어닥친 날카로운 바람에 별안간 숲 전체가 크게 요동쳤다.

느닷없는 두 폭풍의 맞바람에, 그 대치만으로 숲은 세워 올린 세월을 부정당하듯 갈려 나갔다.

이내 맞바람 상태에서 먼저 나아가 역풍이 되길 선택한 자는,

베르융.

그의 대검이 가공할만한 속도로 궤도를 바꿔가며 테티르에게 쇄도한다.

그 뼈대는 오르테 13번이라 불리는 그의 가문 고유의 검술이었지만,

이러한 바탕 위로 살을 이루는 것은.

19년, 바렌투스의 무자비한 파괴력.

이에 맞서 테티르는 들고 있던 메이스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우직하게 찍어 내렸다.

쾅───── !

메이스가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물처럼 출렁인 바닥이 큰 파장을 낳으며 퍼진다.

이러한 파장에 베르융이 충돌하는 순간 바람과 바람이 서로 뒤엉키는 기괴한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러나 땅이 꺼졌다 하여 바람이 못 불쏘냐.

그대로 파장을 관통한 베르융이 테티르에게 합 나누기를 강요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검과 메이스의 격주.

그 소리는 마치 화약이 터지는 것처럼 맹렬했다.

두 발 걷는 자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육체적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속도와 힘으로 점철된 합 사이엔 무수한 불꽃이 튀었다.

하나는 과거의 재해 그 자체가 되어 재림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일대를 장악한 바람에 신체를 편승한 방법으로.

그러나 같은 세기의 물줄기라 하여도 극점 형태로 쏘아지는 물줄기가 더 센 법.

어느샌가 테티르는 제 자리에서 세 발이나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대인 전에 특히 강한 재림형 인챈트의 특성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나를 뭐라 생각하는 거냐아아!! 내 이름은!!”

상대는,

“테티르 론바즈으으으!!”

기합으로 기세를 역전해내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양반이라서 베르융은 그에게 두 걸음을 다시 물려줘야만 했다.

물론 덕분에,

베르융 역시 테티르 못지않게 피가 끓었는지 양손으로 가득 쥔 대검을 머리 옆에 밀착시켜 세워 들었다.

그러자 투구 속 테티르의 눈빛이 일변한다.

“와라! 베르융! 기다리고 있었다!”

가진 인챈트의 발휘, 그 심화 단계.

[구현]

베르융을 휘감고 있던 바람이 갑작스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자, 테티르 역시 두 장딴지를 땅속에 처박고 기세를 가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의 양이 급격히 증폭된다.

그들은 지금,

가진 재해가 과거에 벌였던 일을 구현하려고 하고 있다.

기록으로 남겨진 파괴의 과정을!

시작은,

베르융으로부터.

[칠 일간의 난타]

이후는 테티르가.

[봉우리를 향한 첫 망치질]

재해의 주체가 되어 오롯이 재량 하나만으로 구현해낸 과거의 파괴.

그것을 이루기 위한 대검과 메이스가 실체 없는 잔상으로 서로 부딪혀 섬광을 낳는다.

체류하던 구름이 놀라 갈라지고,

그 안색이 심히 창백해져 일대는 어둑하다.

이내 길었던 섬광이 멎자,

그들은 서로가 낳은 충격파에 밀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뜨거운 물이라도 끼얹은 듯, 갑옷의 틈새에선 허연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위태롭게 상체를 부풀어가며 호흡하던 두 사람은 인챈트의 반동을 여실히 느끼며,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테티르, 아둔한 곰아. 너도 이제 늙었구나.”

“베르융, 너만 할까! 이 멸치 놈 같으니.”

신체에 큰 부하가 걸렸음에도, 테티르는 금방 숨을 고르고는 거리낌 없이 증오를 표출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냐, 찬탈자를 거들 생각이 들더냐? 기사로서의 정의보다 사사로운 옛정에 이끌린 것이야?”

그러자 베르융이 씁쓸한 말투로 되묻는다.

“어찌 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돌다 이곳까지 떠밀려 온 것이냐, 기사왕의 선봉이란 자부심이 낙엽처럼 가벼운 것이더냐?”

“닥쳐라! 증오의 기류를 타고 떨어질 곳을 찾아냈을 뿐이다!”

“그렇다면 사사로운 것에 시선이 돌아간 쪽은 내가 아니라 네 쪽이다, 테티르.”

“사사롭다? 정의를 사사로이 여기는 것을 보니 더는 기사이길 포기한 것이로군.”

“그것만 포기했을까.”

“네놈!”

“그는 정의를 위해 기사이기를 포기했다.”

베르융의 말에 테티르는 잠시 벙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렇게 되물어보고 싶었지만, 순간 머릿속에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명예를 부정했단 말이다.”

베르융의 말에 테티르가 고개를 젓는다.

“갑자기 웬 궤변이냔 말이야!”

“맥레인 베나즈는 그런 자다.”

“찬탈자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지 마라.”

“너는 기사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기사이기를 포기하고 명예를 부정할 자신이 있는가?”

“맥레인이 그러했다 이 말인가?”

“너는 양팔의 피를 끓여 기사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경험을 모두 증발시킬 자신이 있냐는 말이다!”

테티르는 기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찬탈자의 깃발은 광신을 위시해 세워진 것인가? 미쳤다고밖에 말할 길이 없군.”

그러나 베르융은 묵묵히 한쪽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확인해 보아라, 맥레인이 남긴 것이 무엇인지.”

“광신에 비롯된 지시에 내가 따를 소냐!”

“테티르, 나는 지금 네게 베나즈의 깃발을 일으킨 장본인에게 향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베르융에게.

테티르는 다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차분하게 생각해도, 베르융이 하는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테티르는 곧장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이윽고 이를 씹으며 베르융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그는,

“마다하지 않겠다, 베나즈의 마지막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할 기회를 놓칠 순 없으니까.”

휘파람으로 멀리 도망쳐있던 말을 불러 단숨에 올라탔다.

그러면서도 최후의 최후까지 베르융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테티르는, 막 고삐를 잡아 틀어도 아무런 반응 없는 그의 모습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렸다.

그렇게 테티르가 숲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기 무섭게,

베르융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테티르, 감당할 수 있는가. 너의 후회와 오해를.”

* * *

일대 하늘이 어두워지고, 저 멀리 숲 일부가 크게 휘청이길 반복하다가.

이내 짠 듯이 동쪽으로부터 튀어나온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멀리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이 리케니엔의 정찰대라는 건.

다만 새롭게 고용되었다던 정찰대원이 귀 큰 자 소여였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그들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주님!”

소여는 서투른 발음으로 나를 부르짖으며 다가왔다.

그런 그의 뒤엔 밧줄로 꽁꽁 묶인 할리가 힘없이 흔들린다.

“보고는 됐습니다, 소여. 리케니엔으로 가서 할리가 회복할 수 있도록 조치하십시오.”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론 할리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소여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나를 지나쳐 리케니엔 쪽으로 향했다.

이로써 전선 일대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이 시점에서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다.

낡은 검 자루 위에 손을 얹고, 그 안에 깃든 인챈트의 힘을 발휘한다.

곧 하늘 위 구름이 내 정수리를 중심으로 도망치듯 바삐 사라지고 그 공백으로부터 거대한 눈 하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0,

마그나베노스라는 태풍의 눈이.

그렇게 눈이 떠진 동시에 발현된 육감으로부터 막대한 정보량이 쏟아졌다.

아직까진 눈을 전개하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시기를 노려야만 하는 수고를 더해야 했는데,

마침 적절한 시기에 눈을 전개한 것 같구나.

숲에 펼쳐진 진영의 각 상황을 훑어 대략적인 일의 흐름을 가늠하는 와중,

누군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게 보였다.

육감의 눈으로 담기에 제법 버거운 자가.

* * *

말을 재촉해 한달음에 숲을 빠져 나왔다.

그러자 완만한 언덕 하나가 보였다.

저 언덕 너머엔 분명 리케니엔이 있겠지.

재차 말을 재촉하려는데, 순간 느껴지는 위화감에 나도 모르게 손에서 고삐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테티르,

네가 지금 보고 있는거…,

허상은 아니겠지?

속으로 되물어 봐도 내 의식이 확답한다.

“아…,”

기사왕의 눈이다.

과거 저 눈 아래 나와 내 동료들은 불멸의 존재였었다.

나와 내 동료들을 관제하던 명예의 굴레였다.

그런데…,

지금은 찬탈자의 땅 위에 떴구나.

부아가 치밀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 이건 필시 내가 겪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한 기분이리라.

“베나즈! 끝끝내 그 이름으로 찬탈의 끝매듭을 지으려 하는구나!”

괴성을 지르며 말을 닦달했다.

언덕 너머에 있을 베나즈의 마지막 씨앗을 짓밟기 위해서.

그렇게 언덕 위에 오르자,

맞은편에 우뚝 서 있는 한 기사가 보였다.

아니, 무늬만 기사의 형태를 띤.

“네가 베나즈의 마지막 씨앗이로군!”

틀림없는 베나즈다.

본능적으로 메이스를 부여잡고 가진 인챈트의 힘을 발휘하려고 했지만,

잊고 있었다.

저 눈이 내 재해를 관제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상관없다.

완력으로 짓이겨주마, 친히 내 두 손으로 너를 누워있는 자로 만들어주리.

그토록 바라왔던 숙원을 이루는 나는…, 내 이름은…!

“나는 테티르 론바즈으으!!”

말과 말의 머리가 서로 교차하는 그 순간 메이스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 놈의 머리통을 그대로 날려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가 타고 있는 말,

저 교활한 프레쳅스가 말도 안 되는 게걸음으로 내 공격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동시에 주도권을 쥔 그는 자루가 아닌 낡은 검날을 잡고 마치 철퇴를 다루듯 휘둘러 가드 부분으로 내 턱을 후려쳤다.

삐익 ──── !

순간적인 이명과 반짝임이 내 머리통을 뒤흔들었지만, 그 사이에서 놈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전력을 다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 찰나의 사이에 이미 내 턱 아래엔 놈의 검 자루가 쇄도하고 있었다.

뻑 ─── !

재차 이어진 충격에 그대로 안장 위에 떨어졌지만, 곧바로 일어서 자세를 곧추세우고 있으면.

그 역시 기다렸다는 듯 안장 위에서 내려와 검을 고쳐잡았다.

“멍청한…, 스스로 유리한 조건을 걷어 차버리다니.”

찬탈자가 그 대단한 글라디옴이라고 해봤자, 그에게 물려받은 건 그 아류.

그렇다면 이 승부의 승리는 내 것이다!

뒷발을 축 삼아 앞발을 크게 내세워 순식간에 그의 지척에 다다른 나는 메이스를 찌르듯 내질러 그의 가슴을 무너트렸다.

아니, 그게 계획이었다.

“억…?!”

폼멜로 메이스를 쥔 내 손등을 정확히 후려치다니, 제법…!

상관없이 기세로 몰아붙이려 발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

“이… 익!”

나는 이미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뭐야!”

속에서 엉킨 신경질을 입 밖으로 토해보지만, 나를 무릎 꿇게 한 공격은 그 자체를 보지 못해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겠다.

베르융, 결국엔 기만 작전이었는가.

내 힘을 빼기 위한…!

나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스스로 이런 같잖은 핑계를 대다니!!

“으아아!”

타박 따위, 아무리 쌓여도 나를 끝낼 순 없다!

놈의 가슴을 중심 삼아 원을 아우르는 여섯 방향으로 메이스를 회전시켜 수 없이 휘둘렀다.

그런데 마치 물을 베는 것과 같이, 놈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유려한 검술로 내 모든 것을 쳐내고 있었다.

이건…,

맥레인의 검술이 아니다.

“대체 뭐냐, 네놈은…!”

모든 공격이 무위로 되돌려진 찰나, 내 근원적 물음에 그는 초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디안 베나즈다.”

이윽고 그가 검을 방망이 휘두르듯 내 투구를 후려쳐 벗겼다.

그 반동으로 나는 어느새,

그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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