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72화 (172/365)

172화. 국면

검 자루 위 가드가 흔들거린다.

폼멜은 반쯤 돌아가 언제 뜯겨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고, 검날은 이가 다 빠져 조금만 휘둘러도 부러질 것만 같다.

비록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아밍소드였다고 해도,

테티르 론바즈.

그와 잠깐의 합을 나누고 얻은 여파는 실로 대단했다.

과거 기사왕의 선봉 칠 기사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살갗으로 와닿는 느낌이야.

순수한 완력이라는 건 말 그대로 경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테티르는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다가, 이내 읍소하듯 물었다.

“찬탈의 매듭이 아니었단 말인가.”

충혈된 그의 시선이 곧 내게로 향한다.

“왜 네게서 맥레인의 야심이 보이지 않느냔 말이야…, 내가…, 눈이라도 먼 것인가?”

“반대로 이제야 눈을 뜬 것일 수도 있겠지.”

“개소리…, 나를 끝까지 능멸하려는 것이냐?”

나는 조용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꾸짖었다.

“패배자여, 업신여김을 멈춰라. 너는 이제 베나즈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잖는가.”

“무슨 자격으로…?”

“맥레인의 희생이 만든 자격으로.”

테티르는 내 말을 곱씹다 마치 극독을 맛본 듯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맥레인이…, 0을 지키기 위해…?”

오해의 갈대 사이를 헤집으며 스스로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로 혼란해 보였다.

희끗희끗한 수염을 실룩거리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길 반복하던 그는 이내 허망하고 슬픈 표정으로 흐느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의 후회는, 나의 오해는…,”

그런 그의 목에 검을 내리꽂듯 가져다 대고 있던 나는,

짧은 위로를 던졌다.

“바로 잡아야지.”

“그게 가능한가?”

“함께하기를 선택한다면.”

말을 마치고 그의 목에서 검을 거두자,

테티르는 말 그대로 긴 꼬리 유성과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춤 없이 울었다.

철제 건틀릿을 벗고, 드러난 가죽 장갑으로 흐르는 눈물을 틀어막듯 훔치길 몇 분.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나와 내 등 뒤로 펼쳐진 하늘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메이스를 땅에 처박고 한쪽 무릎을 들어 자세를 고쳤다.

“아미리르텔의 전 영주이자 선봉 칠 기사 테티르 론바즈. 긴 방황 끝에 이 자리에 왔습니다.”

아까의 호기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담담하게 고백하듯 가슴에 손을 얹으며 선언을 이어가는 테티르.

“아둔했으며, 이치에 밝지 못했고, 못난 증오심만을 키워온 이 비루한 홀씨가 다시 거대한 숲으로 돌아왔나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토르킨 선생께 배운 예법대로 낡은 아밍소드를 들어 그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러자 테티르, 그 거대한 남자가 상체를 구부리고 기사의 예를 갖춘다.

“나는 디안 베나즈, 리케니엔의 영주이며 맥레인이 남긴 마지막 의지다.”

아직 그를 신뢰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가 가진 힘과 영향력만큼은 신뢰해.

그렇기에 나는 테티르, 당신을 철저하게 이용할 것이다.

동시에 당신은 베나즈라는 이름 사이에 무너져내린 신뢰를 회복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야.

“테티르 론바즈, 돌려 말하지 않겠다. 너는 과거 0의 주인을 위해 보였던 충성을 지금 다시 보일 자신이 있는가?”

의례를 빌미로 담담하게 내지른 내 무례한 말에,

테티르는 고민 없이 즉답했다.

“다시 보일 것을 맹세합니다.”

* * *

발기지르의 기사, 가르웨는 속속들이 복귀하는 정찰 부대를 지켜보며 초조함을 느껴야만 했다.

테티르 경이 전선을 이탈했다.

여기까지는 그리 심각한 이야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만한 성정을 가진 자이기도 했고, 필요한 때엔 언제나 본인이 있어야 할 위치에 나타났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병사에게서 황당한 보고를 들은 가르웨는 천막 안에서 기울이기로 했던 술잔을 엎지르고 말았다.

테티르 경이 휘하 기사 둘을 데리고 리케니엔으로 진격했다.

이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지금은 동화 속 존재가 되어버린, 과거 전설의 기사.

돈클로제가 그랬던 것처럼 단신이나 다름없는 초라한 군세를 이끌고 미지의 지역으로 진군을 감행했다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곧 다가올 새벽은 켄타나가 예고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

빌비오나스에서 벌이게 될 이 대대적인 전투에서 테티르 경의 부재는 아주 큰 전력 손실.

잘못하면 전선을 후퇴해야 할지도 모르는 패배를 겪을 수도 있다!

가르웨는 한쪽 다리를 떨며 허리춤에 있던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세 시간 후…,”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린다.

빌비오나스에 원하는 진형을 구축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 후에는 대대적인 출정을 시작해야 한다.

가르웨는 애써 차분함을 유지한 채 탁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훑었다.

테티르 경의 복귀가 요행이 되어버린 이상, 그의 존재를 부정한 채 전술을 다시 짜내야 했으니까.

그러면서 그는 발기지르의 영주를 향해 속으로 힐난을 던졌다.

테티르 경의 능력만을 믿고 켄타나의 주력군을 상대로 단 두 기의 깃발만을 내세우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말이야.

애초에 발기지르의 영주는 이 일대 땅의 소유권을 쥐고 있던 유지였다.

그런 한낱 지역 유지 따위가 지금은 분수에 맞지도 않는 깃발을 휘하에 두고 휘두르는 꼴이라니.

덕분에 품은 야망만 더욱 비대해져만 가는구나!

사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지금 아이베리아 중원은 과거 이상이 무너지고, 그 이상을 따르던 전설적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 각자의 이상을 위해 자신의 깃발을 내세워 전투와 화합을 반복해가며 새로운 인재들이 범람하게 된 것도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지.

이런 빗발치는 희대의 인재들 속에, 발기지르의 영주는 말 그대로 뱀 머리의 본보기와 같은 자라 할 수 있다.

쾅!

가르웨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탁상을 내리쳤다.

어쨌든 자신은 기사로서 발기지르의 깃발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런 맹세가 고작 테티르 경의 부재로 희미해지니 스스로 분노가 치밀 수밖에.

가르웨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탁상 위 지도를 내려다보며 각오를 다졌다.

오늘 새벽,

빌비오나스에 자신의 생과 사를 같이 묻고 오겠노라면서.

가르웨는 곧장 부관을 불러 명했다.

“새를 모두 풀어 적진으로 날려 보내라.”

“가르웨 경, 그러다가 새들이 다 죽…,”

“이번 전투는 내내 죽음이 함께해야만 승리를 노릴 수 있다.”

지금껏 쌓아두었던 새들과의 유대가 오늘 다 무너져 내리겠지만, 그 과정에서 적진에 모든 정황은 자신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준비하라, 출정이다.”

결의를 다지며 명하는 가르웨의 모습에, 그의 부관은 군말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명을 받들었다.

그렇게 부관이 군에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천막 밖을 나서는 순간,

밖에서 들려오는 뿔피리 소리와 한 병사의 외침이 들린다.

“테티르 경께서 돌아오셨다!”

가르웨는,

저도 모르게 서둘러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테티르 경!”

이제는 나의 소중한 전우인 가르웨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달려왔다.

그의 얼굴엔 반가움이 묻어 있었지만, 동시에 처참한 내 몰골을 보고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그 전에.”

“그 전에…?”

“병사들은 전선을 물리고 퇴각할 준비를 해 놓아라.”

내 말에 모두의 표정이 급격히 일변했다.

그중 가장 안색이 창백해진 것은 단연 가르웨였다.

“테티르 경…!?”

“가르웨, 따라오게.”

서둘러 그에게 턱짓하며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엔 방금까지 고심했던 가르웨의 열기가 느껴졌다.

“테티르 경, 전선을 물리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급히 뒤따라 들어온 가르웨가 따지듯 묻자, 나는 군말 없이 손가락으로 탁상 위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러자 가르웨의 시선이 내 손끝에 맞물리더니 거기에 적힌 글귀를 나지막이 속삭인다.

“리케니엔…?”

“베나즈의 깃발이 일어섰다.”

그 말에 가르웨는,

더욱 당황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아마도 그 소식에 가장 극렬하게 반응할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베나즈의 이름을 담담히 거론하는 내 모습에 가르웨는 미간으로 궁금증을 집어야만 했다.

“하여, 리케니엔으로 진격하신 겁니까?”

“그래, 이미 빌비온 서쪽에 제법 단단한 기반을 쌓아놓았더군.”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가르웨.”

내 부름에 가르웨는 자세를 다잡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네 앞에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그 선택지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뱀 머리가 뱉는 말을 따를 것인가, 아직 의심스러운 이상을 말하는 용을 따를 것인가.”

가르웨는 내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의 유려한 곱슬머리가 한쪽으로 치우친다.

내 말의 뜻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겠지.

그러나 가르웨는 곧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다짐했던 맹세를 쫓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것이 기사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 맹세의 근원을 잘라낸다면.”

가르웨는 일순간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말을…,”

“물었네, 내가 자네 그 맹세의 근원을 잘라낸다면.”

“반역을 입에 담으시는 겁니까.”

가르웨는 경직된 표정으로 검 자루 위에 손을 얹었다.

“테티르 경, 기사이기를 포기하시는 겁니까?”

“가르웨, 나는 지금까지 기사이길 믿고 있었던 아둔한 자였을 뿐이야.”

“대체…, 리케니엔에서 무엇을 보신 겁니까!”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묻는 가르웨에게 나는, 죄책감으로 떨리는 입술을 겨우 진정시키고 답했다.

“베나즈의 의지로 0이 돌아왔네. 그 새로운 주인과 함께.”

“허.”

가르웨는 저도 모르게 허파에 남아있던 바람을 빼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지금 저보고 믿으란 말입니까?”

“믿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믿어보기로 하고 행동에 나서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니.”

이는 그저 지금껏 내가 쌓아온 오해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뿐.

그 과정에서 한 줄의 오명이 낙인처럼 따라다닌다고 한들,

더는 세상이 나를 기사로 불러주지 않는다고 한들.

상관없다.

비록 지금 걸으려는 그 길이 과거 그토록 영광스레 걸었던 길과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설령 내 바람과 달라 또 다른 후회가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상관 안 해.

여러 만감을 곱씹으며 대답을 기다리는 내게,

가르웨는 말없이 자루에 얹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가르웨?”

“군을 통솔해 뒤따라 가겠습니다.”

“진심인가.”

“당신의 진심에 그럼 제가 무엇으로 답해야 한단 말입니까. 기사의 천칭을 기울이는 게 정의라면, 전우의 천칭을 기울이는 건 의리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의 말은,

뜨거운 내 가슴에 마른 장작을 들쑤시는 것과 같았다.

“그럼 이따가 보세, 전우여.”

가르웨는,

한껏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씁쓸한 듯하면서도 식은 웃음을 지었다.

* * *

“어찌 영주님께서?!”

“영주님이시다, 길을 터라!”

개척된 보급로에 주둔해 있던 병사들이 나를 발견하곤 서둘러 길을 텄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존중을 표했고, 이런 내 인사에 병사들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예로 답했다.

그렇게 끝에 다다라서야,

병사들의 말소리를 들은 베르융이 투구를 옆에 끼고 내 앞에 나타났다.

한껏 초췌해진 것이, 누가 봐도 그 무시무시한 테티르와 한바탕 일전을 치른 듯 보이는구나.

“영주님, 이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고삐를 고쳐 잡고 답했다.

“베르융, 행렬을 꾸려 뒤따르십시오. 발기지르에 입성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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