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73화 (173/365)

173화. 국면 (2)

발기지르의 영주,

라스 발기지르.

그는 지금 유달리 민감한 자신의 촉이 곤두세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이내 그가 신하들을 대동하고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를 이렇게 예민하게 만든 이유는 딱 하나,

출정을 알리는 가르웨의 새가 이곳으로 날아오지 않은 것.

이제 라스는 뒤따르는 신하들을 파하고, 늙은 시종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금고에 있는 재산을 성 후문에 있는 열두 대의 마차에 나눠 실어라.”

“영주님, 대체…?”

그의 말에 늙은 시종이 화들짝 놀라 묻자, 특유의 뱀눈을 더욱 날카롭게 뜬 라스가 이죽거렸다.

“아무래도 갇혀 있던 사자 새끼가 밖으로 뛰쳐나온 것 같군.”

“테티르 론바즈 경이 반란을 일으켰단 말입니까?”

“전투를 코앞에 둔 시점인데도 가르웨의 전서구가 한 통도 날아오지 않았어. 그건 무엇을 의미할까?”

라스는 걸음을 멈추고 뒤따르던 늙은 시종에게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첫째, 켄타나가 약속을 어기고 새벽 기습을 감행해 우리 군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둘째, 테티르를 필두로 전선에 나가 있던 선봉군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전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본성에서 사수한다면 아주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라스는 혀를 차며 시종을 구박했다.

“테티르의 선봉군이 패배했다면 발기지르엔 가망이 없다. 성안에서 모두 비루하게 말라 죽겠지.”

그러나 시종은 굴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싸워야…!”

“싸운다? 왜 그런 무의미한 짓을 해야 하는 거지? 테티르가 없으면 이곳은 바람 앞의 등불만도 못해! 그리고 만약 앞서 말한 이유가 후자라면?”

“왜 테티르 경이 반란을 도모하겠습니까?!”

“너는 내 옆에 그렇게 오래 붙어 있었으면서 그런 것 하나 알지 못하는 것이냐?!”

침 튀기며 손가락으로 힐난을 이어가던 라스는 결국 시종의 멱살을 잡고 찬찬히 짓누르듯 설명했다.

“테티르 그놈은 과거의 망령이야. 그가 충성으로 이 깃발 아래 있는 것 같아? 아니, 티히트라 건으로 발목 잡았을 때부터 나는 놈의 싹수가 노란 것을 알고 있었어.”

“기… 기사지 않습니까, 전설로 불리던….”

“전설?! 그래서 전설 중의 전설이었던 맥레인 베나즈는 지금 이 땅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지? 말했잖아, 놈들은 과거의 망령이야. 빌어먹을 이상에 굶주려있는 아귀 새끼들이라고!”

“영주님, 그러나 이곳엔 영주님의 깃발 아래 모여 사는 자유민들이 있습니다…!”

시종의 말에 라스는,

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지의 주인이고, 장원의 주인이고 그들이 가장 고대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아? 바로 수확 철이야.”

그 말에 시종은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수확 철이다.”

시종은 갈라진 입술을 한껏 오므린 채 달달 떨었다.

“그러니 얼른 내려가서 즉시 이곳을 빠져나갈 준비를 마쳐놓도록 해.”

“명 받들겠습니다.”

시종은 라스에게 달아나다시피 달려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라스는 삐뚤어진 인장을 고쳐 끼고는 다시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 * *

차라리 내게 있어선 후자의 상황이 더 좋다.

내 피신은 반란 때문이었단 명분이 생기는 것이고, 동시에 종교 기업인 빌렌의 힘을 빌려 테티르를 규탄할 발언가들을 얻을 수 있는 구실이 되어줄 테니까.

그럼 그놈의 명예를 수호한답시고 각지의 괴물 같은 기사들이 토벌대를 꾸려 테티르를 끝장내겠지.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 온전한 발기지르를 손에 쥐게 될 것이다.

물론 테티르의 힘을 이용해 켄타나를 접수하지 못한 것은 아쉽게 됐지만 말이야.

후에 발기지르를 되찾는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켄타나와 친교를 유지해야겠어.

만에 하나,

테티르와 가르웨의 선봉군이 정말 켄타나에게 패배했다면…,

그래 이 피신은 자연스레 망명이 된다.

나는 종교 기업인 빌렌에 위탁한 몸이 되어 신실한 종교인이 되면 될 뿐이야.

그 안에서 수확한 것들을 이용해 발언가를 끌어들이면, 언제든지 내 영지 일부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어.

어떤 상황으로 가든 나는 안전하다.

자유민들은 하나같이 옆눈 가리개를 쓴 짐말 같아서,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나아가려 하거든.

테티르가 온다면 발기지르의 자유민들은 정당치 못한 그에게 원망을 던지며 어쩔 수 없이 피신한 나를 두둔해줄 것이고,

켄타나가 온다면 자유민들의 안전을 위해 종교에 귀의해 신실함을 펼치는 내 모습을 보며 오히려 감동할 것이다.

원래,

수확 철이 끝나면 밭에 불을 지르잖아?

지금이 딱 그런 시기인 거야.

수확을 마치고 발기지르에 기어들어 올 벌레들을 솎아내는 것이지.

가문의 보석함을 옆에 끼고 내성 외곽, 은밀한 문을 열고 후문으로 나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경비병들과 시종들이 나를 반겼다.

그들 중 내 진의를 알고 있는 자는, 나를 가장 오랫동안 모시고 있던 늙은이뿐.

이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눈물을 흘리며 읍소했다.

“미안하오, 모두 내가 부족한 탓이오.”

신하들은 내 모습을 보며 분함에 이를 갈았다.

물론 그들은 자신이 곱씹고 있는 증오의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지.

테티르건 켄타나건, 둘 중 하나는 발기지르를 접수하러 오는 것이니까.

“반드시,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신하 중 하나가 굳센 목소리로 나를 응원했다.

그 응원에 나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시종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기 급급하군.

아아,

중간에 적절한 시기를 봐서 놈은 정돈해야겠어.

“자, 서둘러 가지. 곧 발기지르의 자유민들이 억압에 신음할 텐데 한시라도 빨리 발판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

내 지시에 따라, 그들은 모두 각각의 마차에 올라타 대대적인 이동을 준비했다.

나는 그런 그들의 맨 앞에서 경비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유유히 고삐를 당겨 발기지르를 빠져나갔다.

* * *

발기지르의 굳게 닫힌 성벽,

그 위에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 하나가 멀리 나부끼는 깃발을 보곤 모든 초병이 들리도록 소리쳤다.

“선봉군이 복귀했다!”

그의 외침에 몇몇이 반색했지만,

이내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지금쯤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있어야 할 본대가 왜 눈앞에 나타난 것인가?

초병들은 발기지르의 정식 정규군이 아닌, 발기지르의 휘하 깃발에서 차출된 사병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이 섬기는 깃발 주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채 곧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선봉군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다!”

“경비 태세를 강화하라!”

“충돌에 대비해라! 격자를 준비하고 빗장을 못질하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그들 앞에,

이내 선봉군이 당도하고, 한 남자가 당당히 나선다.

초병들은 그런 그 남자를 보곤,

말 그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얼어 붙어버렸다.

테티르 론바즈.

그가 한껏 마모되고 부서진 메이스를 번쩍 들어 올리며 입을 연다.

“문을 열어라.”

담담하게 경고하듯 내지른 그의 말에,

초병들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우린 모두 전우다, 서로 피 흘릴 이유는 없으니 어서 문을 열어라. 그저 나눌 이야기가 있어 말머리를 돌린 것뿐이야.”

테티르는,

그 말을 마치곤 메이스를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기사가,

휘두를 재해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이 장면에 초병들은 아연실색하여 백지장 같은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그런 그들 가운데,

급하게 보고를 듣고 달려온 수문장이 성벽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테티르 경, 멜리즈 가문의 기사 가르렝 멜리즈입니다.”

“가르렝, 문을 열어다오.”

“그럴 순 없습니다. 테티르 경과 제 상황이 반대였다면 순순히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자네가 내 상황이 된다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알게 되겠지.”

“피차 상호 간에 헤아릴 수 없는 생각들이 있는 것 같으니 이 모든 게 다 의미 없는 말입니다. 테티르 경, 왜 회군을 하신 겁니까.”

테티르는 무기를 내팽개쳤음에도 특유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며 즉답했다.

“뱀 머리를 치러 왔다.”

“테티르 경, 진정하십시오.”

가르렝 멜리즈,

그는 마치 심장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냉정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테티르를 상대했다.

그의 모습에 테티르는 살짝,

애를 태워야만 했다.

그만큼 가르렝은 만만치 않은 기사였으니까.

거기에 일단 충돌이 빚어지게 된다면 테티르 측에선 곧바로 공성전이 강요되는 것이고,

반대로 가르렝은 수성전에 돌입하게 된다.

그리고 가르렝이 가지고 있는 인챈트는 수성전에 특화되어 있어 상대하기가 심히 까다롭다.

무엇보다 테티르에게 있어선 충돌은 무조건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공성을 통해 진입한다면 이곳 자유민의 민심이 곤두박질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후에 입성할 베나즈 가문에 극심한 반발심을 갖게 될 것이다.

“가르렝, 우린 한낱 장원을 관리하는 농부가 아니네.”

“테티르 경, 그런데 왜 티히트라와의 규합에 발 벗고 반대하셨습니까? 영토를 확장하고 군림의 세를 불리려는 계획을 왜 막으셨습니까? 그 대가로 켄타나와의 전투에 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냉담한 표정으로 아주 고드름을 쏟아내는구나.

테티르는 씁쓸한 속을 달래며 그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모두 내 욕심 때문이었다.”

“욕심?”

“잃어버린 이상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였지.”

열린 투구 속, 가르렝의 감색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베나즈 가문의 영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곳은 오래전부터 숨죽은 땅이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억압할 생각을 하고 있었네, 그만큼 내 복수심은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거든.”

“그래서 이젠 아예 대대적으로 영토 위에 군림하여 서쪽 땅을 침공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아니.”

“하면?”

“나는 보았다, 빌비온 서쪽에서 베나즈의 깃발이 일어선 것을.”

가르렝의 푸른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베나즈의 깃발이…, 일어섰단 말입니까? 아직 이 세상에 그 이름을 가진 자가 남아 있었다니….”

“나도 놀랐지, 그래서 그 싹을 자르기 위해 빌비온 서쪽으로 진격을 감행했다네.”

“하여, 그 베나즈와 만났는지요?”

“만났지.”

“복수의 매듭을 짓고 오신 겁니까.”

“아니.”

테티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그는 0이었네.”

그 말에 초병들의 눈이 마치 동화를 듣는 아이의 눈처럼 반짝거렸다.

이 시대, 작금의 아이베리아 중원에서 0이란 것은 마치 환상 속 이야기 같은 것이었으니까.

“0… 이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그래.”

가르렝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분노를 토했다.

“소실됐다 알려진 0이 어찌 찬탈자의 손에 있단 말입니까?!”

“가르렝, 그것이 나도 궁금하네. 그리고 그 궁금증에 돌연 이런 생각이 들더군.”

테티르는 입술을 적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진정, 베나즈는 찬탈자일까?”

“테티르 경, 말조심하십시오.”

“지금껏 우리는 다그치기만 하며 오해와 불신을 쏟아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더는 못 들어주겠군요.”

“이제는, 베나즈가 내뱉는 한마디를 들어줄 때가 아닐까?”

“테티르!”

“가르렝, 그대가 진정 기사라면 궁금하지 않는가! 기사의 이상을 따르던 최고의 기사가 남긴 것이 무엇인지! 적어도 기사라면 말이야!”

테티르의 윽박에 가르렝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들으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베나즈의 한마디를 듣기 위해 다른 이들의 오해와 불신을 감당해볼 생각이야. 그래야만 그들의 한마디를 부끄럼 없이 들을 수 있지 않겠어?”

“만약 그 모든 게 베나즈가 저지른 찬탈의 매듭이었다면요.”

“만약 이 모든 게 이상이었던 기사왕의 의지로 비롯된 것이었다면?”

가르렝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테티르는 그의 그런 행동을 보고 그가 침착을 잃었다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다.

“가르렝, 어찌하겠는가?”

몇 초,

그 사이에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모든 것들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던 가르렝은.

조용히 투구를 내렸다.

이에 테티르는 속으로 낙담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성문을 열어라.”

가르렝은 조용히 초병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등을 돌렸다.

* * *

“영주님.”

베르융이 전방과 나를 번갈아 보며 놀란 목소리로 부른다.

이에 나는,

“갑시다, 베르융.”

그에게 짧게 말하곤 고삐를 놀려,

활짝 열린 성문을 지나쳐 발기지르의 성채로 진입했다.

봄바람이 늘어 붙은 초여름, 막 해가 일어나는 아침.

발기지르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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