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국면 (3)
성곽을 지나면 오르막을 낀 도시의 초입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도시는 곳곳에서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다발로 쏟아내었다.
낯선 기류에 겁을 느낀 갓난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군데군데 들려오고, 그 아이의 울음을 달래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뒤따른다.
그렇게 연속된 긴장감 속에 다다른 오르막 끝, 장대하게 솟은 성관 앞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테티르가 마중 나왔다.
“제가 도착했을 땐 발기지르의 영주는 이미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보고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말에서 내렸다.
확실히, 리케니엔의 저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구나.
성관은 성관이다 이 말이로군.
“드시지요.”
이어 테티르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내부 바닥은 그 표면이 거울처럼 윤택한 대리석이어서 갑옷으로 무장한 상태로 걷기엔 심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리석 바닥에 발을 딛기 무섭게 발등을 덮고 있던 사바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흠집을 내었다.
이런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테티르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자아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기사들의 땅 위에 기사로서 밟지 못했던 바닥이 결국 기사의 발자취로 채워지는구나.”
이내 테티르의 안내를 받아 곧장 향한 곳은,
알현실.
그곳엔 발기지르 측 기사로 보이는 인물 두 명과 그 휘하의 장정들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으며 일제히 내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에 나는,
그들에게 기사로서 예를 갖춘 뒤 투구를 벗어 옆에 낀 채 정면에 보이는 옥좌로 향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그들에게 아주 명확히 상기시키기 위해서.
끝내 도착한 옥좌 앞, 한낱 의자에 불과하지만 참으로 낯선 물건처럼 느껴지는 그 위에.
자세를 가다듬고 앉은 나는 나를 바라보는 기사들을 태연히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묘하구나.
곧 이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뒤쪽의 베르융이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발기지르의 기사들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먼저 예를 보이셨다, 기사로서 그에 상응하는 예를 보여라. 발기지르의 기사들이여.”
그 말에 발기지르의 두 기사 중 하나가 내 앞에 걸어 나와 한쪽 무릎을 꿇는다.
“멜리즈 가문의 기사, 가르렝이라고 합니다.”
그의 선행에 뒤따라 나머지 기사도 가르렝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조스 가문의 기사, 요함버크라고 합니다.”
사슬에 플레이트를 덧댄, 평범한 갑옷으로 무장한 가르렝과는 달리 요함버크라는 기사는 무장한 갑옷의 통이 매우 커 보였다.
외양만 놓고 봤을 땐 마치 가는 목에 뭉툭한 허리를 가진 유리병처럼 생겼어.
퍼뜩 느낀 감상을 제쳐두고 나는 최대한 당당한 목소리로 그들 소개에 화답했다.
“리케니엔의 영주, 디안 베나즈입니다.”
위아래 구분된 질서가 있다지만, 그 질서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이상 같은 기사로서 그들에게 예를 다할 생각이야.
그편이 낯선 그들을 내 편으로 만들기 더 편할 테니까.
두 기사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눈에 담기 바빴다.
자 그럼,
테티르 론바즈가 쌓아 올린 기반 위로 틀을 세워 볼까.
“내 이곳에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건, 그대들이 깃발을 잃고 수세에 몰려있음을 알고 돕기 위해서입니다.”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 치밀함과 천연덕스러움은 아주 궁합이 좋다.
물론 이러한 궁합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지금 같은 경우는,
테티르 론바즈라는 존재 자체가 치밀함으로 작용했고, 그 작용에 운이 좋게도 발기지르의 가장 높은 깃발이 스스로 물러섰기에.
그 명분으로 유감없이 상황을 주무를 수 있게 됐다.
물론 발기지르의 깃발이 이대로 물러서고 끝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들의 물러섬은 말 그대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일 테니까.
그러니 저들이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때까지, 나는 이곳을 베나즈의 이름으로 저들과 빈틈없는 유대의 벽을 쌓아야만 한다.
“송구하지만, 이 일련의 사태는 모두 리케니엔의 영주님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가르렝이 고개를 치켜들며 반문을 제시하자,
“그래서 제가 이곳에 온 것입니다.”
나는 태연히 미소지으며 그것을 되받아쳤다.
그러자 가르렝은 턱이 갈라지도록 이를 씹으며 말을 내뱉는다.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슬쩍, 베르융을 살피니 그의 어깨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동시에 시선을 돌리면,
테티르는 마치 나를 재보려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턱을 긁적이며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다시 가르렝에게 집중하였다.
“동감합니다, 참으로 뻔뻔하군요.”
내 말에 가르렝이 고개를 들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에 나는 역으로 그를 향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섬기던 그 영주라는 자가 말입니다.”
가르렝은,
할 말을 잃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당신과 같이 기사의 본분을 잊지 않은 자들이 이곳에 남아 있어서.”
명예는 잊지 않고 챙겨드릴게.
난 당신과 척을 지러 온 것이 아니니까.
당신은 기사로서 존중받아 마땅하잖아?
이내 아까부터 숨죽이고 있던 요함버크가 어깨를 씰룩이기 시작했다.
왜 그런가 하고 보니,
그는 후덕하고 강인한 인상과는 달리 정말 최선을 다해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무래도 논파 당하는 가르렝의 모습을 보아서 그러는 것 같은데.
“요함버크, 상황 직시가 되지 않는가? 너의 그 일그러지는 안면 근육들을 다 뜯어내 줄까!”
참다못한 가르렝이 표독을 씹으며 요함버크를 다그치자,
그는 웃음을 겨우 삼키며 대답했다.
“이보게 가르렝, 우리를 보게. 우리보다 비참한 놈이 과연 어디 있을까? 우리의 맹세는 어디로 갔지? 일방적으로 부정당해 저 바닥 어딘가에 널브러져 있겠군.”
“요함버크!”
“자존심 좋지 그래, 기사로서의 본분도 좋다 이거야. 그런데 까놓고 말해서 우린 발기지르의 영주보다 바로 옆에 있는 테티르 경께 더욱 충성했었지.”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야?”
“아직도 모르겠나. 결국엔 우리에게 남은 본분은 이 성벽 안에 있는 자유민들을 지키는 것이야. 그게 우리 본분이라고.”
요함버크는 어느새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가르렝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자네의 충격이 얼마나 클지 잘 알아, 발기지르의 영주를 지키기 위해 테티르 경에 맞서 수문장 노릇을 했지만. 정작 자네의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영주는 이곳을 떠났으니까.”
이 말에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테티르가 슬쩍 기어들었다.
“그러는 요함버크, 자네도 소집령을 듣고 서둘러 발기지르로 달려왔지만 보게 된 것은 빈 성관 뿐이잖나.”
“정확히는 빈 성관 앞에서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가르렝을 보았지요. 제가 불쌍해질 겨를이 없었다 이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다 내 부덕 때문이다.”
테티르의 자책에 가르렝과 요함버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부정의 눈빛을 담았다.
이는,
그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슬쩍, 뒤편에 서 있던 베르융을 바라보니.
그는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세 기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살짝, 입꼬리가 올라갈 찰나.
내 시선을 느끼곤 서둘러 근엄한 표정을 굳혔다.
새삼.
맥레인 당신이 떠오르는군요.
우리의 관계는 저 기사들처럼 한없이 벌어지는 것 같다가도 이내 알 수 없는 유대로 더욱 끈끈해지곤 했으니까요.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유대가 무엇이었는지를.
당신은 처음부터 무법자가 아닌, 기사로서 내게 다가왔었던 거였네요.
가슴 한쪽에 뭉글한 감정을 느낀 나는 이제 눈앞 기사들의 실랑이를 헛기침으로 파한 뒤 담담하게 말했다.
“맹세는 서로의 결심으로만 빛나는 것입니다.”
가르렝과 요함버크는.
서로 시선을 한 번 주고받다가 이내 부끄러운 듯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내 이름의 명예를 걸고 당신들의 맹세를 빛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옥좌에서 일어나,
그들 앞에 멈춰선 나는.
“비록 쏟아질지언정 그마저도 가장 찬란히 빛날 수 있도록.”
종래엔 부탁하듯 낯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둘은 가슴에 손을 얹고 같은 낮은 목소리로 단언했다.
“기사 가르렝, 멜리즈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기사 요함버크, 비조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 * *
발기지르의 성관 지붕,
그 위에 걸려 있던 깃발이 천천히 곤두박질쳤다.
이내 리케니엔의 정규군 둘이 떨어진 깃발을 거두고 새로운 깃발을 조심스레 꺼내어 깃대에 걸어 올렸다.
그렇게 깃발이 가장 높은 곳에 걸릴 때쯤,
외곽 순찰을 마친 기사 가르웨가 황급히 성내로 복귀했다.
날랜 솜씨로 고삐를 놀리며 오르막을 치달아 오른 그는 곧바로 성관 내로 진입하려 했으나.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본디 발기지르의 성관은 갑옷을 입고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곧 성관 바닥에 가득한 흠집을 보곤 담담히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에는 막,
발기지르의 기사와 그 기수, 그리고 종자들이 어우러져 한 남자에게 열띤 보고를 이어가고 있었다.
“성관 내 창고는 빈 상태입니다.”
“빌렌, 꽉 쥔 주먹 조합, 백금회 및 발기지르에 파견되었던 기업가와 발언가들이 공석임을 확인했습니다.”
“성관 후문을 통해 추적한 결과, 시종장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가 되었건 발기지르의 실소유주라는 걸 들먹이며 기업들을 위시한 기사단을 대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언제까지고 땅 주인의 이름을 딴 지명으로 부를 순 없습니다. 원 땅의 이름인 ‘발리르’로 명명부터 하시어 자유민들에게 발기지르에 대한 부정인식을 심으십시오.”
보고의 내용을 들어보니,
가르웨가 느끼기에 지시한 것들이 모두 핵심을 찌르는 것들뿐이었다.
“멜리즈 가문의 사병이 총 80, 비조스 가문이 120, 발기지르…, 아니 ‘발리르’ 내 징병 가능한 병사의 수가 550으로 총 750입니다.”
“여기에 테티르 경이 이끄는 정예 200이 더해지면 950이로군.”
이어지는 군사적 자문들 속에,
가르웨는 자연스럽게 그 끝에 미끄러지듯 합류했다.
“제 휘하 정찰 부대인 매 부대와 본대 병력까지 합치면 ‘발리르’의 총군은 1300에 달합니다.”
“아, 가르웨 왔는가!”
가르웨의 목소리에 테티르가 가장 먼저 반겼다.
그러나 가르웨의 눈 속에서 심상치 않음을 확인한 테티르는, 그 장대한 몸을 획 돌려 얼른 길을 터주어야 했다.
그렇게 가르웨가 긴 탁상 끝에 앉아 있는 이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자,
“오셨습니까, 가르웨.”
익숙하지 않은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이게 무슨 온도 차란 말인가.
라스 발기지르와 비교하면 그의 목소리는 5월의 따스함에 가깝구나.
내심 감탄하던 가르웨는 침착하게 보고를 시작했다.
“켄타나의 선봉군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군사적 움직임의 목적은 새벽에 성사되지 못한 결투에 대한 항의를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가르웨 바로 새를 보내 동쪽에 주둔하고 있는 리케니엔의 군을 이곳으로 이동시켜주십시오.”
“어찌…?”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으니까요.”
* * *
켄타나의 선봉 기사,
가버트 로셀란이 기병 40과 함께 막 발기지르의 앞마당인 평원 앞에 도착했다.
“가버트 경, 내기 어떠십니까?”
이윽고 종자 하나가 가버트에게 내기를 제안하자, 그는 투구 속 울림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내기?”
“이 자리에 누가 나올지 내기를 하고 있습니다.”
“배당은 어떻게 되지?”
“테티르 경에 8할이 몰렸고, 가르웨 경에 2할이 몰렸습니다.”
종자의 말에 가버트는 식은 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영주인 라스 발기지르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아이베리아에서 결전의 약속은 신성한 것.
그것을 어긴 대가는 씻을 수 없는 오명뿐이리라.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을 증명한다면 넓은 아량을 베풀어 서로를 헤아리는 것도 기사의 덕목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경우엔,
사정을 설명하는 자가 그들의 가장 높은 깃발이어야만 한다.
“가버트 경, 저들이 옵니다.”
종자의 말을 듣고 잠겨 있던 생각에서 벗어난 가버트는, 그 자리에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그의 뒤에 있던 종자들도,
당황을 곱씹는다.
“저게… 대체…?”
“뭐… 뭐야?”
검은 깃발이 휘날린다.
이는 발기지르의 깃발이 아니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뭐냐 저 군세는?
발기지르의 군세보다 더한 병력이 엄청난 위세로 대열을 갖춰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 수가 어림잡아,
근 2천.
이윽고, 군세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서니.
그 기사는 걸친 갑옷도, 흐르는 기품도 모두 아이베리아에선 처음 보는 것이었다.
먹색 투구 속 가려진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그것이 너무나 궁금한 가버트였지만 차마 먼저 운을 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전군을 이끌고 나온 그들의 기세에 짓눌려있었으니까.
이제, 군세의 우두머리가 담담한 말투로 가버트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었다.
“미안하오, 보다시피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소.”
상당히 젊은 목소리에 가버트는 더욱 당황하여 대답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다시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져온 그 기사는 당당히 말했다.
“시일과 장소는 그쪽이 정하시오. 이번엔 약속이 어그러지는 일이 없을 테니. 그럼 기다리고 있겠소.”
자기 할 말만을 마친 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머리를 돌려 군세를 되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