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75화 (175/365)

175화. 국면 (4)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병사들을 고취시켰다.

그들의 얼굴엔 아직도 흥분으로 달아오른 상기가 묻어 있었고, 두 눈엔 어색하고 낯선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가르웨는 그런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벅차오르는 가슴을 움켜쥐어야 했다.

아직도 그의 눈에 선하다.

켄타나에 맞서 전군을 내세워 당당하고 태연하게 그들을 상대했던 베나즈의 모습이.

그것은,

기사는 물론이고 그 휘하 병사들의 마음속, 말라가던 장작에 불을 지핀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었으리라.

발기지르, 아니 이제 원 땅의 이름인 발리르로 명명된 내성에 복귀한 병사들은.

어느새 리케니엔의 정규군과 융화되어 스스럼없이 서로 안부를 나누고 있었다.

정규군이든, 깃발 휘하의 병사들이든.

결국엔 누구의 자식이며 부모일 그들이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자가 나를 지켜줄 동료라는 것을.

디안 베나즈,

발리르에서 보인 그의 첫 행보는 정말 파격 그 자체였다.

단 한 번의 전군 전개로,

내부 결속을 주문함과 동시에 켄타나에겐 묵직한 압박을 주면서 어긴 약속에 대해 뻔뻔히도 시치미까지 떼었으니까.

물론 전군 전개를 가능하게 만든 기저엔 테티르의 존재가 깔려있었지만,

그 테티르를 시발점으로 써먹은 디안 베나즈가 가르웨에겐 더 대단해 보일 뿐이었다.

“가르웨, 뭐 하고 있는가?”

만감을 교차시키던 가르웨는 테티르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티르 경.”

“성관으로 가세, 할 일이 많아.”

그래, 감탄을 곱씹을 때가 아니다.

가르웨는 얼른 테티르의 뒤를 따라 성관으로 향해야 했다.

* * *

가르렝, 요함버크.

그 뒤로 테티르와 가르웨가 속속들이 자리에 합석했다.

그들의 눈빛은,

날 보는 기사들의 눈빛은 전과는 많이 달라졌었다.

비록 그것이 달빛에서 햇빛과 같은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지만.

“영주님, 모두 모였으니 시작하시지요.”

내 오른편에 앉아 있던 베르융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베르융의 말에 내 왼편에 앉아 있던 조이가 신중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문서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겐 참으로 벅찬 보좌다.

이보다 힘이 되는 광경이 더 있을까.

“지금부터는 과거에 대해 떠들 시간이 없을 겁니다, 이후에 대해 논할 시간조차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내 말에 기사들 모두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가르웨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애석하게도 전 발기지르의 행정권은 기업인 빌렌이 쥐고 있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지금 발리르엔 행정력이 증발한 상태이지요.”

이에 조이가 낡은 서류를 넘기며 내게 말했다.

“리케니엔은 이곳에 행정력을 나눌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리케니엔의 물자를 이곳에 쏟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장 정규군을 이곳에 주둔시키는 것만으로도 리케니엔에겐 아주 큰 부담이었으니까.

하면,

“가르렝 경, 발리르의 임시 행정을 맡아주십시오. 행정 유지에 쓰이는 비용은 이곳 자유민들에게 기부금을 받아 충당하도록 합시다.”

가르렝이 즉시 반문했다.

“어떤 명분으로 그들에게 기부를 받는단 말입니까?”

“세금 감면 혜택을 준다면, 부유층의 지갑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제 깃발만으론 발리르의 행정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있을 수에 밝은 소상인들과 이치가 넓은 지식인들을 차출해 배치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다가 계층이 고착되기라도 한다면요?”

“가르렝,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당신이 임시 행정 전반에 배치되는 겁니다. 발리르는 발기지르와 달리 기사들의 입지를 좁히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가르렝은 그 말에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수긍한 듯 고개 숙였다.

“바뀜에 수긍하지 못하면 도태되기 마련이니, 명을 무겁게 받들되 그것을 달게 소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에 걸맞게 그 자질이 다분한 인물인 것 같네,

가르렝은.

“다음은 가르웨, 휘하에 전문적인 정찰 부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 말에 가르웨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들을 불러들여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또한 경이 운용하고 있는 새들도 잠시 거둬들여 만전에 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새를 운용한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할리의 보고로 그 존재를 알았고,

테티르에게 확정을 얻었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가르웨는 이런 내 대답에, 어렴풋이 알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테티르를 흘겼다.

이제 나는,

모두를 아우르듯 적절한 호소를 묻힌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경들에게 전합니다, 테티르의 예고에 발리르는 ‘우리’로서 유감없는 화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니 만반을 다 하십시오. ‘우리’가 될 준비를 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은,

나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빛을 막 달빛에서 새벽녘으로 만들어 주었다.

* * *

켄타나의 영주,

라비자 빌로헤르.

그의 주름진 광대가 파르르 떨린다.

그런 그의 앞엔 켄타나의 기사 가버트 로셀란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라스 발기지르가 실각했다 이 말인가?”

잔뜩 가래가 낀 목소리로 묻는 라비자에게,

“그렇습니다.”

가버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에 의회에 모인 자들이 격한 목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빌비온에 발기지르를 무너트릴 만한 세력이 있었는가?!”

“설마 서쪽에서 니플리엔의 원정군이라도 온 건 아니겠지?”

그러나 곧,

“조용!”

누군가가 벼락같은 목소리로 의회의 소음을 일축 시켰다.

이어 내려앉은 침묵 위로, 중년의 우람한 남성이 어울리지 않는 나긋한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새로운 깃발이 발기지르를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피해는 보이지 않았으며 군은 이미 통합한 상태. 그 수는 근 2천에 가깝다?”

모두가 그의 목소리를 집중해서 듣는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대중의 이목을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이제 그가 다시 나긋함을 벗어던지고 엄청난 박력으로 의회 모두에게 일갈했다.

“그래서 바뀐 것이 무엇인가!”

가버트는 그의 목소리에 소름 한 방울을 등줄기 너머로 흘려보내야만 했다.

“우리의 상대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마주한 우리가 질겁과 두려움에 변해버린다면 이는 그들이 가장 원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굵은 손목 조합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는 발언가이자,

켄타나의 1기사.

엘르길 마스.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의회를 일깨우자,

이내 그들 모두의 눈에 독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독기에, 충성에 화답하듯.

영주 라비자가 쭈글쭈글한 팔을 들어 그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사흘 뒤, 빌비오나스. 거기서 그들은 변하지 않는 우리와 맞서게 될 것이다.”

장소와 시간을 선고하는 이점을 가졌음에도,

그 이점을 보란 듯이 부정하며 정정당당한 결투를 암시하는 그의 말에.

켄타나의 의회는 마치 불같은 열기로 뒤덮였다.

* * *

달이 별과 인사하고, 해가 산 밖을 나서기를 몇 번이 지났을까.

벌써 사흘이란 시간이 지났는가.

새들이 지저귀고, 숲 깊이 박힌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파도처럼 평지로 밀려온다.

그러나 그 평온한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묵직한 진동에 멎어가기 시작했다.

새로 갈아 끼운 편자가 큰 북처럼 땅을 두들기면,

갬비슨으로 무장한 장정들의 발소리가 작은 북처럼 땅을 뒤따라 두들긴다.

그 수가 몇인가.

그 수가 이어 만든 행렬의 길이는 또 몇인가.

기세에 짓눌려 셀 길이 없다.

곧 평지에 그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자, 약속한 듯 그 머리 위로 적지 않은 새떼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깃발들은 솟아올랐고,

이내 어디서 시작된 지 모를 바람이 그것들을 휘날렸다.

그렇게 막 평원 초입에 도달한 군세는,

좌우로 넓게 진형을 움직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그 군 맞은편으로 새로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진동.

마찬가지로 평원 저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깃발들과 그 아래 군사들이 전열을 가다듬는다.

전투가 임박했다.

기사들을 위시한, 정정당당하고도 투박하고 무식한.

그런 전투가.

* * *

엘르길 마스,

그가 말머리를 돌려 너머로 보이는 군세를 흘겨보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아멧 헬름을 머리에 썼다.

그가 입은 플레이트 메일 곳곳엔,

금색으로 세공된 나뭇가지 문양이 유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제 그는 맞은편 군세를 가늠하곤 뒤돌아 자신의 뒤에 바짝 도열한 군사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곧이어 손을 번쩍 들어 깃발이 솟은 곳들을 지목하며 지시를 이어갔다.

“가버트, 좌측으로 돌아 적 허리를 기만하라. 엘멘! 우측 군을 맡아, 딘저스! 좌측 기수와 함께 중앙 기수를 따라 진출하라.”

솜씨 좋게 말을 이리저리 몰며 일사불란하게 내려지는 지시에, 기사들이 다 같이 나와 병사들의 집중을 하나로 묶었다.

이윽고.

엘르길의 손에 들린 할버드가 번쩍 들어 올려지자.

일대에 기묘하리만큼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리고 그 침묵 위로,

한 줄기 벼락이 떨어지니.

“들어라, 켄타나의 전사들아!”

엘르길의 투구 눈구멍 속에서 안광이 번뜩인다.

“오늘 너희는 바위를 부술 파도가 되어 새로운 해안선을 긋게 될 것이다!”

켄타나의 병사들은,

투구 속 반쯤 드러난 얼굴에서 투지라는 꽃을 피운다.

“멈추지 마라! 쳐라! 그들의 머리를 덮어라! 오늘 우리는 우리로서 빌비온을 채울 것이다 ─ !!”

아,

이제 막.

만개했다.

그들의 투지가.

─────── !

줄 벼락이 치듯, 병사들의 함성에 빌비오나스가 울리고.

듣는 것만으로도 단전을 휘청이게 만드는 묵직한 뿔피리가 개선을 알리듯 겹겹이 울려 퍼진다.

그것을 시작으로.

엘르길이 함성을 내지르며 고삐를 내리치자 그 뒤를 꼬나문 병사들이 쐐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 * *

저 멀리 어떤 이름 모를 병사의 떨림이 눈에 띄었다.

덩달아 내 심장도 크게 요동쳤다.

그러나 나는 마른 침과 함께 침착을 삼키며 말머리를 돌렸다.

“베르융, 우측으로 나아가 적들을 맞이하십시오.”

가르웨를 통해 적들의 진출로를 파악한 내 지시에, 베르융이 군사를 이끌고 옆쪽으로 빠졌다.

이제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들의 피를 뜨겁게 만들어 줄 격려만이 남았을 뿐.

“후우…,”

투구 속에서 누구도 들리지 않게 짧은 숨을 들이마시고 있자니, 문득 조이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디안, 각자가 아닌 우리를 위해 싸우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지금 베나즈로서 이 자리에 있다.”

예전,

시몬 바스티유에서나 들었던 조이의 다정한 말투.

이에 나도 모르게 식은 웃음이 투구 밖으로 세어 나왔다.

조이는 곧이어.

“그러니 베나즈여, 두려워하지 말게. 우리가 있으니.”

내게 용기를 주었다.

나는 긴장을 털고,

고삐를 잡아,

말머리를 돌려.

저 맞은편 뿔피리 소리를 등진 채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오늘!”

메아리치며 나아가는 내 목소리에 일대로 번지는 침묵.

그 위에 오직 나만이 말로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니.

유감없이 휘갈겨주마.

“너희들은 태풍으로서 휘몰아칠 것이다!”

낡은 아밍소드를 뽑아 위로 찌르듯 치켜들고서, 벅차오르는 가슴을 내뱉듯.

“나의 벼락들이여, 나의 바람들이여! 내 눈앞에 증명하라! 이 땅에 태풍이 다시 돌아왔음을 ─ !”

소리치자.

──────── !

그들은 유감없이.

빌비오나스를 울렸다.

이윽고 나는 말머리를 돌려, 쏟아지는 군세를 향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등 뒤로 들려오는 무수한 발 구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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