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76화 (176/365)

176화. 쇠 그리고 피

양측의 군이 서로 맞물린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묵직한 타격음과 짧은 단말마.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이어가는 투쟁의 소음.

망치와 도끼,

검과 창,

뼈와 관절.

마지막으로 신랄한 욕지거리까지.

말 그대로 혼돈의 도가니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는 현장.

그 한 가운데,

내가 있다.

벤투스는 그 종자가 군마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내 손짓에 화답하듯 마주 오던 병사 다섯을 지르밟고 나아갔다.

직후 켄타나의 병사들이 저지선을 구축했지만, 벤투스는 짧은 숨을 몰아쉬며 특유의 발재간으로 그들 사이를 보기 좋게 가로질렀다.

그런 벤투스의 발재간에 맞추어 나는 안장 위에서 연신 검을 휘둘러 누운 초승달을 여럿 그렸고,

그것에 꿰인 병사들은 피를 쏟으며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켄타나 군 일선이 생각보다 쉽게 흐트러졌다.

그렇게 여유를 느껴 시선을 돌려 일대를 둘러보자,

아뿔싸.

바짝 뒤쫓아 오는 줄 알았던 아군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다.

켄타나 측이 의도적으로 나를 솎아낸 것인가!

상황을 파악하고 전방을 주시하니 켄타나는 이미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 뒤였다.

그리고 그 방어선 너머,

“파도의 전조는 끌어당김이니, 이제 그 전조가 끝났다.”

병사들을 가로지르며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 나오는 한 남자.

[22년, 라에스터스]

[장벽에 대한 푸른 땅의 화답]

그 남자를 시발점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병사들이 일거에 앞으로 쏟아져 내린다.

말 그대로,

파도처럼.

이윽고 붉은 할버드를 내세우며 들이닥친 그에 맞서, 나는 검을 아래로 내려 고삐를 잡아당겨 나아갔다.

그 순간 두 귀는 집중에 멎어,

두 두 ─ !

마주 오는 그의 편자 소리와 그를 향해 치닫는 내 편자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끝내,

부딪힘이 임박한 찰나의 순간 내려 잡은 검으로 상대편 할버드의 도끼 머리를 걸어 꺾자,

카칵 ─ !

날카로운 쇠 비명과 함께 불똥 하나가 거세게 튀어 올랐다.

정말이지 우악스러운 힘이다.

도끼 머리에 걸어 넣은 검이 무색하게, 상대는 나를 그 상태째로 들어 올려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니, 정확히는 그 역시 안장에서 막 떨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실로 놀라운 실력이다.

이름이 궁금해졌어.

서로 바닥에 쏟아지기 무섭게 튀어 올라 상대를 향해 들이닥친다.

그렇게 검과 할버드 자루가 서로 부딪치니 자연히 서로의 투구를 마주 본 우리는 울림 가득한 목소리를 나누었다.

“새로운 깃발이여! 나는 마스 가문의 엘르길이다!”

“베나즈의 디안이다.”

“베나즈라,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났구나!”

그는 유려한 손짓으로 자루를 돌려 내 검을 가볍게 쳐내곤 도끼 머리를 갈퀴 삼아 나를 끌어당겼다.

그 끌어당김을 그대로 이용해 검을 내지르자, 왼손으로 자루를 미끄러지듯 내뺀 그가 어느새 도끼날로 내 공격을 쳐냈다.

비록 창술에 대한 조예는 깊지 않았으나,

토르킨 선생의 가르침 덕에 그 기초에 대한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상대가 쓰는 창술은…,

‘비전’이다.

따지자면 그가 가진 창술은 뿌리 깊은 것이었으나, 그 뿌리 깊은 창술에 자신의 인챈트를 버무려 고유한 비전으로 만들어냈다.

그게 가능한가?

아니, 가능하다.

지금 그것을 상대가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인챈트를 다루는 능력이 나보다 몇 수는 위에 있다는 소리다.

짧은 시간 상대 실력의 단편을 엿본 나는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의 할버드는 거리로 얻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람을 날카롭게 베고 들어오는 창끝, 그것을 상체의 비틀림으로 겨우 피한 나는 이어 바닥을 한 바퀴 굴러 그의 하단을 가로 베었다.

끼긱 ─ !

엘르길은,

피하지 않았다.

내 검이 강철 각반을 벨 수 없다는 걸,

이미 파악한 것이다.

“가히 절정의 요새라 불릴만한 것을 걸쳤는데, 그 안에 담긴 수성 도구는 보잘 게 없군!”

엘르길은 살짝 실망한 목소리로 윽박지르며 내 목 부분을 할버드로 내리찍었다.

뒤로 물러나면 거리는 다시 그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날렵하게 상체를 더 앞으로 쏟은 나는 그의 한쪽 다리를 안쪽으로 걸어 넘어트렸다.

이대로 관절기를 유지하며 놈의 상체를 위에서 지배하기만 한다면 내 승리다.

회심을 노려 그대로 구렁이처럼 그의 몸을 휘감아 위를 잡기 위해 상체를 든 순간.

“이런…!”

사각에서 날아든 발길질에 내 머리가 그대로 휘영청 꺾였다.

──── !

투구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강한 이명.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내 시야에 들어온 건.

막 자리에서 일어난 엘르길과 그의 휘하 병사들이었다.

“베나즈여, 애석하게도 이건 결투가 아니라 전쟁이라네.”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투였다고 해도 사슬조차 베지 못할 검을 든 자와는 겨루고 싶지 않아. 그건 정정당당하지 않으니까.”

엘르길은 병사가 데려온 말 위에 올라타며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어쨌든 자네나 나의 섞음 가운데 결투의 성격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내 기사로서 떳떳함을 가지려면 그대에게 자비를 베풀어야겠지…, 아니.”

돌연 엘르길은 피식 웃으며 내 뒤쪽을 바라보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비고 뭐고 어차피 다시 결착에 빠지게 될 거였군.”

상체를 일으켜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본 나는,

“뒤로 물러 방어선을 재구축하라!”

쩌렁쩌렁하게 명령하는 그를 뒤로한 채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막 켄타나의 일선을 모조리 밀고 들어온 테티르가 있었다.

“베나즈의 깃발을 수호하라!”

테티르의 입에서 벼락같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타워실드를 든 보병들이 내 주위를 감쌌다.

동시에 휘하 병사들이 뒤따라 나와 새로운 전선을 구축했다.

“보기 좋게 빨려 들어가 휩쓸리셨습니다.”

말에서 내린 테티르가 걱정 섞인 핀잔과 함께 손을 내민다.

이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가온 손을 맞잡았다.

“꽤 강한 파도였습니다.”

“젊은 영주님이 전쟁 머리가 이렇게 없어서야!”

테티르는 껄껄 웃으며 막 일어난 내 등을 두들겼다.

그 무지막지한 손짓 덕에 흙먼지가 전부 털렸지만,

얼이 빠질 정도로 아픈데.

이어서 뒤늦게 조이가 우리 쪽에 합류했다.

조이는 합류와 동시에 말에서 뛰어내려, 테티르와는 다른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신 겁니까?! 아무리 적들을 가늠하고 싶으시다고 해도, 여기 있는 모두가 영주님을 바라보며 싸우고 있다는 걸 자각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테티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성질을 부렸다.

“조이, 감히 영주님께 무슨 말버릇이야! 그리고 적들을 가늠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고?!”

“그래 오랜만이야, 테티르. 그 단단하고 무거운 대가리 짊어지느라 육체가 고생이 많지.”

“허, 이 수염잽이 새끼가!”

이거,

딱 산불로 번지기 쉬운 불씬데.

얼른 그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나는 되려 그들에게 핀잔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이 기사라는 걸 자각하십시오.”

테티르는 쓰고 있던 그레이트 헬름을 주먹으로 깡깡 치며 작게 잘못을 시인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조이 역시 내 시선에 결국 두 눈동자를 떨구며 허리를 숙였다.

“영주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잠시 고삐를 잃은 말이 되었습니다.”

다시 가드가 덜렁거리기 시작한 검을 집에 넣은 나는, 목구멍으로 무거운 사과 덩이를 넘기듯 피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담담히 말했다.

내 감정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생과 사가 갈린다.

전쟁이란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기에.

마찬가지로 켄타나 측 깃발 가진 이를 가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했던 내 행동들은 분명 많은 희생을 낳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결코 그 희생을,

헛되이 만들지 않을 것이다.

“켄타나 측의 깃발은 마치 파도와 같은 것을 휘둘렀습니다.”

그의 인챈트는 필시 장악형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이끄는 군의 진형이 그렇게 특이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다만 엘르길 마스.

그는 장악형 인챈트로 자신의 창술을 보강해냈다.

할버드의 밀고 당겨지는 그 힘은 두 발 걷는 자의 것이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강했어.

내 입에 집중된 두 기사의 시선을 향해 되물었다.

“두 분은 마스 가문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조이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테티르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이는 근 20년간 아이베리아를 떠나 있었고, 테티르는 빌비온 서쪽에 목매달며 살아온 위인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당장 켄타나 측 최대 복병인 기병대의 깃발조차 파악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어쨌든, 엘르길 마스는 상당한 실력자다.

20년간 주인 없이 살아온 아이베리아 중원엔 그 세월 동안 과거로선 알 길이 없는 희대의 강자들이 들어선 것이다.

문득,

맥레인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구나.

‘절대’란 건 없다고.

과거에 절대라 불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지진 못하듯이.

조이, 테티르와 같은 과거 전설들이 언제든지 빛바래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아이베리아이리라.

“그들은 의도적으로 진형을 물리고 있습니다.”

엘르길이 그랬듯, 파도의 전조를 위해서겠지.

그 이후에 쏟아질 것들은 분명 우리로선 감당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무지했을 때의 이야기.

적에 대한 가늠을 어느 정도 한 지금으로선 틀림없이 파훼할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조이, 인챈트를 위시한 방진을 구축해 전진하십시오. 테티르 경이 군을 이끌어 방진의 가림막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테티르는 곧바로 기수를 데리고 병사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영주님 말씀대로라면 물러난 거리만큼이나 후에 그들이 쏟을 기세가 아주 드셀 것입니다.”

내 말의 요점을 파악한 조이는 되묻다가도,

이내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스스로 수긍했다.

“그들의 그 기세를 이용할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이 방법이 성공으로 끝난다고 해도 그들의 기병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베르융을 옆으로 돌린 것이 아닙니까?”

조이는 자신 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영주님, 비록 글라디옴의 그늘에 있었다곤 해도 베르융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기사입니다.”

간혹,

과거의 전설이 현재까지도 빛바래지 않고 그 위용을 과시하는 때도 있다.

조이의 눈빛과 입에서 쏟아지는 것은,

바로 그것을 증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절대라는 것도 상대적인 거니까.

* * *

엘르길 마스는 군세를 가다듬어 다시 최전방에 섰다.

베나즈,

그 이름이 다시 일어설 줄은 몰랐으나.

동시에 실망감을 느낀 그는 왜인지 모를 착잡함에 입술을 씹어야만 했다.

비록 찬탈자, 배반자라는 대명사가 되었다곤 해도.

베나즈라는 이름은 아이베리아에 가장 굵직한 전설 중 하나.

그런 그 이름의 후계가 저렇게 형편없을 줄이야.

아니, 그런 형편없는 재주로 잘도 조합을 등에 업고 갑옷을 걸치고 나온 걸 보면.

두 발 걷는 자들을 꾀는 수완 하나만큼은 특출난 자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런 자들도 충분히 전설로서 남을 수 있지.

역사에 그런 인물들은 많았으니까.

다만 여기까지.

설득이 없다면 베나즈라는 이름은 이 빌비오나스의 선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선은,

“오늘 놈들은 우리에게 휩쓸려 분열될 것이다.”

엘르길 마스가 정한다.

발기지르 측 병사들은 전열을 가다듬기 무섭게 다시 이쪽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엘르길은 할버드를 번쩍 들어 올려 안에 담긴 인챈트의 힘을 풀었다.

거대한 파도, 라에스터스는 분명 바다 위에서 그 위력이 제대로 구현될 테지만.

반대로 땅 위 병사들을 통해서 그 위력을 재현해낼 수도 있다.

곧이어 켄타나 측 진형 주위로 무형의 일렁이는 파장이 발아래 깔렸다.

기류가 되었건, 어느 특정한 물리력을 가진 파장이 되었건.

그것은 곧 엘르길의 의지에 맞추어 파도의 모습으로 진형 그 자체를 강화할 것이다.

“대기!”

엘르길의 지시에 진형에 긴장이 바짝 감돌았다.

발기지르 측은 이제 바로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지만,

“대기!”

엘르길은 더욱이 낮은 목소리로 진형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내,

“쏟아져라, 켄타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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