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쇠 그리고 피 (2)
장악형 인챈트는 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매우 까다롭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진형 그 자체를 강화할 수 있는, 장악형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을 의미한다.
해서 그 전제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국력이다.
기반에 단단한 국력이 있어야 비로소 장악형 인챈트의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특정한 장악형 인챈트에 ‘감응’하는 장비를 생산할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어야 하며.
그 장비를 입고 마땅히 강화된 진형을 소화 시킬 수 있는 인재가 양성되어야만 한다.
조합과 기업의 후원이 뒷받침되는 단단한 기둥 위에,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훈련할 수 있는 깃발이 달려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래서 그렇게만 된다면,
비로소 장악형 인챈트의 진정한 힘이 발휘된다.
본래 장악형 인챈트는 그 힘의 끝점이 재림형 인챈트와 비슷한 성질을 갖고 있다.
본인 그 자체를 매질로 삼아 재해를 구현하는 재림형 인챈트나,
본인으로서 그 재해를 일대에 재현해내는 장악형 인챈트나, 넓게 보면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인 거다.
하지만,
환경에 따라 시류가 변하는 것처럼,
이곳은…,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이기에.
바로 이 땅이기에 상기에 설명한 그 힘이 절대적인 위치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군세를 재해로써 운용한다.
그것을 실천해 정복에 정복을 거듭한 과거의 깃발을 보라.
이 땅의 역사가 상기한 힘의 증거이리라.
나 엘르길 마스는 소망한다.
나와 내 장병들이 거대한 국력 위에 서 있기를.
마땅히 나와 내 장병들이 하나의 재해가 되기를.
그로 얻은 명예로 우리 사람들의 든든한 장벽이 되기를!
지금 켄타나의 국력으론,
장악형 인챈트에 감응할 병력을 원활히 양성할 수가 없다.
그나마 발언가인 내가 의회를 압박해 쥐어짠 예산으로 수십에 달하는 정예를 양성해내긴 했지만,
‘두 장악형 인챈트’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부족하다는 것일 뿐,
비록 눈앞에 보이는 승리가 극점이라 할지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나아갈 것이다.
* * *
“쏟아져라, 켄타나여!”
내 지시에 양옆, 총 열 두기의 정예병이 파이크를 앞으로 겨누었다.
그들은 내 인챈트, 라에스터스를 완벽히 감응해낼 수 있는 동료들이자.
파도다.
───── !
거나한 함성과 함께 나와 열두 정예병이 일선을 장식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 속도는,
편자로 땅을 긁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쥐어!”
마주 오는 발기지르 군세를 향해, 나는 양옆 정예병들에게 목청껏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파이크 자루를 겨드랑이에 단단히 고정한 정예병들이 허리를 숙인다.
그렇게,
우리는 까맣게 몰려오는 발기지르를 향해 파도쳤다.
파박 ─── !
퍽 ─── !
파도에 부딪힌 일선이 뒤집히고,
카각 ─── !
쩍 ─── !
치켜세운 파이크에 쇠가 긁히고 살이 갈라져 붉은 피가 난무한다.
파도는,
아직도 나아갈 힘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멈출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으아아!”
기합을 지르며 선두를 자청하자 양옆 대열이 결사를 다짐하고 쐐기 모양으로 내 뒤를 바짝 따랐다.
그러나 이내 왼쪽 진영이 크게 무너져 내렸다.
파도가 바위를 만나 부서진 것이다.
고개를 돌려 그 바위를 보니,
그 바위 역시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바위의 이름은,
테티르 론바즈.
“이런…!”
멀어져가는 그의 얼굴에서 피 끓는 한탄이 들려온다.
“앞으로 더 치달아라, 후발대의 길을 열어야 한다!”
고개를 돌려 다시 전방에 집중한 나는 더욱 거세게 고삐를 치달아 나아갔다.
최소 발기지르 측 군세의 중앙까지는 꿰뚫고 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측면으로 치달을 가버트에게 아주 좋은 환경이 주어질 테니까.
슬슬 말의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부디 더 달려다오!
사선 대형을 유지한 체 선두로 발기지르의 군을 헤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
뒤따르던 정예병 몇이 고꾸라져 스러졌지만,
그럼에도 다섯 정도가 남아 끝까지 내 뒤를 지켰다.
연속된 충돌로 파이크가 부러지고, 허리에 찬 아밍소드로 긴 갈대를 쳐내듯 응전을 반복하는 그들을 보니 덩달아 내 기세도 올라갔다.
그렇게,
뚫었다.
발기지르군의 중앙을.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진형인가?!
마치 일 점 돌파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오목한 방진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오목한 방진 안에는,
고상한 은빛 갑주를 걸친 한 남자가 가로 든 세이버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21년, 이다치오]
[세상을 적신 하늘의 눈물]
추진력을 진정시킬새 없이, 오목한 방진으로 들어간 나는 곧바로 안장을 감싼 두 다리를 통해 땅의 질감이 무르다는 걸 간파했다.
세이버를 든 기사 역시,
장악형 인챈트를 다루는구나!
이내 말의 한쪽 발이 질척이는 진흙에 붙잡히고 말았다.
어떤 인챈트지?
땅을 젖게 만들었다면, 그 본질은 물에 관련된 재해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방진을 구축한 것을 보면 감응이 필요한 정예 병력이 없어도 그 위력을 쉽게 발휘할 수 있는 재해라는 소리.
그 말인즉슨,
홍수를 거머쥐고 있구나.
두 눈으로 간파를 쏟아낸 나는 군말 없이 안장 위에서 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열려 있던 뒷길이 방진을 구축한 병사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마치 인간 벽으로 만들어진 간이 결투장 같군.
보기 좋게 당해버렸다.
언제부터 통찰에 꿰뚫려 있었지?
애초에, 그 통찰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지?
아.
순간적인 깨달음에 내 뒤통수가 얼얼했다.
디안 베나즈.
그저 무대 위에서 나를 조련해본 것이더냐.
까득,
이를 물고 할버드를 꽉 쥔 채 다가가니, 세이버를 든 기사가 몸을 사선으로 돌려 딱 보아도 유려하기 짝이 없는 자세를 잡았다.
“나는 리케니엔의 조이, 조이 크레비디다.”
기사의 땅에 기사로서 살아가는 자라면,
무조건 한 번쯤은 듣게 될 이름이다.
과거 기사왕의 서기관.
그 고지식한 자가 베나즈의 기상에 가담한 것인가.
“마스 가문의 엘르길이다. 켄타나의 기사이기도 하지.”
내 말에 조이는,
대뜸 세이버를 거두었다.
“영주님께서 네가 오길 기다리고 계셨다.”
디안 베나즈가, 나를?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겠는가, 결착을 짓기 위해서지.”
이윽고 조이가 은빛 갑주를 번뜩이며 뒤돌아섰다.
그런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전방에 방진을 구축했던 병사들이 일거에 양옆으로 길을 트며 움직였고,
그 너머로 먹색 갑주를 걸친 자가 걸어들어왔다.
“디안 베나즈, 파도의 전조에 휩쓸린 모래알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파도를 부르던 땅 그 자체였었나.”
“과분한 평가로군.”
첫 대면과는 상이 한 말투다.
저것이 무대에서 내려온 본연의 모습이겠지.
얄미울 정도로 영민하고 교활한 작자로군.
“그래도 다행이야, 당신의 파도가 좀 더 컸다면 이 정도 ‘웅덩이’로는 턱도 없었을 테니까.”
“웅덩이라…,”
방진을 웅덩이 삼아, 친 파도의 일부를 붙잡는다.
짧은 순간에 잘도 생각해냈군.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지?”
내 물음에 디안 베나즈는 낡은 검 자루 위에 손을 얹은 채 짝다리를 짚었다.
“피를 멈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 자네를 이곳에 붙잡아 둔 것이기도 하고.”
그래, 그렇지.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갈비뼈로 움켜쥐며 할버드를 고쳐잡았다.
그러자 그 역시 검을 뽑아 자세를 잡는다.
마찬가지로 첫 대면 때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
저건 무슨 검술이지?
질척질척,
디안 베나즈가 먼저 발을 옮겨 내게 쇄도했다.
그래봤자, 아밍 소드로는 할버드의 거리를 제압할 수 없다.
자루 끝을 잡고 할버드를 길게 뻗어 그의 목을 꿰었다.
그런데 동시에 내 손목으로부터 기묘한 감각이 일었다.
그는 검으로 내 할버드를 쳐내지 않고,
검 면으로 도끼날을 타고 들어와 순식간에 자루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잘도…!”
인챈트의 힘으로 자루를 당겨 놈의 등을 베면 그만…!
[22년, 라에스..]
[0]
순간,
내 몸으로부터 휘발되기 시작한 인챈트의 근원.
그 말도 되지 않는 이질적인 감각에,
순간 이성까지 딸려 휘발될 뻔했다.
“뭐…?”
[관제]
정신을 차렸을 땐,
검 면으로 할버드 자루를 훑듯 타고 들어온 그가,
내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엘르길 경, 전쟁은 이것으로 끝내지. 빌비오나스에 언제까지 쇠와 피를 흩뿌릴 건가.”
“허….”
“당신이 내게 보였던 자비처럼, 이 전투는 어떤 깃발의 죽음으로 끝나선 안 돼.”
손끝에 겨우 쥐고 있던 할버드를 그대로 땅에 떨군 나는, 그 자리에서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졌소.”
패배를.
* * *
가버트 로셀란은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쳐야만 했다.
그의 주위로는 폭력적인 바람에 나가떨어진 휘하 병사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고악한…, 취미십니다. 베르융 경.”
그의 말마따나,
가버트 휘하의 병사들은 모두 한 군데 이상의 골절을 입은 상태였다.
당장 가버트 본인도 한 번의 부딪힘으로 왼손 약지가 부러진 상황이었다.
“뜻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고 해서 깃발을 꺾으면 쓰겠나. 그것도 자네와 그 휘하의 병사들로 세워진 훌륭한 깃발을 말이야.”
가버트는 속으로 푸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잘도 그런 모습으로 어진 말을 내뱉는군요, 라고.
그도 그럴 것이,
베르융은 전신이 희미해질 정도의 강렬한 바람을 두른 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산에 고인 바람 따위로는,
뒤덮을 수 없는 송곳 같은 바람을.
저 가공할만한 과거의 전설을 보라,
현재에도 전설이라 써 내려가는 당당한 모습을.
가버트는 속으로 애를 끓이면서도 동시에 기사로서의 경의를 느꼈다.
“그 뜻이 종래까지 하나로 귀결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깃발을 꺾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투지를 곱씹으며 되묻자,
베르융은 흑색 투구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그래야겠지. 그렇게 된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네를 꺾을 걸세.”
가버트는 베르융의 살기에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내 주군은 이 정도의 뜻을 하나로 묶지 못할 만큼 모자란 분이 아니야.”
“예상이란 건 언제나 빗나감을 겪는 법입니다.”
가버트의 반문에,
베르융이 허허 웃으며 고개를 틀었다.
“오늘은…, 아닌 것 같군.”
그의 말에 가버트가 따라 고개를 측면으로 돌리자,
그곳엔 막.
전투의 끝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바돈은 벅차오르는 심장이 쏟아질까, 상체를 급히 숙여 내달렸다.
그간 쌓여왔던 긴장이 폭발하듯 증발하고 뜨거운 흥분을 거머쥔 피가 전신에 돌아,
금방이라도 펄쩍 뛰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기지어에게 갔다.
그렇게 도달한 학술관 안에서는,
“그렇취! 당연한 승리였음을 내 알고 있었단 말이야!”
막 전서구를 받아 든 기지어가 입가에 침이 고이도록 광분하고 있었다.
“기지어!”
“빠돈!”
“진정 좀 하게, 얼굴에 침이 다 튀었잖아!”
“자네는 기쁘지 않은가?!”
말똥말똥 빛나는 기지어의 눈망울에, 바돈은…,
애써 감춰왔던 흥분을 결국 그 앞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기쁘지! 당연히 기쁘지 이 사람아!”
“크하하!”
바돈은 기지어와 함께 부둥켜안고 막 전해진 승전보의 감상을 나눌 생각으로 두 팔을 벌렸지만,
기지어는 냅다 학술관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리케니엔 상공 위로,
새떼가 동쪽으로부터 속속들이 날아온다.
출정을 나간 병사들의 편지와, 눈감은 애환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 비 오듯 쏟아지는 전서구 속에서,
거리를 미친 듯이 뛰어가던 기지어는 이내 무릎을 꿇고 양팔을 벌려 하늘을 찌르듯 노려보았다.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빌비온의 주인’의 금의환향을!”
리케니엔의 디안 베나즈.
그가 아이베리아의 서쪽, 작은 땅 빌비온을 하나로 묶었다.
이제 다음 발걸음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