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78화 (178/365)

178화. 집

가르웨의 새 일부가 빌비오나스 상공을 날아다니면,

식욕을 부리려는 야생의 것들이 물러나고,

그렇게 눈감은 자들의 온전함이 확보되었을 때.

양측의 깃발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아가 시신을 거두기 시작한다.

차마,

그들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던 나는 갑옷을 벗고 직접 현장에 나서 일손을 도왔다.

처음 보는 병사의 얼굴과 마주한 채, 죽은 자를 조심스레 들어 옮기는 작업은.

고되고 씁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마주한 병사들은,

기사들은.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많은 이들은 이런 내게서 기꺼이 위로를 느끼며 감사해주었다.

그러다가,

양 진영의 시신들이 뒤엉킨 현장에서 엘르길과 마주쳤다.

그 역시 갑옷을 벗은 채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지만.

글쎄,

무슨 대화가 필요할지.

엘르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끝내 우리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묵념만을 나눴다.

그리곤 서로 지나쳐 각자 휘하에 있던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분투했다.

이윽고 한 병사의 시신 머리맡에 앉은 나는, 거들어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조심스레 떠 있는 망자의 눈을 감겨주었다.

곧, 내 맞은편에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공, 제가 거들겠습니다.”

“테티르 경.”

거대한 그림자의 주인공은 테티르 론바즈.

그는 묵묵히 내 신호에 맞춰 시신의 양발을 감싸 안았다.

“공이라니, 낯선 단어로군요.”

“이제는 마땅히 뒤따라야 할 칭호입니다. 이 빌비온이 베나즈를 중심으로 돌아갈 테니까요.”

“무겁군요, 이들의 피로 만들어진 칭호는.”

“그러니 가볍게 쥐소서, 그들의 가족을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위 같은 사내인 줄 알았는데, 말랑말랑한 구석이 있구나.

“그럽시다.”

작게 미소로 화답한 뒤 우리는 턱짓을 주고받으며 시신을 들어 올렸다.

* * *

“리케니엔 측 전사자는 89명, 발리르 측 전사자가 129명으로 총 전사자는 218명이며 부상자까지 합치면 대략 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이의 보고를 들으며, 멀어져가는 수레 행렬을 지켜보다가 이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영주님의 전략 덕분에 피해가 이 정도에 그쳤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켄타나 측과 회전을 벌였다면 두 깃발 모두 괴멸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조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무겁지, 디안.”

“들어야죠, 조이.”

조이는 내 대답에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곤 다시 예의를 차렸다.

이내 수레가 모두 떠나고 나니, 하늘에서 얇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근처에 탑이 있었습니까?”

하늘을 올려다보며 묻는 내 말에, 조이는 내 시선을 따라 우중충한 하늘을 두 눈으로 흠뻑 적시고는 말했다.

“전쟁의 흔적입니다. 여러 인챈트의 잔재가 서로 엉겨 붙어 떨어지는 것이죠.”

파도와 바람.

홍수와 태풍이 너울거리며 생긴 흔적이란 말인가.

“허무하면서도 시원스럽군요.”

“그렇지요, 아마도 빗줄기가 더 거세질 것 같으니 길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조이의 말을 들으며 벤투스 위에 올라탄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수레 행렬을 쫓아 말을 몰았다.

그렇게 행렬 뒤를 지키며 한참을 이동하자 쏟아지던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나아가 언덕 하나를 더 넘으니 드디어 발리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선 내성엔,

이미 수많은 사람이 거리 밖으로 나와 있었다.

성관에선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고, 형형색색의 꽃가루가 떨어졌으며, 행렬 곳곳엔 사람들이 환호로 달라붙어 왔지만.

개중엔 상실을 전달받은 자들의 울부짖음도 섞여 있었다.

그것을 애써 외면한 채 수레와 함께 담담히 성관으로 진입한 나는, 마당에 차곡차곡 도열 되기 시작하는 시신들을 지켜보았다.

가르웨와 요함버크는 집안의 술통을 풀어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잔을 돌렸고,

그 잔을 받은 병사들은 곧 무르익을 승리의 무대를 앞두고,

심심한 넋을 기리기 위해 잠자코 침착함을 유지했다.

“영주님, 받으시지요.”

곧이어 조이가 가득 채워진 술잔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도열한 시신 앞에 나아가, 마주한 병사들 앞에 섰다.

막 저녁으로 접어든 오늘,

미리 반짝이는 수백의 별빛 앞에서.

켜켜이 쌓여 있던 감정을 폭발시키듯 들고 있던 잔을 번쩍 들어 올리자.

병사들은 모두 내 동작에 맞추어 잔을 올렸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마땅히 떠오르는 노래 가사도 없었고 말이야.

발리르에만 있을 전통 하나조차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까.

다만,

조심스럽게 진심을 전해볼 뿐이다.

낮고, 담담하고, 근엄하게.

“깃발을 막론하고 기꺼이 우리의 반석이 되어 준 용사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 반석을 다져줄 그대들을 위하여.”

말을 마치기 무섭게 우격다짐하듯 술을 한입에 들이켰다.

그러자,

그들 모두가 술잔을 따라 기울여주었다.

기꺼이 가슴의 불을 지펴 주었다.

마땅하듯 내게 경의를 표해 주었다.

* * *

길고 길었던 승리의 밤을 지나,

새벽이 밝기 무섭게 나는 베르융과 함께 먼저 리케니엔으로 복귀할 준비를 마쳤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발리르의 향후 인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조이가 함께 해야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가족을 보고 싶어 할 베르융을 저버릴 수가 없었기에 그와 먼저 복귀하기로 했다.

덕분에 조이는 며칠 더 발리르에서 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는데,

나는 그의 그 천진한 모습에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이, 결혼 생각은 없는 겁니까?”

혹 그의 과거에 누가 되는 발언이 아닐까 후회했지만,

이내 내 물음에 진지한 얼굴로 답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조이는,

베르융 몰래 내 어깨를 끌어안고 귀에 속삭였다.

“하지 마, 결혼.”

하지 마?

“왜요.”

“그냥 하지 마라면 하지 마.”

담담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조이의 표정을 보니,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만 같네.

그래도 그 말을 전부 이해할 순 없어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지만 말이야.

결국엔 리케니엔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부풀어 오를 대로 부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란히 말을 몰던 베르융에게 슬쩍 물어봐야만 했다.

“베르융, 조이에겐 가족이 없는 겁니까?”

그러자 베르융은 그 날렵하고 거친 인상에서 나오기 힘든 토끼 눈을 뜨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하…,”

그리곤 다짜고짜 한숨을 푹 내쉬는 게 아닌가?

곧이어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 한참을 끌끌거리며 웃다가 내 질문에 대답했다.

“있었지요, 지금은 이혼한 상태지만.”

“이혼…, 말입니까?”

“네, 결혼 초기엔 아주 죽고 못 살 기세로 잘 살더니 뭐가 안 맞은 건지 순식간에 이혼하더군요.”

“그… 렇군요.”

치부를 들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듣다 보니 멈출 수가 없어.

“가만 보면 엘리벤스가 참 독한 여자긴 했죠, 기업을 끼고 이혼 소송을 내어 위자료를 잔뜩 뜯어갔으니까요. 그것 때문에 조이가 개털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오…,”

나는 입을 오므린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과거 이야기에 물꼬가 제대로 튼 베르융은 회상에 젖어 이것저것 오만가지 것들을 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사왕의 서기관이 기사왕에게 대출을 받은 것부터,

대출받은 돈으로 후추에 투자했다가 된통 망한 것까지.

파란만장한 조이의 이야기에 복귀 내내 지루할 틈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제 리케니엔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럼 베르융, 경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기세를 몰아 베르융의 이야기를 묻자, 그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다섯 살 때부터 종자로 들어가 투박한 인생을 살았었습니다. 성년식을 마치고 첫 검을 손에 쥐었을 때쯤에야 이성에 눈을 떴죠. 아네즈는 제 첫사랑이었습니다.”

더 해줘요.

“차라리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이성에게 다가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그 당시 아네즈는 사교계에서도 인기가 굉장해 이미 많은 남자가 그녀를 노리는 상황이었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경쟁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해 나가떨어지게 하는 방법뿐이었습니다. 제가 배운 건 칼에 기름을 먹이고 휘두르는 것밖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요?”

“그렇게 결투를 거듭하다 보니, 더는 경쟁 상대가 남아있질 않더군요.”

뭐랄까,

정말 베르융 답네.

“이제 다가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 당시 저는 그것조차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숙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뤄질 수 있었습니까?”

“옆에서 참다못한 맥레인이 저를 끌고 아네즈에게 던져버렸습니다.”

“하하, 그게 진짭니까?”

“그 당시에도 맥레인은 견습 기사들 사이에서 자연재해 같은 존재였습니다. 뭐…, 덕분에 아네즈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지만요.”

베르융은 얼굴을 붉히다가도 금세 목소리를 가다듬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넌지시,

처음 들어보는 다정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베나즈의 이름을 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그 다정한 말에 섣불리 답하지 못해 결국엔 어색한 미소로 화답해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리케니엔에 도착하였다.

* * *

마른 장작에 기름과 불을 끼얹은 것처럼.

리케니엔의 주민들은 우리를 열렬하게 맞아주었다.

물론 이 가운데 바돈의 입김이 아주 크게 작용한 것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줄 알았던 고향의 향기를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동시에 그 향기에 칭얼대듯,

그간 쌓였던 피로가 엄습하는 것이 느껴져 온몸에 힘이 쫙 빠져버렸다.

이젠 얼른 집으로 돌아가,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온몸을 파묻고 싶은 생각뿐이야.

이런 내 마음을 엿보았을까,

베르융은 선두를 자처해 의도적으로 짧은 길을 골라 나를 저택으로 안내했다.

“승전의 기념은 조이와 병사들이 돌아오는 대로 나눠도 늦지 않습니다.”

“베르융,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좀 더 쾌활한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어 그에게 예를 표하자, 그 역시 고개를 숙이며 예를 보였다.

곧장 멀어져가는 베르융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말 머리를 돌리면.

“오셨습니까.”

미리 밖으로 배웅을 나온 바돈이 살갑게 나를 반긴다.

“오랜만입니다, 바돈.”

그의 안내를 받아 집에 들어서자마자,

10월의 구름 냄새가 가득한 욕조에서 묵은 때를 씻고.

준비된 부드럽고 가벼운 리넨 셔츠로 갈아입은 뒤 목에 걸린 인장을 손에 쥐고 지하실로 들어서.

“다녀왔습니다.”

베나즈의 인장을 손에 쥔 메리안 님의 석상 앞에, 고개를 숙여 심심한 인사를 올린다.

집에 왔습니다.

디안 베나즈가요.

한참 뒤,

지하실 밖을 나선 나는 바돈을 불러 부탁했다.

“바돈, 잠시 쉬고 싶으니 잠시만이라도 집 대문에 빗장을 걸어주시겠습니까.”

이런 내 부탁에 바돈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11월, 느지막한 가을 냄새 어떠신지요?”

“최고죠.”

“그럼, 편히 쉬십시오.”

곧 커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저택 전체에 어둠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하면, 나는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솔솔,

어디선가 불기 시작한 시원섭섭한 가을 냄새에.

이내 나는 몽글몽글해진 마음을 끌어안은 채 침대 속으로 들어가 단잠을 청했다.

한 계단 위에 오르기 직전, 일말의 평온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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