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79화 (179/365)

179화. 한 계단, 그 위에서

눈을 떠보니 창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잠을 잔 거지.

부스럭부스럭,

잠으로 얼룩진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자, 막 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끄러운 소리를 쫓아 굳게 닫힌 방문을 열면, 이내 문밖에서 화한 빛이 쏟아져 들어와 내 몸에 묻은 어스름을 닦았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리니 시끄러운 소리는 왁자지껄한 것으로 바뀌었다.

막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쯤.

“다들 조용! 영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걸걸한 기지어의 목소리가 일대 소음을 일축했다.

1층 홀, 탁상 여러 개를 옮겨 만든 자리.

그곳에 둘러앉아 조촐하게 술을 나눠 마시고 있던 이들 모두가 내게 시선을 옮긴다.

엥킬로 일가와 오르테 일가.

기지어와 폴란, 조엘도 한자리에 모였군.

조이도 있는 걸 보면 병사들과 함께 무사히 복귀했나 보네.

“영주님! 제 얼굴보다 밤이 더 그리우셨습니까?”

살짝 취한 듯 보이는 기지어가 곧장 절뚝거리며 내게 다가오더니, 알딸딸한 취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에 바돈은 창백한 얼굴이 되어선 그를 말리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런 바돈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렸다.

좋은 날이잖습니까.

“기지어, 당신 얼굴을 보니 밤을 먼저 만나러 간 게 후회되는군요.”

취기에 장단을 맞추며, 기지어의 어깨를 감싸 부축하자 일대 분위기는 금방 달아올랐다.

“모두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긴 밤이었거든요.”

부축한 기지어를 제자리에 앉히고, 태연히 빈자리를 골라 앉아 너스레를 떨자 모두가 크게 웃어주었다.

“영주님, 실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공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작게나마 회포를 푸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제가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바돈, 잘하셨습니다.”

내게 다가와 한입 베어 문 진지함으로 토로하는 바돈에게 괜찮다 속삭여주자 그 역시 곧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술자리의 열기가 다시 본궤도에 오르자, 베르융과 조이가 스스럼없이 티격태격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이.”

“왜.”

“조이!”

“말을 해.”

“쪼이이!”

“베르융, 얼마나 마셨다고 벌써 얼이 빠지나?!”

“얼이 빠져? 내가?”

빠진 것 같은데요.

“이 베르융 오르테를 뭐로 보고?!”

“내 눈엔 지금 얼빠진 베르융 오르테 밖에 안 보이는데?”

“영주님, 들으셨습니까? 조이가 절 매도했습니다. 이에 저는 제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 재판을 요청합니다.”

취기가 살짝 돌기 시작한 베르융은 예상외로 유쾌한 면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반면 조이는 평소 외향적인 모습과는 달리 술이 들어가니 살짝 냉소적인 부분이 보이는 것 같네.

“영주님, 오늘부로 명심하시게 될 겁니다. 베르융 이놈에게 함부로 술을 먹여선 안 된다는 걸.”

아니,

금세 너스레를 떠는 조이의 모습을 보니 앞 전의 모습은 그저 베르융의 취기에 오랫동안 시달려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장단에 끼어들어 볼까.

“베르융, 결투 재판을 한다면 그 결투의 내용은 무엇으로 할 생각입니까?”

내 물음에 베르융은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가 술로서 나를 매도했기에, 나는 술로서 그를 심판할 것입니다.”

“베르융, 술로 날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

자신만만한 베르융의 모습과는 달리,

그 옆에 앉은 베르융의 아내, 아네즈는 한숨을 픽 쉬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된 결투 재판,

그 시작은 베르융으로부터.

“첫 잔이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앞에 놓인 잔을 말끔히 비웠다.

그러자 이에 질세라 조이 역시 바람에 나뭇잎 뒤집히듯 앞에 놓인 술잔을 순식간에 비운다.

“받고 하나 더!”

조이의 호기에 베르융은 더욱 호승심을 불태우며 다음 잔을 비웠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여념이 없던 학술원의 3인방마저 그들의 결투에 집중하기 시작하던 때.

“베르융, 뭐하나? 안 마시고!”

열두 잔째,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 베르융.

조이는 그를 내려다보며 승리를 확신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대뜸,

옆에 있던 아네즈가 술잔을 비우며 말한다.

“받고 더.”

그 모습에 조이는 덜컥 당황하며 쳐다보지만, 아네즈는 씩 웃으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조이, 오르테는 언제나 하나야.”

“아네즈, 그렇다고 내 포기할 줄 알았나!”

조이는 곧바로 채워진 술잔을 들어 비웠다.

결투는 생각보다 더욱 치열해져,

“여러분, 오르테와 크레비디 가문 간에 벌어진 절체절명의 결투! 그 끝의 윤곽이 슬슬 보이는 순간에 다다랐습니다!”

어느새 기지어가 난입해 중계하고 있었다.

몇 잔이 그들 사이를 오갔을까.

“아네즈…,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

서서히 무너져가는 조이가 아직 말짱한 아네즈를 향해 호소하듯 말하자,

“쉬어, 조이.”

그녀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이내 베르융을 따라 조이 역시 고개를 푹 떨궜다.

아네즈 오르테,

무서운 사람.

그렇게 두 기사가 침묵하면서 분위기가 많이 차분해지자,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세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영주님.”

“왜 그러십니까?”

“이제 슬슬 안주인 계획을 세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세라는 아네즈와 묘한 눈빛을 나누곤 다시금 말을 이었다.

“여기 오르테 가문을 지킨 아네즈처럼 베나즈 가문의 내실을 다져줄, 그리고 영주님의 마음을 채워줄 사람 말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세라가 말하는 것은 내게 한참이나 낯선 문제였다.

그러나,

“때가 찾아온다면,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언젠가,

막연히 그때라는 게 온다면.

내 기꺼이 마음을 덜어 줄 수 있는 이가 나타나지 않을까.

이런 내 대답에 아네즈와 세라는 눈을 반짝이며 질문 공세를 이어갔다.

“궁금합니다, 영주님의 이상형은 어떨지.”

“혹시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신지요?”

내 옆에 앉은 바돈도 궁금했는지, 어느새 시선이 내 입에 꽂혀있었다.

반면 기지어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고, 폴란과 조엘은 그런 기지어의 눈치를 보며 가슴을 졸였다.

다만 애석하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

“아쉽게도 아직 없습니다.”

애초에 이성과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잖은가?

무엇보다 지금 당장은 그런 샛길에 발을 들일 엄두도 나지 않고 말이야.

내 대답을 들은 아네즈와 세라는 알겠다는 듯, 서로 시선을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동시에 베르융과 조이가 고개를 불쑥 들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베르융?”

“일전에 보았던 그 어여쁜 귀 큰 처자는 정말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였단 말인가?”

“뭡니까…, 두 사람?”

대뜸 고개를 들고선 멀쩡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둘에게, 당황 묻은 얼굴로 따져봤지만.

이내 입안으로 아차라는 단어를 곱씹어야만 했다.

이 대화의 주제로 비틀기 위해 지금까지 연기를 해왔던 건가!

“안사람들이 할 일이 있다 하니, 저희같이 겉으로 떠도는 이들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르융의 능글맞은 말을 듣고 나니 뭐라고 반문할 수도 없었다.

토르킨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깃발의 주인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휘하에게 파는 상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셨지.

참으로 짙은 염세가 묻어있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들이 내게 한 질문엔 애정이 묻어있는 것 같아.

좀 더 깊은 생각에 빠져 고심해볼까 했지만,

이내 내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고 있는 자들을 보곤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을 엿본 듯,

기지어가 얼른 입을 열어 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베나즈 가문에게 혼약은 종속적인 계약이 아닌, 사랑으로 이뤄진 계약이어야 할 겁니다. 설령 사랑의 대상이 뒷배가 없는 일반 자유민이라 할지라도.”

“그 말은, 깃발 가진 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베나즈 가문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하지만 바돈이 진중한 표정으로 따지듯 되물으며 상황은 좀 더 심화 되었다.

그러나,

“맞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깃발이 있다고 한들 거절해야 합니다.”

기지어는 바돈의 말에 당당히 대답했다.

“지금 시점에서 무턱대고 진행되는 깃발의 내적 교류는 정치적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막 성장판을 얻은 우리에겐 좋은 선택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 성장판을 벌릴 계기가 많아진다면 좋지 않겠는가. 주위 깃발과 사교적으로 교류하여 베나즈 깃발의 위엄을 다진다면 내적 교류의 선택 주도권은 영주님의 것이 되네. 내적 교류의 주도권은 곧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이니 영주님의 마음에 상처 될 일도 없을 테고.”

“바돈, 모든 것에 이상을 고집할 순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고집하기 위해 디안님께서 돌아오지 않으셨는가.”

상충하는 둘의 대립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 붙어버렸다.

그러나 이내 바돈이 먼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에 막 입을 열려던 기지어 역시,

얼른 내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분위기는 과일과 같아,

너무 익어버리면 짓무르기 마련이다.

지금처럼.

“쓴 것을 들이켰으니, 쓴 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여기까지 합시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둘러앉은 모든 이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는 자리였을 테지만,

동시에 승리를 실감하는 자리이기도 하구나.

벌써 승리에 뒤따를 많은 선택지 가운데 일부가 거론되는 것을 보면.

“다만 쓴맛으로 자리를 파할 순 없으니, 마지막으로 제가 한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작게 채워진 술잔을 들어 올리자 자리에 일어선 모두가 앞에 놓인 술잔을 따라 들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피땀 흘려 예상했고,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지 못하였음에도 결과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내 의도와는 달리,

바돈과 기지어는 더욱 씁쓸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 * *

이른 새벽,

혼자 호롱불을 들고 저택 밖을 나섰다.

이내 리케니엔의 서쪽 골목, 작은 집 앞에 멈춰선 나는 조심스레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안에서 일순간 인기척이 들려오더니,

“영주님이 아니심까?!”

문을 열고 나온 소여가 놀란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임다!”

소여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자, 하나뿐인 방 안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그 방문을 열면.

“영주님.”

“몸은 좀 괜찮습니까, 할리?”

막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려는 할리가 보인다.

“일어나지 마십시오, 그저 안위가 걱정되어 온 것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히 심려를 끼쳐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의 상태는 괜찮아 보인다.

참으로 다행이야.

“할리, 소여. 두 분 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소여는 넙죽 허리를 더 숙여 내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면서 할리에게 핀잔을 주듯 말하는 소여.

“대장의 몫까지 허리를 굽혔슴다.”

그 말에 할리는 픽 웃으며 잠시 상체에 주었던 힘을 풀어야만 했다.

* * *

날이 밝자마자 베르융과 조이,

그리고 기지어가 접견실을 찾아왔다.

어제의 가벼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무겁고 진지한 모습으로 무장한 그들은 이제.

한 계단, 그 위에 서 있는 나를 따라.

눈앞에 보이는 다음 계단을 열거했다.

그 첫 단추는,

기지어로부터.

“영주님, 이제 아이베리아에 베나즈의 깃발을 공표하실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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