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한 계단, 그 위에서 (2)
베나즈의 깃발을 공표하면, 여러 기업과 조합들의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접점이 생긴다.
그렇게 투자를 원하는 기업과 조합들을 걸러서 엄선 및 유치를 해 깃발 아래 자금이 흐르기 시작하면,
빌비온 일대 군사와 내정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폭발적인 성장이 이뤄진다는 말이다.
기지어의 그런 제안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매력적인 만큼 위험도도 높은 법.
곧바로 조이가 기지어의 그런 의견에 반문을 제시했다.
“기업과 조합들의 투자를 받기 시작한다면, 그들의 후원을 받는 발언가들을 중심으로 빌비온 의회가 결의될 겁니다.”
이어 베르융이 조이의 말을 이어 덧붙였다.
“그리고 그 의회는 기사들의 입지를 압박할 것이고요.”
그러나 기지어는 지지 않고 두 기사를 향해 질문하듯 말했다.
“그렇다고 기사들의 입지만이 강화된다면 빌비온 자체 내 자금 유동성은 동결되고 말 겁니다. 각 깃발은 점점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게 될 것이며 종래엔 다양한 생산시설을 비롯한 상업적 이득이 거세된 채 이도 저도 못 할 처지에 놓이겠죠.”
조이는 그런 기지어의 말에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과거 기사왕이 어떻게 몰락하게 됐는지, 그 완벽한 줄 알았던 깃발들의 균형이 어디서부터 깨지게 됐는지. 나는 봐 왔기에 겁이 나네.”
씁쓸한 표정으로 허심탄회한 걱정을 토로했다.
그러자 기지어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역사의 산증인이나 다름없는 조이의 발언에 어떤 말을 할지 몰라서겠지.
하지만 기지어의 말 대로,
여러 기업과 조합의 투자를 받게 된다면 지금 포개어진 손 조합에만 매달려 있는 우리에겐 또 다른 활로가 마련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또 조이와 베르융의 말 대로.
하나의 빌비온으로 다져야 할 지금 시점에 세력의 세분화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해.
그야말로 난제다.
선택권을 쥐고 써야 하는 나로선 쉬이 풀기 힘든 문제야.
그보다,
깃발을 아이베리아 전역에 공표하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조이, 베나즈의 깃발이 공표된다면 아이베리아 전역에 있는 깃발들의 이목을 끌게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적과 아군의 윤곽이 확실히 드러나겠군요.”
“… 그렇지요.”
“개중엔 테티르와 같이 맹목적으로 움직일 깃발도 생길 것이고요.”
내 물음에 조이가 침묵으로 답하자 옆에 있던 베르융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반대로, 우리와 합류할 깃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세월 불신과 오해로 찌들은 이 땅에서 끝까지 신뢰를 쥐고 버틴 깃발이 하나 정돈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베나즈의 이름에 반응하겠습니까? 섣불리 접근했다간 지금껏 유지해왔던 그들의 이성에 불을 지른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테티르가 기사들과 함께 군을 대동해 리케니엔으로 곧장 진격했다면,
지금 상황은 매우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을 거다.
그래, 내가 살아있다고 한들…,
새벽에 할리의 집이 아닌 그가 묻힌 땅을 찾고 있겠지.
0,
그것은 강력한 증명의 수단이지만.
발현되는 힘이기에 영원할 수는 없다.
내 고심에 같이 입을 다물고 침묵을 유지하던 두 기사는, 어느 순간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암묵적인 대화를 나누는 듯 보였다.
그렇게 침묵으로 아침 접견이 끝났을 때.
두 기사는 기지어와는 달리 자리를 지켰다.
곧, 베르융이 내게 불쑥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영주님, 저녁에 기사‘들’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어쩌면, 심중에 있는 그 팽팽한 저울을 기울이게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덧붙여 조이 역시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아니면, 모든 의견이 차곡차곡 진행될 수 있는 기틀 그 자체를 마련할 지도요.”
“…,바돈에게 일러 저녁에 접견 시간을 마련하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두 기사는 곧장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 * *
처음 보는 구름에 해가 반쯤 묶여 어둑한 정오.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처음으로 학술원을 찾았다.
그곳엔 조엘이라 불리는, 기지어가 등용한 인재가 홀로 책 사이에서 분투하고 있었다.
“영주님! 이곳까진 어쩐 일로…?!”
순수한 눈망울과는 달리 강인한 턱의 대비되는 매력을 가진 그에게 나는 스스럼 없이 다가가 물었다.
“읽을 책을 찾고 싶어 왔습니다.”
“혹 찾고 계신 책이 있으십니까?”
조엘은 내 말에 반색하며 쏜살같이 책더미 속을 헤치고 나왔다.
“기업과 조합에 관한 아주 기초적인 책이었으면 좋겠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내 조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확히 한 책장을 향해 다가갔다.
저 정글처럼 빽빽한 책들을 꿰고 있기라도 한 것인가?
이런 내 예상에 부응하듯, 조엘은 곧장 책 한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책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영주님.”
그 책은,
[유산]
끝이 닳은 갈색 가죽 표지를 가진 얇은 책이었다.
“잘 읽겠습니다, 조엘.”
“언제든지 찾아와주신다면 제 능력이 닿는 대로 어울릴만한 책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그의 인사에 예를 표하고 돌아갈 찰나,
“참, 조엘.”
놓친 것이 있어 바로잡기로 했다.
“획기적인 보급로의 측량을 도맡으셨었지요, 당신의 그 재능은 내겐 둘도 없이 든든한 것입니다.”
때 늦은 격려였음에도, 조엘은 상기된 얼굴로 쭈뼛거리다가 이내 얼굴에 쑥스러운 웃음꽃을 피우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의 그 감사에,
되려 많은 위로를 받은 것 같아.
나도 고개를 돌려 작게 미소지었다.
짧은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내 갑옷을 거치한 채 낑낑거리며 운반하는 바돈과 딱 마주쳤다.
“바돈, 갑옷 정비는 제 일인데요.”
“영주님의 일을 나눠 부담하기 위해 제가 있는 겁니다.”
그를 거들기 위해 다가가자,
“제가 하겠습니다, 영주님.”
바돈은 되려 고개를 저으며 날 제지했다.
그 모습이 섭섭하면서도, 자신의 도리를 지키려는 바돈의 모습이 멋있게 보여.
조용히 그의 옆을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그러고 보니 학술원에서 기지어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
마찬가지로 이맘때쯤이면 몰려와야 할 서류도 잠잠한 걸 보니, 기지어도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게 임하고 있는 거야.
나도 맹목적으로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위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도하고, 선택하는 자리는 그만큼 곱씹어봐도 두렵고 미지한 영역이었으니까.
짧게 숨을 내쉬어 속에 있던 생각을 휘발시키고,
자리에 앉은 나는 포개어진 작은 세상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유산이라.
이 너머에 있는 세상은 제법 거창한 것일지도 모르겠어.
중립지역에서 무법자로 살아갔을 적, 내게 가장 넓은 자유를 선사해줬던 세상은 책이 유일했었지.
그 설레었던 경험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책을 펼쳐 보이는 첫 문단에 눈길을 쏟은 나는,
금세 그 속에 빠져들었다.
[용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세상의 많은 규칙이 재정립되었지만, 그 가운데 명맥을 유지하며 내려온 것들이 있다.
그것은 막 내린 시대의 유산.
이 유산 안에서도 가장 지분이 큰 것은 단연 기업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용의 시대 때부터 이어진 유구한 기술 발전을 토대로 그 명맥을 유지한 기둥이며,
용의 시대 이후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불멸의 상징이기도 하다.
여기서 조합과의 차이가 매우 두드러지는데,
기업은 용의 시대 때부터 기술적 명맥을 유지한 사업체라고 하면, 조합은 용의 시대 이후의 기술을 발견하고 개발한 창작자 모임이다.
이렇다 보니 조합과 기업과의 사이는 신구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충돌과 같이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편이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용의 시대 이후 큼지막한 기술적 이변은 바로 저 충돌에서부터 나왔다.]
* * *
끝은 이렇게 끝난다.
‘기업들의 심장이라 불리는 ‘메트로폴리아’는 지금 멈춰있다.’
‘막 내린 용의 시대처럼.’
마지막 문단까지 찬찬히 훑고서 담담히 책을 덮었다.
책 내용은 대부분 기업과 조합에 관한 이야기였다.
요는 결국 기술이 가장 큰 유산이라는 것이었는데, 그보다는 안에 몇몇 예시로 적힌 사업가들의 모습이 더욱 뇌리에 남았다.
그들은 마치 두 발 걷는 자들 가운데서도 다양한 능력의 한계를 마주한 것처럼 묘사되어,
읽는 내내 신비로움만이 느껴졌다.
살짝 미묘한 여운을 곱씹으며, 창밖 풍경으로 시선을 옮기면.
벌써 밖은 해가 도망치고 어둑해져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회중시계를 들어 시간을 보려고 하면, 정말 짠 듯이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겨온다.
“영주님, 기사분들이 오셨습니다.”
왜인지, 바돈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들어오세요.”
내 말에 스르르 열리는 문,
그 너머로 들어온 기사는 총 세 명이었다.
조이, 베르융.
그리고 테티르.
심지어 테티르는 전신을 갑주로 무장한 모습이었다.
“영주님을 정식으로 뵙습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게 기사의 예를 표했다.
그의 산만 한 덩치로 행해지는 기사의 예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것이었지만.
반대로 밤중에 산 뒤로 숨은 해가 된 것 같이 마음이 든든하기도 하다.
“테티르,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고개를 돌려 조이를 바라보자, 그는 내 시선의 의중을 곧바로 파악하곤 대답했다.
“지금부터 하게 될 이야기에 테티르가 빠져선 안 되기에, 그를 급히 불렀습니다.”
“일단 모두 자리에 앉으시지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내 말에 셋은 의자를 골라잡고 앉았다.
이렇게 보니 대단하긴 하네.
과거 전설이라 불리던 세 기사가 내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말이야.
두 바람과 한 범람이 같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한걸.
이제 조이가 목을 가다듬고 점잖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영주님, 지금까지는 자리를 마련하고 기틀을 다지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지만…, 이제부터는 달리기를 멈추고 뒤를 둘러봐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어 베르융이 대뜸.
“우리의 이런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사죄를 구했다.
그 모습은 무거운 진실로 점철되어 있어, 덜컥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내 말에, 조이는 날카로운 눈빛을 쏟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앵거스 가문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듣다마다,
몇 안 되는 맥레인의 과거 이야기에 담긴 내용이었으니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렴풋이 그들로 인해 기사왕의 기틀이 무너졌다는 것도.”
“맞습니다, 앵거스 가문을 위시한 기업과 조합이 발언가들이 기사왕의 기틀을 내부서부터 갉아먹었지요.”
이에 가만히 있던 테티르가 분을 삭이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각지로 원정을 떠나 있던 기사왕의 휘하 기사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앵거스 가문의 말을 믿었습니다.”
곧 그가 고개를 떨군다.
“기사왕의 가장 강력한 검이 주군을 배신하고 0을 찬탈했다.”
이어 베르융이 한탄하듯 그 말을 이었다.
“앵거스 가문은 기사왕의 기틀 가운데 가장 든든한 신뢰 기반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치 전반에 가장 유력한 존재가 되었지요.”
결국,
베나즈 가문을 아이베리아의 금기로 묻어버린 건.
앵거스 가문이라 이 말이로군.
지금껏 경주마처럼 달려오던 내가,
왜 달려나가야 했는지, 그 실마리의 공백이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올라가야 할 계단의 윤곽도 서서히.
선명해지는 것 같군.
쓴 것들을 삼키며 수긍으로 소화하고 있는 내게,
이제 베르융이 본론을 던졌다.
“영주님, 맥레인 경께 앵거스 가문의 이름을 들으면서 혹 ‘기울어진 바위 아래 난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기사왕이 마지막으로 남긴 명령이었지요, 그곳에 0이 있으니 그곳을 찾아가라고.”
이에 베르융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등 뒤에 거치되어있는 낡은 아밍 소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0도 본래의 자리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동시에 조이와 테티르가 무릎을 꿇는다.
“기사왕의 검을 되찾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