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떨기 꽃 아래 모루
발휘되어야만 증명되는 것과,
그 자체로서 증명이 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과시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설득이란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후자는 상징으로서 각자에게 이해를 던질 수 있으니까.
이는 비교하자면 왕국의 대군을 출정시키는 것과 그 왕정의 왕관을 내세우는 것의 차이와 같다.
0,
그것을 발휘가 아닌, 상징으로서 내세울 수만 있다면.
마그나베노스가 아닌, 기사왕의 검을 상징 삼을 수만 있다면.
깃발의 공표가 끼칠 영향력은 아이베리아 일대를 덮고도 넘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수많은 깃발의 동향을 꾀어낼 수 있을 테지.
그 가운데 던져진 이해를 납득하고 우릴 향해 기꺼이 나부낄 깃발 하나 없을까!
하지만 이런 벅차오르는 마음의 이면 속엔,
반대로 두려움이 가득했다.
기사왕의 검은 흩어진 아이베리아 중심 땅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 통하는 것.
이것을 베나즈의 이름으로 내세웠을 때, 우리에게 되몰아칠 파란의 크기는 얼마나 거대할까.
잠깐의 생각만으로도 망망대해 같은 고심에 표류한 것만 같아 막막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 앞에 무릎 꿇은 두 기사와 긴 숙고 끝에 조언을 아끼지 않은 한 기사에게 대답해야만 했기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담담히 그들에게 말했다.
되몰아칠 파란이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할지라도,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며 나아갈 자들이잖아.
그렇다면 나도 유감없이 발을 내세워 디딜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어?
세 기사는 내 대답을 듣고서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궜다.
* * *
세 기사가 떠난 직후 해가 꺾이자마자 기지어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찾아왔다.
“영주님, 발리르와 켄타나 건에 관해 핵심적 검토가 필요한 안건들을 정리해왔습니다.”
빌비온 내 행정처리의 보고였을 테지만, 아마도 그에게 있어선 동시에 내 의중을 떠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겠지.
“늘 수고가 많습니다, 기지어.”
“선택의 무게를 짊어지셔야 하는 영주님에 비하면, 제가 하는 일은 보잘 것 없습니다.”
“그 선택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줄 사람은 기지어 당신뿐이잖습니까?”
내 말에 기지어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여도, 짊어지셔야 하는 부담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저 저는 쓰러지지 않게 무거운 짐 앞에서 뜯어말리는 사람일 뿐.”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내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나는, 이어 그가 건넨 서류에 시선을 옮겼다.
기지어는 이런 내 시선의 움직임을 꿰뚫듯,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발리르와 켄타나는 리케니엔의 종속적 성격을 띤 형태로 동맹이 체결될 겁니다. 이 부분은 두 깃발도 어느 정도 감내하고 있을 부분이니 체결 자체에 생길 차질은 없을 겁니다.”
“종속적인 표현은 빼는 게 좋겠군요, 기사로서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들의 존중도 챙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은 발리르의 영주로 베르융 경을 추대하는 안건입니다. 군사적 소양이 깊은 그를 변경백으로 임명하여 쓰신다면 그 효과를 톡톡히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곳은 이미 테티르 경이 꽉 잡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베르융 경이 발리르의 영주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테티르 경은 종전까지 엄연히 우리 최대의 적이었으니까요.”
기지어가 제시한 선은,
솔직히 설득력이 있었다.
과거의 오해라던지, 기사 특유의 유대감을 내세우기엔 외적인 행정 체계의 감성과는 걸맞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기지어, 그 건은 그 방향으로 쭉 진행합시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이어서 나열한 기지어의 보고는,
흠잡을 데가 없이 유려했다.
빌비온 내, 유일하게 높은 성채를 보유한 발리르를 내세워 변경을 단단히 방비하고.
특산품을 가진 티히트라와 켄타나를 경제적 거점으로 활용해 내수를 실용으로 채운다.
그 과정에서 발리르는 베르융이, 켄타나는 조이가 투입되어 점진적으로 리케니엔의 휘하 아래 녹아들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깃발의 공표와 동시에 후원을 원하는 기업과 조합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반 다지기였다.
그렇게 보고가 모두 끝나자,
기지어는 괜히 멋쩍은 표정으로 수염을 긁적이며 쭈뼛대다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영주님.”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십니까.”
혹 서류상으로 놓친 내용이 있을까 했는데, 되려 그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물론 이마저도 영주님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만.”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세 기사와 나눈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기사왕의 검을 되찾기로 했습니다.”
“아… 어…?”
내 즉답에 기지어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춤거리다가, 이윽고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내게 따지듯 말했다.
“그러니까, 그걸 제게 그리 쉽게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그러다가도 내가 한 말에 의미를 뒤늦게 곱씹었는지,
“그런데 기사왕의 검이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펄쩍 뛰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 곳곳을 쑤시는 기지어의 모습에 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영주님이 벌써 리케니엔 내 파벌을 조성하여 내부적으로 서로를 견제할 수 있도록 부추기는 작업을 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파벌… 말입니까?”
“그러니까, 기사들과 내정 직을 따로 분리하여…,”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능청스러운 대답에 기지어는 고개를 황급히 가로저었다.
그의 능동적인 사고방식이 성급함을 불러 스스롤 출발선 바깥으로 내딛게 만들었나 보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기지어, 어쩌면 나중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어지는 내 말에 기지어가 마른 침을 삼키며 경청을 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리고 적지 않게 긴 이후까지도 파벌 같은 것에 마음 쏟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 렇습니까?”
“애초에 기지어님의 보고가 끝나는 즉시, 이 일을 알려 논의할 생각이었습니다.”
“정… 말입니까?”
“정말.”
시치미를 떼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기지어는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 말을 힘겹게 납득했다.
장난스럽게 말하지 말걸.
하지만 파벌이라니,
내게도 그건 제법 지끈거리고 무서운 것인걸.
어쩌면 빌비온이란 작지 않은 땅을, 기사들만의 격의로서 결속시킬 수 있었던 건 기적과 같은 요행이 아니었을까?
이윽고,
기지어는 내 고백을 듣자마자 벅차오르는 표정을 지으며 향후 계획에 있을지도 모를 ‘만약’들을 쏟아냈다.
* * *
잠을 설쳤다.
결국,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호롱불 하나에 의지해 책상 앞에 앉은 나는 뒤편에 거치된 낡은 아밍 소드를 집어 든 채…,
마음속 파도치는 생각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파도 속에는,
너무 어두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암초가 여럿 있었다.
하나는,
맥레인이 해준 과거 이야기 속 그가 가지고 있던 인챈트의 행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백.
기사왕의 분리된 인챈트를 갖기 위해 해야 했던 여정, 그사이에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맥레인은 그 부분 만큼은 아주 흐릿하고 모호하게 설명해 주었으니까.
다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에겐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당장 암초를 피해 원하는 데까지 생각을 헤엄치는 것 하나뿐이리라.
경위를 따져보자.
기사왕 에르앵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갖고 있던 검을 ‘기울어진 바위 아래 난쟁이’에게 넘긴 뒤였고.
이후 맥레인은 에르앵의 명령을 따라 그곳에서 본래 검과 분리되어 지금의 낡은 아밍 소드에 이식된 인챈트를 가지고 떠났다.
그렇게 놓고 봤을 때, 기울어진 바위 아래 난쟁이라는 곳은 인챈트의 이식 공정을 해낼 수 있는 장소일 것이다.
당장 연상되는 것은,
대장간이되 결코 단순한 대장간은 아닌 곳.
그러나 지칭이 굉장히 추상적인 것을 보면, 이는 아마도 장소로 향하는 아주 결정적인 단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용의 시대 이후의 추상은 대부분 눈앞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현실이기도 하잖아.
기울어진 바위 아래 난쟁이 그 자체가 그저 간판에 적힌 글귀일 수도 있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안은 호롱불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슬슬 떠날 준비를 시작해야겠어.
* * *
내심 설렘에 두근거리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홀로 나서는 길이었고, 그로 인해 켜켜이 쌓인 답답함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짐 정리를 돕던 바돈은 아무리 그래도 홀로 떠나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연신 기사들을 탓하였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는데,
사실 홀로 여정을 떠나는 것에 극렬한 반응을 보인 건 바돈 뿐만이 아니었다.
어제 기사왕의 검이 거론된 이후,
조이 역시 적어도 둘 이상의 수행 기사와 함께 떠나야 하지 않겠냐며 말했었지.
다만 기사왕의 검을 되찾는 숭고한 일엔 그와 관련된 자만이 나서야 한다는 베르융의 완강함에 가로막혔지만 말이야.
기지어 역시 지금의 빌비온은 기사들의 관계와 땅 그 자체의 수복을 위해 구태여 인력을 투입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정보가 먼저 새어나가 여기저기서 설레발로 리케니엔을 걷어찰지도 모른다고도 했고.
뭐 어쩌겠어,
나는 그들의 말에 부응한 것뿐인데.
엣헴.
속으로 합리화를 내미는 내 앞에,
바돈이 갑옷을 둘둘 싸맨 채 지나가고 있다.
“바돈?”
“혹시 모르니 갑옷도 챙겨 가시죠, 걸치기만 해도 업신여김의 9할은 차단할 수 있을 겁니다.”
나를 향한 걱정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이토록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아서, 한참 그의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뒤늦게 따라붙어 그를 말려야만 했다.
티격태격.
기분 좋은 말씨름을 하고 나면, 바돈은 유감없이 내게 져주며 갑옷을 다시 되돌렸다.
그렇게 단출히 짐을 꾸리고 벤투스의 안장에 걸어 묶고 있을 때,
두 기사가 나를 찾아왔다.
“이제 출발하시는 겁니까.”
조이의 물음에 내 시선은 자연히 그들의 부풀어 있는 안장 가방으로 향했다.
하여 고개를 잠시 기울여 그들 뒤편을 살펴보면, 저택 바깥에 길게 늘어선 채 기다리고 있는 행렬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이제 떠나시는 겁니까, 두 분 모두?”
내 물음에 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리케니엔을 떠나 새로운 자리를 향해 떠나는구나.
그들이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괜히 섭섭한 기분이 들어 입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꽤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여정은.”
나는 벤투스 위에 올라타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그들 역시 고삐를 고쳐 잡으며 너스레로 화답한다.
“부디 우리가 새로운 자리에 제대로 적응하는 것이 더 빨라야 할 텐데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베르융보다 적응이 빠를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서로 너스레가 한 차례씩 나뉘고 나니,
그 위로 떠오르는 건 은은한 미소뿐이었다.
“밤에는 별빛들의 시선이 집중되기를.”
“낯에는 그림자가 해의 노골적인 시선을 거둬주기를.”
그렇게 그들의 인사에,
“때 이른 시기에 맞이할 재회에, 두 분이 기꺼이 당황하기를.”
화답한 나는, 말머리를 돌린 그 둘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바돈과 세라에게도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보면,
어느새 기지어가 내 뒤에 서 있었다.
“깃발 공표에 있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돌아오십시오.”
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게 말했고,
이어 당당한 얼굴로 자답했다.
“마땅히 그 영향력에 합당한 빌비온을 완성 시켜 놓겠나이다.”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나는,
유스티아와 낡은 검.
그리고 반대편에 체결된 한 정의 머스킷을 재정비하곤 두른 어스름을 코 밑까지 끌어 올린 채,
고삐를 놀려 저택 바깥을 향해 달려나갔다.